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성이 강한 SNS 및 각종 커뮤니티를 제외한 일반 포털의 경우, 덧글창이라는 곳은 늘 내게 묘한 영감을 준다. 살펴보다 보면, 정신 속에 오랫동안 덮어뒀던 곳이 바늘로 쿡쿡 찔리는, 그러나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단순히 댓글들의 내용이 놀랍다거나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묵묵히 존재하는 덧글창이라는 공간 자체, 그리고 그 속에 댓글들이 메아리치며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런 아련한 심정상태를 유발한다.
기업형 블로그, 네이버포스트, 그리고 메인에 뜨지 않은 뉴스 등의 덧글창을 보면, 답변이나 답글이 달릴 것이라고는 딱히 기대하기 어려움에도 사람들은 그 곳에 자신의 의식과 정서를 투자하여 덧글을 작성한다. 그리고 그 덧글은 그 상태로 그 서비스 속에 반영구적으로 남는다.
덧글 작성자들끼리 싸우는 것이라던가, 정치 단체에서 ‘작업’ 들어가서 정치적 덧글 쓰는 것은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그것들보다는 누구인지 모를 익명의 네티즌이 오롯이 자기 내면의 솔직한 생각을 투사해서 쓴 덧글들이 내게 그런 아련한 느낌을 준다. ‘외로운’ 덧글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덧글들을 어릴 때 종종 몰두해서 쓰곤 했던 나의 모습도 회고해 보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그게 ‘상호적인’ 의사소통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철저히 ‘내적인’ 언어화 과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공간에서 여전히 그렇게 하는 다른 사람들, 그걸 볼 때마다 그것을 아주 잘 이해해 버리는 내 자신의 모습, 한 때는 융성했으나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곳에 있는 덧글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던 것들이 그런 곳들에 표출되어 메아리치고 있다는 사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 속에 있는 비일상적인 모멘트를 자극하곤 한다.
인터넷에 저런 방향으로 종종 몰두하곤 했던(또한 그럴 수 있었던) 어릴 때의 심정상태가 나는 대체로 짠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면서, 또한 은근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하필 그 때 주로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단지 시기상으로 그런 게시판들이 내가 어릴 때 융성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덧글창의 속성과, ‘어리다’는 속성 사이에 무언가 개념적으로 통하는 것이 있다고 느껴진다.
2. 어린이의 마음에 대하여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터넷 중독이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관심사의 균형이 맞춰지고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에서 꽤나 바람직한 양육을 받았는데, 인터넷을 할 때에는 그것을 활용하는 방향이 저랬을 뿐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인터넷 말고 삶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린이의 마음에는 소위 ‘어리광’, 혹은 심하면 ‘땡깡’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있기야 하지만, (불공정한 계약인) 부모-아동 간의 유대 관계에 근거하여, 비합리적인 요구일지라도 나를 봐 주고 챙겨 달라는 호소이기도 한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한 행동을 할 때 나는, 주로 내 호불호에 근거하거나 뭔가 명분을 잡아서 고집을 부렸지만, 정작 나 스스로도 그러한 행동을 명시적으로 의도하고 통제하는 수준의 메타인지는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아볼 때에야, 요구 사항 자체보다는 유대 관계의 확인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고 비로소 생각이 들 뿐이다.
또한, 각각의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해 ‘호불호’에 대한 감각을 강하게 형성한다는 사실도 위와 병렬적으로 짚어 볼 수 있다. 아이들은 경험이 쌓이면서 무언가에는 몰두하고 집착하게 되며, 또 다른 무언가는 거부하게 된다. 그러한 호불호의 감각은 아이마다 교집합도 많지만, 또 매우 특이하게 형성될수도 있으며, 의식적인 것일 수도, 감각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내 예시를 기억나는 대로 들자면, 옷 뒤 안쪽에 있는 상표가 등 위쪽에 닿아서 간지럽고 거슬리는 것을 유난히 못 견뎌해서, 어머니가 그것들을 가위로 떼어내 주셨었다. 또한, 옳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화나는 것과 별개로, ‘나는 부조리를 싫어한다’라고 다소 의식적으로 정체화를 해서 가족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정도면 평범했지 싶다. 아무튼 이러한 호불호의 형성 역시, 위에서 서술한 유대 관계 확인 욕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이렇게 어린이들마다 다르게 형성되는 원초적인 호불호의 감각, 그리고 유대 관계 확인의 욕구를 나는 ‘원초적 정신’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것을 나는 신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다소 두렵다고 느낀다. 나도 모르게 형성되는 그러한 감각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세련되게 포장되면서 그 날것의 형태로서는 거의 무뎌지거나 잊힌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그러한 감각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 때 나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됨과 동시에, 앞에서 쓴 인터넷 덧글창을 볼 때처럼, 약간 비일상적이지만 꼭 피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3. 종합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인터넷 덧글창과 어린이의 마음이라는 두 가지 소재를 나는 이상하게도 굉장히 비슷하게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서 적어 본다. 우선 두 가지 모두, 상대방을 향한 유효한 의사소통의 요구라기보다는 내적인 심정상태의 외적 표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 모두 결코 ‘반사회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원시적인 형태의 사회성을 나름대로 이리저리 적용해 보며 발전시키는 필수적인 사회적 과정일 테다 (사이버네트워크의 경우, 이러한 과정은 각각의 사람뿐만 아니라 인터넷 스스로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가지 소재의 공통점을 '미성숙한 단계의 사회성'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두 가지 소재 모두, ‘권력’이라는 단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의 덧글들은 종종 권력자들에 대해, 혹은 심지어 그들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것들은 권력자와의 실제 의사소통 시도가 아니므로 당연히 실질적/직접적인 소통으로 가 닿지 않는다. 