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31일 화요일

서태지 8집 발매 10주년을 기념하여

  어제는 서태지 8집이 나온 지 정확히 10년 째 되는 날이었다. 정확히는 정규 8집이 나오기 전에 미스터리 컨셉의 프로모션이 진행된 뒤 <Moai>, <Human Dream>, <T'ikT'ak> 등이 수록된 첫 번째 싱글이 2008년 7월 29일에 발매되었고, 나머지 곡들은 그 이후에 2회에 걸쳐 공개되었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일부러 찾아서 들어 본 노래가 서태지 8집이고, 이것을 계기로 서태지를 통하여 록의 다양한 장르를 접하기 시작한 만큼 내겐 2018년 7월 29일이라는 어제의 날짜가 괜히 감회가 새로웠다. 이하에서는 서태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과 함께 좋아하는 곡들을 추천해 보기로 한다.

  이 10년이라는 숫자는 이 글을 쓰면서 내게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숫자이기도 하다. 메탈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 출신인 서태지가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으로 넘사벽급 커리어를 쌓고 은퇴하였을 때가 서태지가 불과 25세일 때로, 그가 악기를 처음 잡은 지 약 10년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저런 걸 이뤄낼 수 있는 기간인데 나는 10년간 무엇을 했는가? 서태지가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엄청난 인기를 바탕으로 기존 음악산업의 관례를 무시한 채 마이웨이를 걸으면서 개인적 성공과 함께 사회에도 많은 화두를 던진 것을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만화적 인물'이라는 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4집을 끝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을 정리하고 은퇴했던 서태지는 귀국하지 않고 앨범만을 발매한 솔로 1집(통칭 5집)을 거쳐, 새빨간 레게머리를 하고 뉴 메탈 장르의 곡들을 들고 나온 6집 활동을 통해 음악적으로도, 외모적으로도 완연한 로커의 모습으로 컴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커로 컴백한 솔로 커리어 이후로도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아이돌'적인 면모를 독특한 방식으로 계속 가지고 간다. 한국의 록을 이야기할 때 서태지의 위치가 아주 미묘해지곤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데, 이것은 첫째로는 그가 록 밴드의 성향과 랩댄스 아이돌의 성향을 결합한 음악적 토양을 가지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는데, 후대의 대중음악 판도에는 주로 후자의 면모만이 부각되어 계승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그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선보였던 랩댄스 음악을 솔로 활동에서는 주로 록으로 편곡하여 선보이면서도, 방탄소년단과 함께한 25주년 기념공연 등 특별한 경우에는 랩댄스 스타일의 원곡을 최대한 살려서 선보이기도 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로커 출신이지만 랩댄스 위주로 대중음악이 재편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나서 은퇴한 뒤, 다시 로커로 회귀하여 컴백한 서태지는 과거의 랩댄스 아이돌이자 현재의 로커로서 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서태지가 로커로 컴백했음에도 아이돌적인 면모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위와 같은 점 외에도, 그의 솔로 커리어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서태지의 솔로 커리어의 매 앨범은 같은 아티스트의 앨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상이한 장르를 보여준다. 6집에서는 공격적인 기타 리프와 차가운 래핑 위주의 뉴 메탈을 표방하였으며, 7집에서는 몰아치는 기타 연주에 마치 다채로운 색깔이 느껴지는 듯한 장조의 선율을 덧붙이는 작법을 구사하였고, 8집에서는 지극히 복잡한 리듬 위에서 록과 일렉트로니카의 화학적 결합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9집에서는 기타의 비중을 축소시키고 통통 튀는 신스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러한 디스코그래피 운영은 넓은 폭의 장르를 수용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서태지의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일관되지 못한 커리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개별 음반들이 꽤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디스코그래피로 인하여 록 중에서도 특정한 장르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 정통적 록 팬들보다는, 서태지라는 인물과 서태지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 위주로 팬덤이 축소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 팬덤은 록 밴드의 팬덤이라기보다는 아이돌 그룹의 팬덤과 닮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태지의 의중과 관계없이 상당히 많은 록 마니아들에게 서태지와 그의 팬덤이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지고, 때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그러나 펜타포트에서는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위와 연결되기도 하는 이야기인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설 등 돌이켜 볼 때 웃음만이 나오는 것들을 제외하면, 서태지에게 가장 크게, 또 오래 씌워진 혐의는 아마 '록적 저항 정신의 상업화'일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상술한 솔로 2집(6집) 활동에서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게는 헤드뱅잉 등의 록적 액션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된 안무를 하듯이 구사한다는 비판부터, 크게는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저항의 이미지만을 상업적으로 활용할 뿐 실질적인 저항이 부재하다는 비판까지 수많은 비판이 쏟아졌으며, 이러한 비판은 기성 보수 언론에서부터 진보적 인디씬까지 넓은 스펙트럼에서 터져나왔다.

