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이었던 2012년에 학교에서 해외 체험학습을 갔었는데, 어느 날은 당시 스탠포드에 포닥으로 계시던 정광훈 박사님의 강연을 다같이 듣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의 강연 주제는 뇌에서 지방질을 빼고 하이드로젤을 주입해서 신경망의 연결구조를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뇌를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너무나 신기했다. 그리고 당시 내가 느꼈던 신기함 이상으로 실제 학계에서는 더 깊은 임팩트가 있어, 그 연구는 CLARITY로 이름붙은 기술로서 이듬해에 네이쳐에 논문이 퍼블리시되었고 정광훈 박사님은 MIT에 교수로 임용되셨다.
클래리티 연구 당시 그분의 지도교수였던 Karl Deisseroth는 광유전학(optogenetics) 분야의 핵심 기여자 중 한 명으로 광유전학이라는 이름도 직접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클래리티를 위시한 하이드로젤 기술이 또 다른 주요 연구업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무튼 그때의 강연과 후일담(?)은, 기존에 언론 기사로만 막연하게 접하던 한국출신 과학자들의 대형 연구성과를 언론보도 이전에 좀더 생생하게 접한 첫 기억으로 강하게 남아 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오늘로부터 딱 한 달 전인 6월 중순쯤, 서울대 박사 출신으로 워싱턴대 포닥으로 계시는 백민경 박사님의 세미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알파고로 유명한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AlphaFold)와 함께 단백질 구조예측의 리딩 그룹인 Baker 그룹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계신데, 단백질 구조예측 분야 자체를 개괄한 뒤에, 베이커 그룹에서 어텐션을 이용해서 개발했고 sota에 근접한 구조예측 시스템인 로제타폴드(RoseTTAfold)를 꽤나 디테일하게 소개해 주셨었다.
그저께쯤 로제타폴드 논문이 사이언스에 게재되어 언론보도가 많이 나왔다 (기사 링크). 공교롭게도 딥마인드의 알파폴드 2 논문도 같은 날 네이쳐에 게재가 되었다. 알파폴드는 세부사항이 공개가 안되어 있는지라 로제타폴드도 처음에는 알파폴드를 reproduce해보자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알파폴드는 구조 자체에 대한 정확도가 높지만 로제타폴드는 단백질의 고차구조에 따른 기능적인 면을 예측하는데 강점이 있고 (저자분이 물리화학 베이스여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또한 누구나 뜯어볼 수 있도록 오픈을 추구해서 두 가지 모두 각각의 의의가 있다고 한다.
백민경 박사님 세미나 때 두 가지 질문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늘 그렇듯이, 날카롭고 구체적인 질문보다는 대략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해서 설명해주십사 하고 뭉뚱그린 질문밖에 못 했는데 질문 취지를 잘 이해해 주시고 우문현답을 해 주셨다.
첫번째로 질문드린 것은 단백질의 생물학적 기능에 있어서 전반적인 구조에 따른 기계적(?) 기능도 중요하겠지만 구체적인 아미노산 시퀀스에 따른 특이적인 기능이 중요한 경우도 많을텐데, 단백질 구조예측이 신약개발 등에서 가지는 잠재력이 정확히 어떤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었다.
답변해 주시기로는, 구조예측의 정확도를 표현한 피겨 등에서는 단백질 구조가 3차, 4차 구조들의 레벨에서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구조예측이라는 문제 자체는 그런 윤곽만을 맞히는게 아니라 가장 로우레벨인 개별 아미노산의 공간적인 위치까지 모두 맞히는 거라서, 그 답을 바탕으로 위에 쓴 특이적인 기능에 대한 단서까지 구체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한편, 나는 기계학습이 찾아내는 피쳐들과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찾은 전통적 피쳐들(과학이든, 미술 같은 것이든)이 얼마나 비슷한지 관심이 있는 편이다. 인간사에도 우연이 개입하고 기계학습에서 찾은 피쳐들도 꼭 필연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학문적 의미가 있는 궁금증이라고 보기는 사실 어렵지만, 그래도 좋은 흥미거리인 것 같다.
알파폴드, 로제타폴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단백질 구조예측 시스템은 end to end 예측, 즉 아미노산 서열만 보고 하이레벨 구조까지 맞히는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인지 1차~4차 구조의 개념이 머신을 디자인하고 테스트하는 연구자에게 inspiration은 줄 수 있을지언정 머신의 학습에 직접 '이용'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학습된 머신을 뜯어보면 그런 1차~4차 구조들과 비슷한 레벨구분이 보일 것인가?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없지만, 재미나게도, 실제로 그랬다고 하신다.
여하튼 한국 출신 유명 학자들의 톡을 듣는 것, 내지는 연구결과가 유명해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듯하다. 나도 주어진 토양에서 독립적인 연구자로서 파저티브한 브렠쓰루를 할 위치와 역량을 갖출수 있을까? 최전선에 서서 거기에 있는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면 어느정도 자연스럽게 그런 걸 습득하겠지만, 그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런것과는 별개로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쪽으로 평소에 생각의 습관을 끌고가는건 필요하겠다. 생각을 그저 발산적으로 풀어둔다고 되는 일은 아니고 굉장히 액티브한 지적, 사회적 탐색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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