아이가 갖는 호불호 감각의 경우에도, 주로 아이 자신과 양육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 균형(아이는 아이라는 사실 자체로 챙김받을 권력이 있으나, 양육자는 실질적으로 챙겨 줄지를 결정할 권력이 있음) 속에서 서로가 가진 권력을 본능적으로 견주어 보는 형태로 드러나지, 합리적 의사소통의 형태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인터넷 사이트는 기술적인 한계와 일관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필요성 때문에 (특히 뉴미디어가 아닌 전통적 포털의 경우) 행위의 선택지와 상호작용의 방식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제한되어 있다 보니, 그 구조가 다면적으로 분화되어 있지 않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인간의 원초적 정신을 닮아 있고, 따라서 그런 원초적 정신이 표출되기에 상당히 적합한 공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통적 포털에 비해 뉴미디어 환경에서는 상호작용 방식의 선택지가 많고 또한 ‘사회성’의 모멘트가 강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기가 힘들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세련된 의사소통은 권력의 행사를 간접화하는데, 이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원초적 정신이 가졌던 미성숙한 사회성이 고도의 사회성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겪은 일이고, 또한 어린이들이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겪는 일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예시를 끌고 와서 마무리를 해 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초기에 형성된 원형(archetype)적인 이미지들과 그것을 재조합한 레트로한 아트워크들이 내게 상당히 깊은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인 것 같다. 그러한 아트워크들에서는 인터넷의 원시적 시기에 업로드되거나 생산된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편집되고 조합되어 등장한다. 초기의 인터넷 컨텐츠들은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원초적’이라는 점에서 비유적으로, 또한 실제로 내 어린시절에 그것들이 급속히 발달했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내 정신의 초기적 구성 요소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꿰뜷는 키워드는 역시나 ‘미성숙한 사회성'이 아닐까 한다. 배제할 수도 없지만 익숙하지 않고 낯설 수밖에 없는 그런 것 말이다.
이렇게 어린이들마다 다르게 형성되는 원초적인 호불호의 감각, 그리고 유대 관계 확인의 욕구를 나는 ‘원초적 정신’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것을 나는 신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다소 두렵다고 느낀다. 나도 모르게 형성되는 그러한 감각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세련되게 포장되면서 그 날것의 형태로서는 거의 무뎌지거나 잊힌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그러한 감각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 때 나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됨과 동시에, 앞에서 쓴 인터넷 덧글창을 볼 때처럼, 약간 비일상적이지만 꼭 피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3. 종합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인터넷 덧글창과 어린이의 마음이라는 두 가지 소재를 나는 이상하게도 굉장히 비슷하게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서 적어 본다. 우선 두 가지 모두, 상대방을 향한 유효한 의사소통의 요구라기보다는 내적인 심정상태의 외적 표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 모두 결코 ‘반사회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원시적인 형태의 사회성을 나름대로 이리저리 적용해 보며 발전시키는 필수적인 사회적 과정일 테다 (사이버네트워크의 경우, 이러한 과정은 각각의 사람뿐만 아니라 인터넷 스스로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가지 소재의 공통점을 '미성숙한 단계의 사회성'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두 가지 소재 모두, ‘권력’이라는 단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의 덧글들은 종종 권력자들에 대해, 혹은 심지어 그들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것들은 권력자와의 실제 의사소통 시도가 아니므로 당연히 실질적/직접적인 소통으로 가 닿지 않는다. 아이가 갖는 호불호 감각의 경우에도, 주로 아이 자신과 양육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 균형(아이는 아이라는 사실 자체로 챙김받을 권력이 있으나, 양육자는 실질적으로 챙겨 줄지를 결정할 권력이 있음) 속에서 서로가 가진 권력을 본능적으로 견주어 보는 형태로 드러나지, 합리적 의사소통의 형태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인터넷 사이트는 기술적인 한계와 일관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필요성 때문에 (특히 뉴미디어가 아닌 전통적 포털의 경우) 행위의 선택지와 상호작용의 방식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제한되어 있다 보니, 그 구조가 다면적으로 분화되어 있지 않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인간의 원초적 정신을 닮아 있고, 따라서 그런 원초적 정신이 표출되기에 상당히 적합한 공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통적 포털에 비해 뉴미디어 환경에서는 상호작용 방식의 선택지가 많고 또한 ‘사회성’의 모멘트가 강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기가 힘들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세련된 의사소통은 권력의 행사를 간접화하는데, 이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원초적 정신이 가졌던 미성숙한 사회성이 고도의 사회성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겪은 일이고, 또한 어린이들이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겪는 일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예시를 끌고 와서 마무리를 해 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초기에 형성된 원형(archetype)적인 이미지들과 그것을 재조합한 레트로한 아트워크들이 내게 상당히 깊은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인 것 같다. 그러한 아트워크들에서는 인터넷의 원시적 시기에 업로드되거나 생산된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편집되고 조합되어 등장한다. 초기의 인터넷 컨텐츠들은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원초적’이라는 점에서 비유적으로, 또한 실제로 내 어린시절에 그것들이 급속히 발달했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내 정신의 초기적 구성 요소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꿰뜷는 키워드는 역시나 ‘미성숙한 사회성'이 아닐까 한다. 배제할 수도 없지만 익숙하지 않고 낯설 수밖에 없는 그런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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