  그러한 비판들 중 일부는 뼈아픈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서태지가 저항을 상업화시켜 퇴색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각종 문제들에 대한 개인 차원에서의 저항을 실질적으로 성공시켜서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서태지는 아이들 시절부터 솔로 시절까지 끊임없이 기획사의 횡포, 음반 사전심의제도, 방송 검열 등 충분한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애를 썼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춤출 수 없으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 서태지의 이런 행보가 인기를 바탕으로 한 대담한 마이웨이에 따른 통쾌한 성공이며 그 과정에서 꽤 많은 사회문화적 변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가 주로 대중음악인의 권리 증진에 집중되었고, 진보적 인디 씬에서 서태지에게 의심 섞인 눈초리로 기대하던 혁명적 사회 변화와 인디 음악의 부흥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으므로 비판의 소지가 제공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는 스스로 끊임없이 혁명가, 문화 대통령이라는 언론의 칭호에 대한 부담감을 표해 왔으며 자신이 자처하지 않은 어떤 사회적 역할이 기대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자주 난처함을 표했다. 말하자면 서태지에게 과도한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 것도 서태지 및 팬덤이 아닌 외부의 호사가들이었고, 그 역할이 수행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서태지를 비판한 것도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태지는 솔로 커리어 초기에 서태지컴퍼니를 통하여 인디 씬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넬, 피아 등의 밴드를 지원하고 록 페스티벌 ETPFEST를 수 회에 걸쳐 주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서태지에 대한 '록적 저항 정신의 상업화'라는 비판은 대체로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서태지 솔로 커리어의 가장 큰 특징은, 사운드, 가사 등 모든 면에서 솔직하고 강렬한 표현보다는 거의 집착적인 수준으로 세밀하게 정제된 음악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서태지의 곡을 감상할 때 가슴이 뛰는 것과 별개로 그 곡들이 창작된 작법은 디오니소스적이라기보다는 아폴론적이고, 뜨겁고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차갑고 계산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약간의 '센스' 내지는 '재치'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많으나, '유머', '인간미'라고 불릴 만한 요소는 0에 가깝다는 점도 특징이다. 아마도 충분히 조탁되지 못한 인간미가 작품에 혼입되는 것을 서태지가 체질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서태지를 둘러싼 '신비주의'라는 유명한 칭호의 본래 정체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것은 서태지뿐만 아니라 대중적이지 않은 록 음악에서 어느 정도 빈번하게 관찰되는 특성이지만, 서태지는 한때 대중성의 정점에 오른 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향을 추구하다 보니 마치 이게 서태지만의 특징인 것처럼 세간에 회자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서태지가 이들 중에서도 유달리 이러한 성향이 강한 것 같기도 하고.

  이러한 특성은 가사뿐만 아니라 사운드적인 면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기타 리프를 raw하게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여러 겹의 소리들로 감싸서 조심스럽게 배치한다(6집 리레코딩은 예외이겠다). 이런 성향은 6, 7집부터 조짐을 강하게 보이다가 8집에서 폭발적으로 발현되었는데 몇몇 평론가들은 이러한 성향을 두고 '자폐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어제로서 딱 10년 된 서태지 8집은 그의 이러한 세밀함이 가장 잘 드러난 앨범이기도 하고, 서태지가 제일 잘 하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 앨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8집을 서태지 솔로 커리어의 마스터피스라고 생각한다. 곡 하나하나의 밀도가 상당하여 여러 번 반복해서 듣더라도 인지적으로 '재밌게' 들을 수 있는 앨범이라는 점도 있고. 그런데 뭐 이러한 서술도 9집에서 인간미를 많이 드러내면서 옛날 얘기가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특유의 세밀함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으므로 뭐라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겠다. 아무튼 기대하면서 지켜볼 일이다.

(2) 'Bermuda[Triangle]' (8집 'Seotaiji 8th Atomos', 2008) : https://www.youtube.com/watch?v=km1fuG7svPY
(3) '로보트' (7집 'Seotaiji 7th Issue', 2004) : https://www.youtube.com/watch?v=ToeTsQWSSqI
(4) '울트라맨이야' (6집 'Tai Ji', 2000) : https://www.youtube.com/watch?v=8jtKmWXdh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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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30일 월요일

음산한 종교적 도상들에 대한 매료

  나는 동서양 문화권을 막론하고 음산하고 신비주의적인 느낌을 주는 종교적 도상들이 뭔가 컬트적으로 마음에 든다. 집에 걸어두고 싶지는 않지만 미술관 같은 걸 차려서 수집해 두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 특히 상대적으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르네상스적인 그림들보다는, 지극히 복잡하여 눈과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들, 종교적 위계에 따라 인위적으로 배치된 것들, 기하학적 대칭성을 갖는 것들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뭐랄까... 분절적으로 언표될 수 없는 고대의 거칠고 원형적인 정신(?)을 담으려고 한 것 같달까. 나는 이런 것들을 본래의 맥락에서 탈각시켜서 내 미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멋대로 향유하고 있긴 하지만, 제작자의 본래 의도대로 향유될 경우에는 굉장히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정신분석이 문화이론 등에서 많이 쓰이게 된 것도 이런 것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사람들이 많이 요구해서가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내가 헤비메탈을 처음 접했을 때 마음에 쏙 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메탈밴드들이 컨셉으로 이런 이미지를 자주 차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일부는 진지하게 반종교적인 표현을 위해 다른 문화권의 종교적 모티브를 차용하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그냥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특유의 시각적 느낌을 주고자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음산한 종교적 도상들에 더불어 나는 이전에 썼듯이 기계스러운(?) 것들에도 강하게 매료되는데, 메탈이 하필 사운드적으로, 내용적으로 그런 기계스러운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나는 메탈 장르를 적극적으로 새로이 찾아서 듣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늘 괜스레 친숙하게 느끼곤 한다.

