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9일 월요일

반감의 희롱적인 표출에 지혜롭게 대응하자: '보이루'와 관련하여

학교에서 남성 청소년들이 '보이루'라는 단어를 명백히 동료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맥락으로 쓰면서, 정작 문제삼으면 '보겸하이루일 뿐이야~'라며 기만하는 일들이 자주 있다고 한다. 단어 자체보다는, 어떤 의도로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느냐가 문제인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약올리고 수치감을 유발시키면서 곤란하게 하는 상황을 뜻하는 '놀리다(희롱하다)'라는 단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성적인 것이 결부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도 덜도 말고 성희롱이다.

인과관계를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만약에 혹시나 '보이루'를 그런 뜻으로 처음 해석한 것이 페미니즘 진영의 과잉된 우려였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정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보이루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그 사용자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정말로 벗고자 한다면 그런 희롱적 의미로 쓰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양하면 되지, 진짜로 용례를 만들어 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 동기가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이전의 남성중심적 분위기 때문이든, 아니면 페미니즘 등장 이후에 그것에 대해 생긴 반감 때문이든, 그러한 희롱을 실제로 즐기는 이상 이 둘은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반감을 덜 갖게 하는 것을 페미니즘에서 전략적으로 고민할 수도 있기는 하겠으나, 그 고민 때문에 위축되어 이러한 희롱 자체에 대응하는 동력이 약해질 필요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 진영이 언어를 통제하려고 함으로써 남학생들의 반감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최근에 많다. 그리고 위와 같은 희롱이 유행하는 것 역시 그러한 반감에 의한 것이라고 일각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들이 간과하는 심각한 문제점은, '페미니즘이 좀 더 잘 했다면' 이라는 가정은 정말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가정이라면 원리적으로는 못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페미니즘이 반감을 사는 것은 무엇인가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이고, 반감을 사는 것이 근본적 문제가 아니라,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이 근본적 문제다.

따라서 페미니즘적 실천, 즉 성폭력에 대한 비판 및 인식 환기 노력이, 페미니즘이 유발하는 반감에 대한 지적보다 당연히 우선해야 한다. 이 우선한다는 것은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양적으로 더 많아야 한다는 것도 (일단 여기서는) 아니다. 뭐랄까, 늘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