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1학년 때 수강한 '대학영어 1' 수업에서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현재 이름은 누르술탄) 에 대해 발표를 준비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 그 정치적 환경과 별개로 내가 오래전부터 느껴온 공연한 미학적 매료를 바탕으로 당시 주제를 선정했던 듯하다. 유튜버 빠니보틀의 투르크메니스탄 여행 컨텐츠가 히트 친 것과도 비슷한 감성일테다. 특히 아스타나 역시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슈하바트와 약간 비슷하게, 계획적으로 조성된 텅 빈 도시 느낌이 나기도 한다.
크게 재미가 없을뿐더러 급히 조사해서 준비하기엔 다들 잘 모르는 도시여서인지, 막판쯤에 음대소속 조원의 건의로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로 주제를 바꾸어 발표하기는 했다.
아무튼 이러한 매료는 독재권력의 산물에 대한 것이다보니 덮어놓고 향유하기에는 다소 불편한 비틀린 것이지만, 공적 기구가 (적어도 홍보 측면에서는) 자기자신의 아우라를 있는 힘껏 격하시키는 환경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국적으로 느껴져 꽤나 보편성이 있는 듯하다.
수도 아스타나의 바뀐 이름 누르술탄은 다름아닌 20년 넘게 통치를 하다가 2019년에 물러난 1대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이름인데, 이렇게 바꾼 것은 나자르바예프 퇴임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2대(2022년 기준 현임) 대통령 토카예프의 결정이다. 나자르바예프는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나서도 여당 대표직과 함께 상왕과도 같은 여러 직책을 갖고 실질적 국가원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토카예프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바지사장인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카자흐스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일단 올해 초에 기름값 때문에 카자흐스탄에서 큰 시위가 일어났고, 나자르바예프는 대통령 퇴임 이후 가지게 된 상왕 직책들에서도 사퇴했다. 토카예프의 주도로 시위가 진압되었다.
그런데 시위를 달래기 위한 일시적인 유화책인지, 혹은 막을수 없는 흐름에 따른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몇몇 완화 조치들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특히 토카예프는 대통령 권한 축소, 헌법재판소 신설 등을 포함한 꽤 놀랄 만한 적극적인 정치개혁안을 제시했다. 심지어 토카예프는 국민들 앞에서 시위에 대한 과격진압뿐 아니라 고문 등이 존재했음도 인정했고, 그동안 만연했던 선거 부정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이미 실질적으로 집행이 안되고있던 사형도 공식적으로 폐지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진의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로 인정을 해 버린 걸 카자흐 국민들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해보면, 일시적인 유화책이 아닌 비가역적인 변화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시위를 결정적 계기로 해서 뭔가 내부 권력구도의 변화가 일어난 듯하다. 물론 토카예프 역시 독재자의 2인자이고, 대통령직에서 권한을 행사하면서 시위 진압을 책임졌기에 수많은 사상자 발생에 대한 최종책임을 갖는다는건 변하지 않는다.
이걸 보니,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기구를 통해 상왕 노릇을 하려 했지만 노태우에 의해 뜻이 꺾인 전두환이 생각나기도 한다. 물론 무대 뒤에서의 권력구도 변화가 더 본질에 가깝겠지만, 역시 시쳇말로 자리가 깡패이고, 자리가 권력을 창출하는 측면도 있는 것인가 싶다.
대략 찾아보기로는, 이러한 결정에는 어느새 한달째 접어들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영향을 줬을것 같다고 한다.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고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괜찮았던 카자흐스탄이지만 러시아의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민주화를 강하게 지향하는 독자노선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찾아봤었던 국가에서 이렇게 실시간으로 변화가 일어나니까 다시금 관심을 가지고 계속 찾아보게 된다. 이러한 정치개혁이 권력구도 변화를 정당화할 보여주기식 조치나 시위 달래기용 미봉책에 그치지 않고 불가역적인 자유의 증진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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