  막짤 국벤져스는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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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ongkhapa Refugee Tree by Urken L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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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6집 "Tai Ji" 앨범 커버(후면) designed by 전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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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huggah 7집 "Koloss" 앨범 커버 designed by Luminokaya

이미지: 사람 1명
Mexican. Mano Poderosa (The All-Powerful Hand), or Las Cinco Personas (The Five Persons), 19th century. Oil on metal (possibly tin-plated iron), 13 7/8 x 10 1/16 in. (35.2 x 25.6 cm). Brooklyn Museum, Museum Expedition 1944, Purchased with funds given by the estate of Warren S.M. Mead, 44.195.24

이미지: 사람 8명, 웃고 있음, 사람들이 서 있음
국벤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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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7일 금요일

오랜만의 일기

  인생샷, 인생맛집 같은 것처럼, 뭔가를 생각하다가 때로는 '이건 진짜 내 인생주제다,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들이 여기서 종합되어 다뤄질 수 있겠구나'하는 느낌이 들어서 생각이 마구 전개되고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는 때가 있다. 문제는 그 인생주제라고 확신하는 관심사가 지난 1년만 해도 벌써 몇 번씩이나 바뀌었다는 점이다. 아주 넓게 보자면 '합리성'에 대한 관심인 것 같긴 하지만, 딱히 체계적이지 않고 그냥 산발적인 것들이므로 단순하게 요약되긴 어렵다.

  그럴 때마다 카톡 나와의 채팅에다 써 놨던 글 조각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뇌를 그 때의 모드로 되돌려 보고 싶은데 시간이 지나면 그게 불가능해지는 것이 대단히 아쉽다.

  사실 중학교 때는 인생주제라고 일관되게 생각한 게 "물리를 계속 공부하면서도 '일반물리적 센스'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일반물리적 센스라는 것은 그냥 내가 만든 말인데, 지금은 그 때 생각했던 일반물리적 센스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 시절 저 강령을 따르면서 써놓은 글 조각들을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지만 그 당시로 되돌아가서 생각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마치 남이 써 놓은 글을 읽는 느낌이다.

  아마도 그때 생각했던 '일반물리적 센스'란, 물리적 세계를 이루는 원자들과 그 상호작용을 나름대로 '내면화'함으로써, 추상화된 개념들과 수학적 도구를 쓰면서도 계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결국 수식에만 매몰되면서 현상을 못 보게 되지는 않을지에 대한 불안함이었던 것이다. 그걸 일반물리적 센스라고 불렀던 것은 그냥 내가 그걸 일반물리에서 그나마 잘 해서 그랬을 것이고.

  물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서 물리를 공부하면서, 저것이 아주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라 충분히 흥미를 가지고 공부한다면 달성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 '충분히'의 기준이 생각보다 높기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것도 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수하지 않고 일반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해도 모르겠다면 거기가 내 공부의 한계인 것이겠다. 그래서 '일반물리적 센스'에 대한 나의 관심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과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학도 아닌', 중간쯤에 있는 분야를 정초해 보는 것이 나의 인생주제라고 생각했다. 저것 역시 적절한 단어를 몰라서 그냥 내가 만든 표현인데, (물리적 세계가 아닌) 인간 세상을 문학으로만 다루는 것은 명백히 불충분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발전해서 모든 걸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며 모든 뇌피셜을 완전히 중단하기도 아쉬우니까, 그 중간 정도 위치에서 나름대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만든 표현이다.

  구체적으로는 과학 자체를 배우는 걸 넘어 그 과학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생각들, 사회 내지는 인간관계에 대해 마치 과학처럼 나름대로 개념을 정의하고 이론을 세우는 것들, 그리고 국어 시간에 배우는 문학 작품들의 형식에서 느껴지는 형용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좀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것들 등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첫번째와 세번째는 그냥 교과 공부를 하면서 든 생각이고, 두번째는 내가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자책하면서 주변을 열심히 관찰하다 보니 든 생각이다.

