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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3일 토요일

사진집 「조춘만의 중공업」 - 서평

  조춘만의 사진과 이영준의 글을 엮은 「조춘만의 중공업」에서는 거대한 괴물 같은 기계들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경외감에 대해 잘 해설해 주고 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한 경외감을 꽤 강하게 가지고 그 정체를 해명할 필요성을 느껴 왔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관조적이고 감상적인 미의식에만 머무르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불편함을 느껴 왔기 때문에 '기계비평가' 이영준의 다른 글들도 방학 동안 읽어 보려 한다.

  기계는 가히 근대의 신이라고 할 만하다. 엄청난 밀도와 힘을 가진 강철 괴물들로부터 느껴지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경외감은 적어도 내게는 중세의 신 이상으로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신은 태초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사람들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사람들은 그 기계들 속에서 살며 일하고 다친다.

  중공업 사진이 산업화 이념의 프로파간다로서 사람들을 '눈멀게' 했던 것과 비교하자면, 애호에 기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계를 '보도록' 하는 조춘만·이영준의 기획은 분명히 의미 있는 전환이다. 그러나 기계의 시각적인 숭고와 경외감에 집중할 때, 힘차고 긍정적인 노동자를 강조한 70-80년대의 프로파간다와는 정반대의, '음각적인' 방법으로 진실이 다시 한 번 배제되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겠다.

  나는 공학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은 관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기계들을 보는, '보기만 하는' 나의 태도가 객관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타인을 설득 가능한 '학문'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영준이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비평적' 태도로 쓴 글은 그래서 내게 매우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말한 점 때문에 기계에 대해 조금 더 통합적인 관점을 추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좋은 문장들이 많지만 극히 일부만 여기에 소개해 본다.

"여기서 중심적인 가치는 '애호'이다. 국가에 중요하거나 근대화의 상징이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다는 것, 내 눈에 저 괴물이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국가 발전이나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것보다는 훨씬 사소해 보인다. 국가나 근대화가 작은 개인인 '나'보다 훨씬 크고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중략) 1970, 80년대의 중공업을 이용한 프로파간다는 '보게' 하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릇된 국가관에 눈멀게 하는 이미지였을 뿐이다. 이제 조춘만은 우리로 하여금 괴물을 보게 해준다. '애호'라는 가치에 기초해서 말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19p.

"기계비평적 관심이란 물질계의 속을 들여다보고 어떤 얼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리면 모든 사람은 바삐 역을 빠져나와 제 갈 길을 간다. KTX를 다 소비했으니 더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계비평적 관심은 사람들이 다 내린 KTX가 그 다음에는 어디를 가느냐가 궁금하다. KTX는 계속 달려서 경기도 고양에 있는 행신차량기지로 간다. 거기서 검수도 받고 편성도 바꾸고 한다. 거기서는 KTX 차량을 들어 올려서 차체와 대차를 분리해낸다. 그러고는 차륜을 따로 떼어내 검사고 하고 필요하다면 절삭하기도 하고 너무 낡았으면 교체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KTX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가 실행된다. 기계비평적 관심은 그런 얼개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사물의 외관에 만족하지 않고 속을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리는 해부학적 관심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1p.

"(전략) 지나친 밀도가 일상을 파고들면 짜증이 난다. 버스나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일상의 스케일을 초과한 거대한 밀도를 보다 보면 미적인 쾌감이 생긴다. 그것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조춘만은 밀도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밀도를 뿜어내는 괴물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선원근법을 벗어난 사진 속에서 조춘만이 해내는 것은 우리를 산업의 밀도에 훈련시키는 것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5p.

"(전략) 우리를 위해 있는 생산에 우리가 참견할 수도 없고 우리들 삶의 과정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것, 그것이 생산의 소외다. 조춘만의 사진은 소외 너머에 있는 바로 그 생산을 보여준다. 그것은 소비자인 우리들에게 우리 존재의 기초인 사물들이 어디서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향은 푸근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라 살벌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소외돼 있던 생산의 풍경이 당장 푸근하게 다가올 거라고 기대하면 그것도 지나친 것 아닌가? 수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듯이, 우리는 생산의 고향을 만나고서도 정작 반가워하지 않는다. 조춘만은 기계 사물의 이미지를 억지로 미화하여 고향으로 꾸미지 않는다. 산업의 밀도를 우리들 앞에 던져놓을 뿐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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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화요일

'좋은 경험'이라고? 우리의 일상적 고통을 소비하지 말라

  심신의 고통이나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것, '고통받는 느낌'에 중독되어 있는 것을 싫어한다. 가난한 동네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며 관광지처럼 돌아다니거나, 정신질환에 대해 로망을 갖고(?) 현학적으로 접근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존중이 결여된 채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유형화하여 특별한 것인 양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행태는 분노와 모멸감을 부르기 충분하다.

