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4일 수요일

세련된 권위가 구현되는 교육현장을 바란다

학창시절 과도한 민족주의 내지는 친북적 교육이 있었다는 게 (그것이 공식 교육과정이건 교사의 독단이건) 진보에 대한 실망감의 근거로 많이 지적되고 때때로는 청년우파의 탄생설화의 주요 줄기로 인용되기도 한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그런 쪽으로는 직접 겪은 나쁜 기억은 없다.


많이들 있었다고 회고하니까 정말 많이들 그랬구나 하긴 하는데, 알아서 걸러들어서 기억에서조차 지워 버린 건지, 아니면 그런 선생님들을 안 만나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아예 내가 편향적인 사람이어서 편향이라고 안 느꼈던 건지. 여튼 내가 몰랐던 그런 사례들을 보면서 경험을 간접적으로 확대하고 그러면 되는 것이겠지.

심지어 최근에도 어떤 선을 넘는 편향적 교육의 사례는 잊을 만 하면 보이기는 한다. 예를 들어 공식 학습자료 같은 건 아니고 일선 현장에서 만든 학습지 같긴 한데, 북한의 체제 선전적, 착취적 시설물들을 소개하면서 비판적인 인식은커녕 묘하게 친근감까지 의도했다고 느껴질 수 있는 사례가 있었다. 학부모들이 보면 경악할 만했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특정 아젠다에 포커스가 맞춰진 도서를 아예 교육청에서 교과서로 제작해서 배포하기도 했었다. NGO들과의 협력으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헌법에 탈핵이 있는게 아닌 한 그런 건 교육당국이 할 일은 아니고 공공성이라는 가치와 거꾸로 가는 일이라고 생각.

또 생각나서 예시를 추가하자면 인헌고에서 반일 관련 피켓같은걸 학생들에게 들게끔 했다는 것도 있었음. 이걸 공론화한 사람들이 그 성평화 동아리 하던 사람들이라는 건 차치하고 저게 사실이라면 분명히 잘못된 것인 듯.

다만 청년우파의 서사는 일단 의심해 보는 관성에 따라 한 가지 의구심을 가져보자면, 헌법적인 원리와 기본적인 학술적 개념들에 기초한 당연한 것들을 가르치는데도 학생들이 그걸 좌편향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있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헌법 얘기가 나와서 첨언하자면 물론 기본적으로는 교과교육이니까 거기서 배워야할 '학술적인' 것들이 있을텐데 그런건 헌법과는 독립적일테고, 헌법도 시민된 입장에서 불가침은 아니니 그것을 넘어서는 사유도 할줄 알아야겠지만 일단 시민교육의 성격을 가진 대목들에선 제일 기본적으로 기댈 곳은 헌법이라고 생각함. 물론 뇌피셜임...)

초등학교 때는 우리 학교가 통일 시범학교였는데 낭만적 대북관, 막연한 통일지향 같은 식이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정확한 자료와 여러 통일론을 소개하는 식이어서 지금 봐도 꽤 잘 배웠던 것 같다. 다만 북한의 문화를 설명할 때 정권에 의한 통제의 산물들이라는 걸 왜 강하게 얘기 안하는지 의문이긴 했었는데... 뭐 모든 문단에 그런 피아식별부호와 비판의식을 삽입해둘 필요는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알아서 납득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퀘스쳔마크가 남는다면, 그런 질문들이 쌓여 편향적 교육이라는 인상을 형성할 수도 있을듯.

중학교 땐 공산주의/사회주의랑 민주주의가 반댓말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화의 반대가 산업화가 아니다 (이게 왜 나오는 얘긴지는 비슷한세대 페친분들이면 아실듯) 이런거 설명해 주신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현실정치적 동기가 어느정도 반영된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쨌든 순전한 개념 상으로는 정확한 것들이었고.... 그런걸 편향적 교육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근데 돌아보면 확고한 우파성향의 학생들이었다면 그 선생님들이 그런 설명들을 하게 된 동기 자체에서 어떤 '정치적' 문제의식을 느껴 거부감을 가질수 있었겠다 싶긴 함. 실제로 그런 학생들로부터 뒤에서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사회 관련과목 선생님이 아니기도 했고....

여하튼 이 문제는 어려운 듯하다. '교사가 문제소지 있는 발언을 해도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능력을 함양하면 된다'는 해법이 이상적이겠지만 여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공교육은 아무것도 전제되지 않은 무질서로부터도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지라, 그 능력을 함양하는 것도 결국 공교육의 역할인거고... 비판적 수용의 가능성을 모두에게 열어두려면 학생들 개인의 상식과 사고력 같은 것도 중요하겠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학교 내의 권력관계 같은거랑 관련이 있지 싶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교사와 마주하는 것뿐 아니라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와 마주할 기회가 더 많아질수록 교실에서의 그런 문제는 완화될것 같고... 이는 이 글에서 말한 소위 정치편향뿐 아니라 인권침해적 발언 등에 대해서도 어느정도는 해당되는 것 같다. 교사가 교실 내 이런저런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통제력과, 공인된 내용을 전달할 충분한 권위는 있되, 교사가 하는 모든 발언이 그런 공인된 내용들에 준하는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것이 인지될 수 있도록 분위기적으로, 시스템적으로 보장하는?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쓰면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일단 여기까지만.

여하간 정론에 대한 불신과 대안적 세계관에의 추종은 권위주의의 필연적인 쌍대인 듯하다. 독재의 권위 하에서 민족주의를 찾게 되었던 교사들도, 그것을 설파한 교사들의 발언을 근거로 스스로를 청년우파로 전신한 학생들도 말이다. 그런 식의 찍어누르는 권위를 타파하고 세련되고 민주적인 권위를 구현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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