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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9일 수요일

시계와 근대성: 잘게 나누고 바르게 견주기

"호텔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의 상뜨-안느(Sainte-Anne) 7번가에는 각종 보일러와 피스톤, 압력 장치 및 배관으로 가득한 공장 같은 곳이 있었다. 이 모습과 다소 어울리지 않게, 다른 한쪽 방에서는 폼 나게 차려입은 방문객들이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운 멋들어진 시계들을 둘러보고 있다. 공장 같은 곳 한가운데에는 소위 ‘마스터’ 시계라고 불리는 기계 장치가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시계에 흔한 톱니바퀴 외에도 여러 배관 및 압력 장치 등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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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시계에 동기화된 시계는 호텔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파리 시청을 비롯한 관공서, 가로등 시계, 기차역뿐만 아니라 가정집에 이르기까지 수천 개의 시계가 마스터 시계에 동기화되었다. 이를 위해 시내 곳곳으로 뻗어 나간 파이프 길이만 수십 킬로미터에 달했다. 대단한 공사였을 것 같지만, 수백 년 역사를 가진, 당시 총 길이 600 km의 파리 하수도 시스템을 통해 어렵지 않게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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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스팀펑크 그 자체다.ㄷㄷ 몇년 전 <물리학과 첨단기술>에 실린 기고문(https://webzine.kps.or.kr/?p=5_view&idx=63)의 일부인데, 글 전체도 재밌다. 시간을 잘게 나누어 측정하고 제어하는 기술력은 한 문명의 과학기술적 역량의 집약과도 같은데, 사람들의 라이프사이클과 의사소통의 해상도를 높이는 사회적 의의가 있을뿐만 아니라 또다른 기초과학적 발견들을 산출하는 포석이기도 한 것 같다.

사실 자연에 대한 정량적 탐구방법으로서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신뢰를 보내게 되는 이유 중에는, 인간의 언어와 직관으로는 포섭되기 힘든 극미세의 시공간적 눈금들을 구분해낼 수 있게끔 '일관적으로 다른' 현상들을 캡쳐해준다는 것도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피코초와 펨토초는 둘다 엄청나게 짧은 시간이지만 주로 관여하는 에너지 스케일이 다르고, 효과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들이 다르다. 개별 과학 현상들을 잘 알고 있을뿐만 아니라 이렇게 시공간적 스케일에 따라 올바르게 배열해 낼 수 있다면 무척 탁월한 교양을 갖춘 과학 애호가일 것이다.

글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저 시대에도 몇몇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미 전기를 이용한 시계 동기화도 있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나는 당시 파리의 저런 모습이 스팀펑크적이라며 미적으로 회고하고 있지만 그런식의 미적인 계기만으로 이런 시스템이 결정되지는 않았을 테고 기술적 격차 및 정치/행정적 요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듯.

기계식 시계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능적인 면뿐 아니라 광의의 예술적 오브젝트로서의 면모가 함께 있었겠지만 쿼츠시계나 여타 초정밀시계의 기술적 발전에 따라 후자의 면모 위주로만 계승되기 시작하는 역사를 살펴봐도 재밌을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예술적 면모가 여전히 철저하게 기술력에 의해 핵심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가장 근대적인 물체 중에 하나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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