  그런데 웬걸, 대학에 와 보니 이런 분야가 이미 (너무도 당연한 듯이) 있었고 그것은 다름아닌 '철학'이었다. 위 문단의 세 가지 관심사는 각각 과학철학, 사회철학, 미학 정도가 되겠다. 중학교 때는 철학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도덕 시간에 단편적으로만 배우면서 부정적인 인상으로 접했고(뇌피셜로 훈계하는 느낌이라), 고등학교 때는 철학을 접할 기회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그 이름도 익숙한 '철학'이 정확히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것일 줄은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관심사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철학이란 말 자체는 많이 보았지만 대부분 그냥 물리에서의 어떤 문제에 대한 접근법을 말하는 것이었고,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해서는 어린시절 모친께서 말해 준 '생각에 대한 학문'이라는 말만을 기억한 채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기에, 바로 그게 철학이라는 걸 알고 대단히 반가웠다. 철학 중에서도 여러 가지 우연적인 이유로 미학에 흥미를 느껴서 미학과를 부전공하게 되었고, 돌아보니 마치 필연이자 운명인 것처럼 느껴지는 몇몇 이유가 있지만 필연이란 없으므로 자세한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든 잘 맞는 것 같아서 계속 하고 있다.
(참고로 어린시절 모친께서 물리에 대해서는 '힘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했다. 문리대를 나오셨는데 발음 때문에 당시에 잠깐 동안은 물리를 전공했다는 줄 알고 이것저것 물어보았었다. 그 당시에 사회과 교사이신데 물리를 전공했다고 하는 것의 이상함을 아주 막연하게밖에 못 느꼈을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커서 이론 물리학자가 될 거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나의 철학적 성향에는 위에서 말한 중학교 시절의 '일반물리적 센스'가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는 점이다. 나는 뭔가를 과도하게 체계화하여 사변적으로 성을 쌓는 것, 상징과 은유, 서사를 오용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며, 온갖 분야를 하나로 합치고 거슬러 올라가서 통합된 진리, 내지는 궁극인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냉소한다. 따라서 로고스중심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그걸 까면서 나온 상징과 은유, 내러티브에 과잉되게 의존하는 현대철학의 일부 사조에는 더욱 비판적이다. 철저하게 개별 문제의 성격에 따라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성향은 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중학교 시절에 추구했던 '일반물리적 센스'와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최근에 생각하는 '합리성'과도 통해 있다. 흔히 이성이라고 생각되던 오만한 사변을 철폐하되, 흔히 이성의 오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것으로 여겨지는 상징, 은유, 서사의 오용 (양적 남용이 아닌 질적 오용이다) 역시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상으로 서사를 경계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겪었던 여러가지 생각의 변화를 자의적으로 엮어서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보았다. 서사를 경계하면서도 결국 서사를 만들어 내고야 마는 이러한 습관이 생긴 건, 내가 했던 생각들이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집착에 의해 사후적으로 어떤 '큰 그림'을 뒤늦게 요청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는 이것이 나의 지난 몇 년에 대한 최선의 요약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또 생각이 바뀌어 다르게 요약될 것이다.

  아무튼 필연이란 없고 서사 역시 사후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므로, 나라는 인간의 캐패시티를 키워서 다양한 가능성과 기회를 열어 놓으면서도, 밀려오는 우연들에 잘 대처하여 특정한 방향을 향하고 그것이 사후적으로 괜찮은 서사로 요약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라는 자기계발서스러운 결론으로 일기를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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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1342975208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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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6일 목요일

저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댄디 보수'를 보며

  K-자유주의자들이 조선일보에서 '댄디 보수'라고 소개되어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꼰대 보수는 싫다, 2030 '댄디 보수'의 등장 (2018.07.19)] )

  자유는 그 자체로 발견된다기보다는 그 가능성만이 발견되어 실질적으로는 투쟁을 통해 쟁취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사회에서의 권리와 의무를 이론화하는 출발점처럼 여겨지는 사회계약론 역시 - 물론 사회 형성 과정에 대해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보고 분석한 것이기도 하지만 - 실질적으로는 근대국가 속에서의 개인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당위적으로 채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밑바탕에 권리 획득을 위한 투쟁이 있어야만 유명무실화되지 않고 실현되어 유지될 수 있다. ‘사회는 사회계약에 의해 형성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이다’ 같은 명제를 투쟁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 법칙인 것처럼 이해한 채 전개되는 담론은 유해하다. 내가 한국 보수이념에서의 자유주의, 소위 ‘K-자유주의’를 자유주의에 대한 오독이라고 여기며 매우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2년 전에 이에 대해 몇 자 적은 바 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002544776503894&id=100002451425265)

  정치적 자유주의자라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성실하고 근면하게 노력하여 남들보다 잘 되어서 성공을 거두라는 주문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부당한 처사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과 관련되어 있는 ‘불온한’ 영역, 입사지원서의 스펙 란에 써넣기 다소 꺼려지는 영역을 필시 어느 정도 긍정하게 된다. 그러나 K-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정치적 영역에서의 행동들을 비판하고, 오직 비정치적이고 소시민적인 노력만이 성공의 정당한 수단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때 '꼰대 보수'들에 의하여 유행했던 노오력 담론과 통하는데, 특정한 방식의 삶만이 정상이고 보편인 것처럼 권장하는 것을 보면 친기업 정서의 확대를 노리는 공작의 산물이라는 혐의도 받을 수 있다.

  차라리 정치적 투쟁을 통한 자유의 획득도 정당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하여 동일한 관점을 적용한다면 일관성도 있고 나름 설득력도 있는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자유 사회를 쟁취하기 위한 수면 아래의 투쟁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불온하다’고 생각하여 폄하하고, 활동가들의 실책이나, 청렴결백한 이미지와 달리 권력을 누리는(?) 모습들을 부각하고 희화화하면서,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삶을 영위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스스로는 그런 가식적인 모습에 감화되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댄디한’ 보수임을 자처한다.

  이들이 정치적 자유에 의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비우호적인 이유는 주로 그러한 활동들이 기업활동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념을 지키고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 속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가 훼손된다면, 즉 자유로워야 할 사람들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면, 정치적 자유에 의거한 비판이 과연 부당할까?
결국 K-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긴밀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오묘한 관계를 무시하고 후자의 영역만을 긍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K-자유주의는 매우 정치혐오적이고 반동적이다. 이러한 점은 현실 정치 지형상에서도 나타나는데, 지난 박근혜 정권 4년간 자유주의를 자처해 온 청년 보수단체들은 어버이연합과 함께 전경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어용단체로서 박근혜 정권의 이념적 정당성을 결사 옹위한 것을 제외하면 그 정치적 기여가 전무하다.

