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8일 월요일

어떤 보르헤스적인 농담: 내용 없는 텍스트가 창출할 상상력의 플레이그라운드

미래에는 모든 유머가 사골처럼 우려먹히며 정형화되어서, 유머의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OO번 유머!' 이런식으로 식별번호만 외쳐도 다들 알아듣고 깔깔 웃게 될 거라는 농담을 본 적 있다 (덧글 쓰다가 생각난 건데 이거 굉장히 보르헤스적인 아이디어 같다). 만약 그런 시대가 도래한다면 이 농담은 특별한 메타적 지위를 가지므로 마땅히 제0 번 유머로 삼아야 할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쓰고 싶은 글들의 제목이랑 목차만 써놓더라도 글쓴이보다 지혜로운 읽는이들이 찰떡같이 행간을 채워 읽어주는 시대가 오면 좋겠다. 사실 나는 실제로 학부 졸업논문 주제를 못 정하던 시절에, 멋져 보이는 주제와 제목을 이것저것 계속 만들며 시간을 보내보기도 했다. 마치 학교 축제 무대를 찢는 상상을 하면 즐거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내용 없이 제목만 존재하는 그러한 글들에서 만약 허풍과 자기위안을 걷어낸다면, 독자에게 구체적인 상상의 나래를 펴게끔 하며 고도의 문학성을 확보하고 독자적인 장르가 될 가능성도 보인다. 프로토스라면 이것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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