  비슷한 이유로, 힘든 생활도 한번쯤 겪어 보는 게 좋다면서 사서 고생하기를 종용하는 세태 역시 싫어한다. 자신의 실제 삶을 그 바깥에 두고 있는 자만이 일회적인 체험으로서의 고생을 공적으로 권유한다. 어쩐지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대학생의 사회적 지위가 예전같지 않게 되면서 학술이나 사회참여 등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가 붕괴하고 실제로 대학생들이 모여서 이뤄낼 수 있는 일이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그놈의 "좋은 경험"을 추구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게 아닐까 한다.

  누군가에게 이것들은 한낱 현학적 유희거리이거나, 동정의 대상이거나 혹은 인생에서 한 번쯤 해 보면 좋은 경험 정도일 것이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매일 아침마다 맞이하는, 구체적인 해결을 필요로 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 달동네가 포토존? 그곳 주민은 입을 닫았다 (2015.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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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548719741886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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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4일 월요일

랜선진단: 세 가지 장면

[ 링크: [특파원 리포트] 미 트럼프 대통령 "정신 질환" 논쟁 (2017.02.21) ]

<랜선진단: 세 가지 장면>

첫 번째 장면. 한 전직 심리학과 교수가 김연아 선수, 박근혜 대통령 등의 유명인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여 간혹 논란이 되곤 했다. 그는 김연아 선수와 박근혜 대통령 등을 대상으로 ‘기분 조절이 안 된다’, ‘주위 사람과 어려움을 겪게 되고 정신병을 호소할 수 있다’, ‘ 정신연령 17세 수준’과 같이 심리학에 대한 본인의 전문 지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발언들을 이어 나갔다. 이런 발언들의 여파에 따른 김연아 선수와의 공방 등이 화제와 논란을 낳았다. 공방 중에 그의 대응은 상당히 감정적이었으며, 어디까지가 전문성의 영역이며 어디부터가 김연아 선수에 대한 공격인지 그 경계를 스스로 흐렸다는 점에서 일단 비판의 소지가 명백하다. 그런데, 마치 ‘진단’처럼 보이는 그러한 발언들은, 과연 전문성의 영역에 속해 있기는 한 것일까? 비록 그의 전문 분야가 심리학 중에서도 온라인 게임세계 연구, 정치인 이미지 연구 등 매체라는 주제와 관련이 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특정 유명인에 대한 ‘진단’의 성격이 강한 발언이 과연 적절할지에 대해 사실적 정당성, 윤리적 정당성의 (서로 연결된) 두 측면에서 비판해 볼 수 있다.

두 번째 장면. 미국 대선 기간부터 트럼프 당선 이후 현재까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종의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건전한 판단력을 갖추어야 하는 대통령의 정신건강은 국가안보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것이 ‘소견’이고 어떤 것이 정치적 공격인지는 구분하기 매우 어렵다. 그리고 애초에 그러한 ‘소견’처럼 보이는 발언들이 의학적으로 유의미한지조차 밝혀진 바 없다. 대면한 채 진행되는 여러 검사가 없었기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는 분석이 있으며, 오히려 검진과 같은 통제된 상황이 아닌 일상적인 모습을 볼 때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검진 상황, 일상적 상황, 그리고 미디어 앞에 섰을 때의 상황은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설령 의학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이 이뤄졌다고 할지라도, 그 분석 결과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서 공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이 가지고 있는 범세계적인 영향력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세 번째 장면. 과거 <무한도전>에 출연해서 한 출연자의 정신적 위험을 예견해서 화제가 되었던(실제로 해당 출연자는 공황장애로 방송을 중단했다) 한 정신과 의사가 트위터 상의 설전으로 연일 화제를 낳고 있는 배우 유아인에 대해서 정신적으로 위험하다며 여러 가지 전문 용어를 거론하면서 우려를 표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에 호응하며 유아인을 한편으로는 희화화하고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위 사례들과 같이 어떤 인물의 TV, SNS 등 미디어에 비추어진 모습을 바탕으로 심리학자나 의사가 그 인물에 대한 정신의학적 ‘소견’처럼 보이는 발언을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잊을 만하면 화제가 되는 이러한 '랜선진단'들의 사실적, 윤리적 정당성은 전문가와 대중의 관계 문제까지 엮여서 꽤 중요한 문제이고, 그 답은 대체로 명확하다. 링크된 기사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길잡이로서 꽤나 탁월하다.