  폭식투쟁을 기획하여 많은 어그로를 끌고 정작 그 실행이 임박하자 비겁하게 뒤로 물러났던 K-자유주의 청년단체의 타고난 반사회성은 벌써 4년이 넘게 비판받았고, 박정희의 국가발전 서사를 찬미하는 기성세대의 보수 역시 태극기집회를 필두로 한 실추된 이미지를 보이며 몰락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한목소리로 ‘댄디’를 자처하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면서 출범한 보수 개신교인 모임으로서 캠퍼스 내에서 수구적인 이미지의 총화와도 같은 ‘트루스 포럼’마저, 채널에 따라서는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하면서 급기야는 이 ‘댄디보수’의 대열에 함께 소개되기까지 하였다. 세련됨을 강조하는 청년보수와 수구적 기독보수의 이미지는 표면적으로 반대되기에 이 둘의 결합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으나, 유튜브의 ‘슈타인즈 채널’ 등을 보면 이미 이 둘의 결합은 ‘화학적 결합’ 단계에 이르렀음을 능히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만간 보다 자세히 써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댄디’를 운운하면서 세련되고 품위있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보수의 품격 상실과 이미지 실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라고 보지 않으며, 오히려 반사회적 폭식투쟁만큼이나 문제성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약자들이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때 ‘댄디’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변하여 열을 내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는 일베적 정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북 판에서 나름 유명한 어느 대학생이 노회찬의 사망과 관련하여 잔치국수 짤을 올린 것 역시 이와 비슷하게, 고인을 모독했다는 데에 진보 진영이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화내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으려는 일베적 정서와 통해 있다는 생각이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 혹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정치적 문제제기가 감정적 표출만으로 끝나지 않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은 맞으나, 이것은 국민들의 의견이 효과적으로 접수되어 누적될 수 있도록 사회적 장치가 발전해야 하는 문제이지, K-자유주의자들처럼 감정이 섞였다는 이유로 문제제기를 기각하고 조롱함으로써 해결되는 문제는 절대 아니다.

  자유, 합리 등 내가 좋아하는 가치들을 가져가서 오염시킨 K-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비난을 하다가도, 정작 이 단어들이 오염되지 않고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보여진 적이 있는지를 생각하면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자유와 합리를 좋아할수록 이들 단어의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실제 정치적 문제에 적용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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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4일 화요일

드루킹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점

  수상한 외곽조직 굴리면서 정치인들 도와주다가 종국에는 코가 꿰이게 해서 이득 취하는 업자들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정치권에서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몇 개의 지역에만 거점을 둔 정치조직의 경우에는 조직 전체가 이런 업자들에게 장악되기가 쉬운 것 같다. 이재명 건에서 볼 수 있는 기업화된 폭력조직도, 드루킹 같은 인터넷 컬트 리더 출신도 마찬가지다.

  기성 정치인들은 수상한 단체가 정치영역에 발을 붙여서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마약과 무기가 활개치는 몇몇 타국에 비해 한국에서 나름대로 괜찮게 유지되고 있다고 보여지는 '선량함'을 수호할 책임을 가져야 하겠다. 정치는 공적 문제 해결을 위해 존재하며 그 문제들에는 '더러운' 것들도 포함될 수 있겠으나, 정치인들은 더러운 것들을 다루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될지언정 또다른 괴물을 끌어와서 정치판을 잠식하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1) 초선 국회의원 및 기초의원, 광역의원 등이 그런 업자들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교육이 철저히 이뤄져야 할 것이고 (2) 당내에 섞여들어온 세력의 현황을 중앙당 차원에서 적극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3) 외곽조직이 사람과 돈을 잘 끌어온다고 해서 구체적인 origin을 잘 모르면서 과도하게 의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4) 마지막으로, 각 지역에서 정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정치판에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승부를 볼 수 있도록 공정한 환경을 조성하여, 그런 업자들에게 감화되지 않도록 신경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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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에의 천착은 우리를 무의미로 이끈다

이전에 '폭력' 개념에 대해서도 비슷한 글을 쓴 적 있는데, 어떤 사안을 볼 때에 '결국 다 권력싸움', '결국 다 인정욕구', '결국 다 이해관계'라는 식의 주장이 제공하는 구체적인 통찰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저런 주장은 대체로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지극히 원론적이므로, 내겐 '결국 원자들의 상호작용일 뿐'이라는 주장과 비슷하게 들린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구태여 저것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저것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저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 토대 위에서 무언가를 모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것만을 강조하면서 남다른 통찰인 양 하는 태도는 피로감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런 주장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경우는 특정 사안이 정말로 권력싸움/인정욕구/이해관계라는 점 말고는 구체적으로 논평할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 혹은 조명되고 폭로될 가치가 있는 특이사항이 발견된 상황 등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빨간약을 먹는 수준의 충격이 수반될 수도 있기는 하겠으나, 이 역시 이런 주장에 의한다기보다는 그 특이사항 자체에 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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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7일 화요일

과학계 정설의 인용은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인가? : 과학주의에 대한 적확한 비판을 향하여

  '누군가 A가 참이라고 했으므로 A는 참이다'라는 논증은 분명히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A는 학계의 정설이다'라는 명제는, 개념 정의를 잘 하고 논증을 잘 구성한다면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없이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 A를 인용하여 어떤 논증을 구성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는 딱히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아니다.

