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9일 월요일

과학주의, 무신론, 세속주의: '공적인 것'을 중심으로

무신론 및 세속주의에 있어서 도킨스처럼 과학을 과도하게 찬미하여 종교의 대안처럼 설정하는 형태,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처럼 나름대로 독창적인 타협안을 제시하는 형태 모두 끌리지 않는다. 전자는 과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유난스럽다고 느껴지고, 후자는 굳이 영적인 것을 향유하는(혹은 그러한 척하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입장에서 유난스럽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둘 모두 영적인 것을 중시하는 서구(특히 미국)적 전통에 의존하고 있으며, '무신론도 결국 종교성을 갖는 것 아니냐'는 종교인들의 물귀신 작전식 비난에 대단히 취약하고 때로는 그 비난을 별로 부당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자유주의를 주장한 아인 랜드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컬트처럼 신봉되는 희극적인 사태에서 이러한 미국적 정신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서구 무신론의 이러한 '유난스러운' 면모는 아마도 강력한 제도종교가 천 년 넘게 군림해 오면서 그들의 정신문화를 뿌리깊게 형성해 온 상황에서 그 안티테제를 급진적으로 제시하려다 보니 발생한 것일테다. 이러한 면모는 완화될 필요가 있다. 요즘은 다름아닌 동북아시아 특유의 세속주의가 정치적으로 훨씬 더 성숙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대로 긍정하자는 것은 아니고, 많은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 정도이다. 세속주의는 결국 사적인 견해가 공적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공적 이성'에 대한 감각을 강조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과학과 우호적인 관계를 끊지 않으면서도 컬트로 전락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가치 있는 의제를 다루는 집단이 정치적 미숙함으로 인해 공적으로 인정되는 주류가 아닌 사적 컬트가 되어 그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만은 막고 싶다. 이 목표는 비단 무신론 및 세속주의뿐 아니라 여성주의, 환경주의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속주의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하면서, 이 목표가 실현됨으로써 지켜지길 바라는 개별 가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이 문제를 몇 년 단위로 고민해 온 내 나름대로의 중간점검 결과이다. 지금까지 고민한 내용들을 써 놓은 글 조각들은 이것저것 있으나 하나의 체계적인 글로 엮기엔 역량이 부족하다 보니, 앞으로 꽤 긴 시간에 걸쳐 부족한 점은 공부도 해 가면서 창조과학 등에 대한 견해부터 '공적인 것'에 대한 견해까지 찬찬히 풀어내 보도록 하겠다.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