  과연 진단이 가능하긴 한지에 대한 사실적 정당성의 문제에 더하여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비판 역시 중요하게 제기된다. 이러한 발언들이 전문 지식을 갖춘 심리학자 혹은 의사의 발언이라는 이유로 권위를 획득하고 대중에 소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들은 타겟이 된 인물에 대한 대중적인 낙인을 일으키며, 정신질환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한다.

  종합하자면, 위의 사례들과 같이 의사가 특정 인물에 대해 퍼블릭하게 진단명을 휘두르는 것은 왜곡된 전문가주의를 강화할 공산이 크므로 오히려 전문성의 부족으로 보인다. 대중이 그 진단명들을 신뢰하면서 그 진단명들을 바탕으로 트럼프의 대통령직 수행을 비판하고, 유아인의 트위터 설전을 희화화하는 것은 과연 정신병자라는 단어를 욕설로 사용하는 것과 얼마나 구분될 수 있을는가.

“핵무기 사용을 결정할, 미국 대통령의 정신적 건강 여부는 자체로도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렌 프란세스의 지적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이런 논란이 가중돼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정치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정치적 해법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기사 원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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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일 토요일

애호박 게이트

애호박 게이트에 대한 생각. 서론이 길다.

  페미니즘은 균질한 움직임이 아니며,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이론적, 실천적 방법론들이다. 그들은 당연히 완벽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들은 때에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인터넷 상에서 최근 유행하는 화법 및 운동의 양상에 대해 과격하다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그러한 문제제기에 어느 정도는 동감하기도 한다(나는 메갈리아가 미러링 등으로 화제가 되면서 언어라는 무기를 획득한 ‘직후’에 조금 더 기민하게 새로운 전략으로 이행하여 운동의 형태로 끌고 갔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유아인을 포함한 유명인의 발화에 대한 단순 비판을 넘은 직접적 인격모독에 반대한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이 문제점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주장,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하라’ 내지는 ‘페미니즘이 아닌 진정한 성 평등주의를 하라’는 주장 등은 성립하기 어렵다. 만약에 현재의 페미니즘 조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성평등을 추구하는 대안적 이론을 만들고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면, 그것 역시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안을 정립하려는 그런 시도들은 주로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방향보다는 단순하게 페미니즘의 이름을 부정하는 시도로 실현되어 왔고, 따라서 성평등 담론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방향이 아닌 반동적인 방향으로 실현되어 왔다. 따라서 학문의 계보 상에서 소위 이퀄리즘으로 대표되는 대안적 사상이 실제로 차지하는 위치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평등 속에 부분집합으로 페미니즘이라는 단일 사상이 덩그마니 있고 나머지 부분에 ‘진짜 페미니즘’, ‘이퀄리즘’의 가능성이 잠재한다는 식의 세계관은 이퀄리스트들의 대안적 도식일 뿐이다. 성평등이라는 큰 목적의식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길이 페미니즘이며 그 속에서 전략적, 윤리적으로 잘못된 선택들이 있을 수 있다는 모델이 훨씬 실제에 가깝다. 그리고 물론 그 선택들에 대한 비판도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로서 운동의 방식과 전략에 대한 내부 비판을 하고자 할 때, 그러한 비판이 여성혐오적 반동의 득세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발화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내부 비판 글을 공유해 가서 “이런 문제들이 있지. 역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야!” 하고 넌씨눈 코멘트 달아 놓은 것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방식은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 꽤나 강력하게 먹히는 듯 보인다.

  이것을 막으려면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신뢰를 확보하고,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는 당신들 편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내부 비판을 하면서도 안티페미니즘에 힘이 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특정 조류들에 대해 비판적임에도 성평등을 향한 인식과 실천을 분명하게 함께하고 있다는 신뢰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다 보면 그 비판을 지극히 주의를 기울여서 발화하게 되며, 해당 발화와는 별개로 평소에 각종 페미니즘적 실천을 해 왔을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받게 된다. 이에 대한 의무감은 페미니스트에게 거의 ‘본능적’인 것이며, 지극히 페미니즘적인 실천이다.

  애호박 게이트 초반에 유아인은 분명히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예의 페미니즘적 ‘실천’을 하지 않았다. 선긋기를 시도하기는커녕 ‘메퇘지’ 등의 단어까지 사용해 가면서 그는 한때 그를 군 면제자라고 극렬하게 비난하던, 그리고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고 극렬히 외치던 남성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더욱 커진 그들로부터 그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고 있다. 설령 그가 실제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페미니즘에 대해 이보다 큰 실례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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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