  페이스북 철학 그룹 등에서는 과학 지식들에 익숙하며 그것들을 중심으로 세계관을 구축한 자들을 비난함과 함께, 그 사람들이 과학 지식의 권위를 맹신하는 문제를 저지른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주로 이러한 주장은 과학도 결국 종교 아니냐고 주장하려고 하는 종교인들이나, 과학주의에 대한 세련되지 못한 철학적 비판자들에 의해 이뤄지는데, 이러한 주장이 근본적으로 취약한 이유는 바로 위 문단의 두 가지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과학 지식들은 모두 유보적인 것이며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새로운 지식이 얻어짐에 따라 그 지식들로부터 유비적으로 얻어지는 우리의 세계관도 바뀔 수 있는 것인데, 과학주의에 대한 세련되지 못한 비판자들은 확실성, 진리성에 대한 과도한 추구 때문인지 늘 '과학 지식은 확실한 진리가 아니다'라는 점만을 강조하며, 과학 애호가들이 무언가를 크게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진리가 아니지... 게다가 현재 과학 교과서에 수록된 주장들이 후대에 의해 즉시 기각되지 않고 성공적으로 견디어 왔다는 점도 종종 통째로 무시되곤 한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예외가 있는 지식은 완전히 틀린 것이며 따라서 채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과학 애호가들이 개별 지식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어떤 세계관을 형성하고 그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을 논파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지식들이 속해야 할 층위를 혼동하는 경우가 적다고는 할 수 없으며, 그 해악도 상당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저질러지는 일 역시 잦다(물론 내 생각에 더 중요하게 비판되어야 하는 것은 자연주의의 오류이지만 말이다). 그러한 태도를 과학주의 내지는 과학만능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철학의 논의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근세의 사변적 회의주의 정도에 불과한 위와 같은 주장들은, 이러한 과학주의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가 지나치게 취약하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주의에 대한 적확한 비판을 생산하려면 실제 아카데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으면서, 과학 애호가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지식의 단순 나열을 통해 논증하는 것, 혹은 과학 지식을 이용하여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 모두 딱히 '과학적'이지 않으며(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 개별 과학 지식이 생산되고 비판되는 과정만이 과학적일 수 있는 것임이 과학 애호가들에게 적극적으로 인지되도록 해야 한다.

  과학 애호가들이 스스로의 작업을 '과학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서깊은 일이다. 그리고 과학주의의 세련되지 못한 비판자들은 이것을 비판하면서 스스로 과학을 비판한다고 여긴다. 그 과정에서 과학적 사고는 제거된다. 과학적인 것과, 과학을 둘러싼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을 둘러싼 담론에서 과학적 사고가 제거되는 이러한 현상은 웃기긴 하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학을 둘러싼 담론에서 과학적 사고를 확산시키는 것이 아닌, 지식들의 층위를 분별하는 비판철학적 사고를 확산시키는 것이 보다 제대로 설정된 목표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방법론은 전문화된 영역인 데다 100% 완벽한 매뉴얼화된 과학적 방법론이란 없으므로 모두가 과학적 방법론을 직접 획득하는 일은 이상적으로조차 불가능하지만, 과학적인 것과 과학을 둘러싼 것을 엄격히 구분하는 비판철학적 사고를 모두가 갖도록 하는 것은 이상적이라면 가능하다.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과학주의에 대해 철지난 사변적 회의주의 이상의 더 적확한 비판으로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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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2일 목요일

워마드의 가톨릭 성체훼손 사건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5분 넘게 스크롤한 것 같은데 거의 모든 게시글이 워마드의 성체훼손 관련 글이다. 무언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자주 화제가 되는 워마드라는 커뮤니티에 대한 논의와, 하필 이번에 모욕된 것이 종교적 상징이라는 사실에 대한 논의가 겹쳐져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개인적 관심 때문에 후자를 언급하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전자라고 주장해 볼 것이다.

  성체는 실제 육신이 아니지만 육신을 대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인데, 상징이 아니라 실제 육신이라고 주장하는 교인에게는 그렇게 믿는구나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믿음이 바로 상징작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기의 위반을 긍정하는 종류의 삶이 아닌, 금기를 실천하며 정신적 수양을 하는 종류의 삶이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한다. 굳이 그 상징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인들을 화나게 하는 것 외에는 큰 효과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상징이 허위이긴 하지만 굳이 그걸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라는 일각의 시혜적(?) 입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언어 분석을 잘 하기만 한다면, 상징 효과 자체는 허위가 아닌 분명한 사실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며 종교인을 비난하기 이전에,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부터 성찰해야 한다.

  나는 여러 사안에서 상징 효과를 의도적으로 걷어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따라서 대중이 웬만한 금기 위반에는 정신적으로 끄떡하지 않고 그 위반의 가능성을 덤덤하게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을 실질적으로 철폐하고자 함이 아니라, 상징인 것과 아닌 것을 인지적으로 잘 구분하기 위함이다. 상징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풍요로운 문화 현상과 그 향유자들을 마음 깊이 존중하되, 그 현상을 딱히 부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메타적인 고찰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이라는 것이 작동하는 한, 무신론자 및 세속주의자는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희망하고 추구할 수는 있을지언정, 현실적으로 누군가에게서 작동하는 상징작용을 하찮게 여기는 것 그 자체에서 자부심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상징에 영향을 덜 받는 자신의 성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해서 상징이라는 것의 강력함을 사유하고, 원한다면 상징작용을 비판하고 경계하는 쪽으로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상징 훼손에 대해 분노하는 교인들을 깔보는 데에서 그치는 반응은 그냥 성체 훼손 글의 게시자가 정확히 의도한 바에 다름 아니다.

  워마드에서 태극기를 폄하한 것이 논란이 되었을 당시엔, 나의 페친 풀에서는 이것이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다며 국가주의의 철폐를 주장하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사실 그것이 이번 건에 대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상충되기는 하지만, 그리고 나는 국가 상징물에 대한 온건한 수준의 애정은 괜찮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한 번 변호를 해 보자면, 현실적으로 종교적 상징에 투사되는 종교권력에 비해 국가 상징물에 투사되는 국가권력이 더 무섭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만약 해외의 종교국가든 혹은 국내의 소규모 커뮤니티든, 종교권력이 정말로 무섭게 작동하는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생겨서 게시자가 위협을 받았다면 나 역시 그 게시물에 대한 논평보다는 종교권력의 철폐를 우선적으로 주장했을 것 같다. 또한 이번 일에서도 혹시 앞으로 게시자의 신상이 밝혀져서 실질적인 위협을 받는다면 그 게시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주장할 것이다. 사실 가톨릭에 의한 위협보다는 과격한 반페미니즘 측에 의한 위협이 더 우려되기는 한다(...). 상징 작용은 풍요로운 문화적 자산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존중되어야 하지만, 실질적 권력이 부여되어 억압으로 작동한다면 가차없이 비판되어야 한다. 상징이 권력이 되면 그 집단은 제대로 된 공동체라기보다는 이념의 전시장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무언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자주 화제가 되어 온 워마드라는 커뮤니티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가장 먼저 상기해야 할 점은 워마드는 단일 대오를 이루는 단체가 아니며 불특정한 익명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구체적인 정치적 테이스트 등에 관계없이, 그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2010년대 초반부터 많은 어그로를 끈 일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인터넷 문화 그 자체인 디시인사이드를 정확하게 모방하고 있다. 그런 공간들에서는 혐오할 대상을 선택하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금기시하여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겟팅하여 희화화하는 놀이가 벌어진다. 그리고 대중들이 그것에 대해 금기를 위반했다며 엄격, 근엄,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을 짜릿하게 즐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여기에 마치 기자의 취재와 같은 방식으로 진지하게 반응하면 마찬가지로 조롱의 대상이 되어 '지는 거'다.

  워마드의 성체 훼손 역시 이러한 전형적인 ‘혐오 놀이’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가 정치적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밖에 답할 수 없다. 예컨대 코미디 프로그램이 정치적일 수도 아닐 수도 있고, 꿀잼일 수도 노잼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두 축에서 형성되는 4개의 케이스 중 꿀잼인 정치풍자 코미디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인정되는 집단에 한정하여) 정치적 유효성을 갖겠지만, 나머지 케이스는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그 정치성을 선언하는 것과, 실제 정치성이 인정되는 것은 별개 문제라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번 성체훼손 건의 경우에는 정치성을 선언했는지 여부는 매우 애매하다. 혐오 놀이의 특성상 논란이 될 가능성을 당연히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정치적 목적이라고 간주하기보다는 놀이로 간주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실적 유효성과 규범적 유효성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규범적으로 봤을 때 유효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정치적 논란을 낳는다면 그것은 정치성을 가진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별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뿐이다. 예컨대 종교 지도자의 성범죄 등을 나열하여, 혹은 낙태에 대한 구시대적 인식을 드러내는 발언들을 나열하여 종교에 대한 혐오를 자극했다면,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어떠한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번 성체 훼손 건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진지하게 종교에 대한 공격이 될 거라고 믿은 거라면 그냥 저주인형에 못을 박는 토테미즘적 행위일 뿐이고, 그렇지 않다면 짜릿한 혐오 놀이일 뿐이다.

  그러나 정치성을 선언했는지의 여부가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정치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다루어질 여지가 많다. 혐오를 바탕으로 논란을 야기한 사건이고, 이 혐오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난민 논란에서 보았듯, 혐오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강력하며, 관계의 섬세한 형성이 아닌 관계의 단절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반대의 스탠스에 놓인 사람들도 같은 대상을 혐오한다면 일시적으로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혐오가 아닌 연대의 논리라면 그럴 수 없다). 그러나 혐오의 타겟은 이렇듯 어디로든 쉽게 향할 수 있으므로, 혐오를 특정한 방향성을 갖도록 해서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그 의도대로 정밀하게 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인 타자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논의로서, 현대의 가장 큰 의제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나는 혐오 놀이에 기반을 둔 사회 운동이 장기적으로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설령 혐오감을 바탕으로 출발해 버렸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방향대로 잘 이끌기 위해서는 즉각적으로 양질의 이론을 공급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를 지난 2~3년간 우리는 반복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이번 건이 이렇게 큰 논란이 된 이유는 종교를 조롱한 것 자체보다는,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와 결부된 사회적 관심에 더하여 혐오에 기반을 둔 자극성까지 더해져 네티즌들과 기자들의 시선이 이중으로 많이 쏠려 있는 워마드라는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유'라는 단어의 의미를 규범의 영역보다는 사실의 영역에서 볼 때 더 좋은 결론이 나온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각종 반종교 커뮤니티 등에서 예수에 대한 이 정도 수위의 조롱이 과연 없었을까?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을 뿐이다. 고로 이 사건은 분명히 종교적 상징의 민감성과 결부되어 발생한 사건이기는 하고 이런 측면에서도 통찰해 볼 면이 있으나, 어차피 다른 것을 모욕해도 비슷하게 논란이 되어 왔으므로 ‘굳이’ 사건을 한 문장으로 규정하자면 종교적 상징의 민감성을 보여준다기보다는 혐오의 자극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누군가는 이상주의적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사적 개인들이 직접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고 폭력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혐오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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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9일 월요일

반감의 희롱적인 표출에 지혜롭게 대응하자: '보이루'와 관련하여

학교에서 남성 청소년들이 '보이루'라는 단어를 명백히 동료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맥락으로 쓰면서, 정작 문제삼으면 '보겸하이루일 뿐이야~'라며 기만하는 일들이 자주 있다고 한다. 단어 자체보다는, 어떤 의도로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느냐가 문제인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약올리고 수치감을 유발시키면서 곤란하게 하는 상황을 뜻하는 '놀리다(희롱하다)'라는 단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성적인 것이 결부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도 덜도 말고 성희롱이다.

인과관계를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만약에 혹시나 '보이루'를 그런 뜻으로 처음 해석한 것이 페미니즘 진영의 과잉된 우려였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정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보이루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그 사용자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정말로 벗고자 한다면 그런 희롱적 의미로 쓰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양하면 되지, 진짜로 용례를 만들어 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 동기가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이전의 남성중심적 분위기 때문이든, 아니면 페미니즘 등장 이후에 그것에 대해 생긴 반감 때문이든, 그러한 희롱을 실제로 즐기는 이상 이 둘은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반감을 덜 갖게 하는 것을 페미니즘에서 전략적으로 고민할 수도 있기는 하겠으나, 그 고민 때문에 위축되어 이러한 희롱 자체에 대응하는 동력이 약해질 필요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 진영이 언어를 통제하려고 함으로써 남학생들의 반감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최근에 많다. 그리고 위와 같은 희롱이 유행하는 것 역시 그러한 반감에 의한 것이라고 일각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들이 간과하는 심각한 문제점은, '페미니즘이 좀 더 잘 했다면' 이라는 가정은 정말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가정이라면 원리적으로는 못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페미니즘이 반감을 사는 것은 무엇인가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이고, 반감을 사는 것이 근본적 문제가 아니라,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이 근본적 문제다.

따라서 페미니즘적 실천, 즉 성폭력에 대한 비판 및 인식 환기 노력이, 페미니즘이 유발하는 반감에 대한 지적보다 당연히 우선해야 한다. 이 우선한다는 것은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양적으로 더 많아야 한다는 것도 (일단 여기서는) 아니다. 뭐랄까, 늘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과학주의, 무신론, 세속주의: '공적인 것'을 중심으로

무신론 및 세속주의에 있어서 도킨스처럼 과학을 과도하게 찬미하여 종교의 대안처럼 설정하는 형태,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처럼 나름대로 독창적인 타협안을 제시하는 형태 모두 끌리지 않는다. 전자는 과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유난스럽다고 느껴지고, 후자는 굳이 영적인 것을 향유하는(혹은 그러한 척하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입장에서 유난스럽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둘 모두 영적인 것을 중시하는 서구(특히 미국)적 전통에 의존하고 있으며, '무신론도 결국 종교성을 갖는 것 아니냐'는 종교인들의 물귀신 작전식 비난에 대단히 취약하고 때로는 그 비난을 별로 부당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자유주의를 주장한 아인 랜드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컬트처럼 신봉되는 희극적인 사태에서 이러한 미국적 정신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서구 무신론의 이러한 '유난스러운' 면모는 아마도 강력한 제도종교가 천 년 넘게 군림해 오면서 그들의 정신문화를 뿌리깊게 형성해 온 상황에서 그 안티테제를 급진적으로 제시하려다 보니 발생한 것일테다. 이러한 면모는 완화될 필요가 있다. 요즘은 다름아닌 동북아시아 특유의 세속주의가 정치적으로 훨씬 더 성숙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대로 긍정하자는 것은 아니고, 많은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 정도이다. 세속주의는 결국 사적인 견해가 공적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공적 이성'에 대한 감각을 강조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과학과 우호적인 관계를 끊지 않으면서도 컬트로 전락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가치 있는 의제를 다루는 집단이 정치적 미숙함으로 인해 공적으로 인정되는 주류가 아닌 사적 컬트가 되어 그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만은 막고 싶다. 이 목표는 비단 무신론 및 세속주의뿐 아니라 여성주의, 환경주의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속주의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하면서, 이 목표가 실현됨으로써 지켜지길 바라는 개별 가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이 문제를 몇 년 단위로 고민해 온 내 나름대로의 중간점검 결과이다. 지금까지 고민한 내용들을 써 놓은 글 조각들은 이것저것 있으나 하나의 체계적인 글로 엮기엔 역량이 부족하다 보니, 앞으로 꽤 긴 시간에 걸쳐 부족한 점은 공부도 해 가면서 창조과학 등에 대한 견해부터 '공적인 것'에 대한 견해까지 찬찬히 풀어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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