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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2022년을 마무리하며: 기술매체에 대한 단상들 (방탈출, 아바타, 그리고 생성 AI)

어쩌다보니 이번 12월 31일엔 기술매체를 활용한 인터랙티브하거나, 실감나거나(immersive), 생성적인(generative) 문화 컨텐츠들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할 계기가 참 많았다.


먼저 하루의 시작부터 신촌에서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서 방탈출을 했다. 방탈출은 거의 이 친구들 만날 때에만 하는데, 처음 접했던 몇 년 전에 비해서도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단순 퍼즐 풀이부터 시작해서 여러 소품들을 이용한 키치하면서도 인터랙티브한 테크놀로지적 체험, 다양한 콘셉트로 예술적으로 연출된 시공간에 참여하기, 친구들과의 자연스러운 친목 다지기까지, 거의 놀이공원 어트랙션을 능가하는 종합적인 엔터테이닝한 경험을 도심 한가운데에서 제공해 주는 훌륭한 컨텐츠로 발전한 듯하다.


저녁에는 <아바타 2: 물의 길> 4DX를 관람했다. 3시간이 길긴 했는데 거의 5-6시간 분량의 체험을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밀도 높은 장면들이 실감나게 이어진 덕분에 몰입해서 단숨에 볼 수 있었다.


또한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탓인지 올 한 해에 세상에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조금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중 내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오는 일은 다름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 주는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었다. 내가 늘 꿈꾸고 있던,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뜰 거라고 생각하며 팔로우업하고 있던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의 조수로서의 생성 AI'가 내 막연한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전격 대중화된 것이다.

이런걸 보면서, 내가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주제,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반드시 잘 될 거라고 확신이 드는 주제에는 조금 더 과감하고 빠르게 직접 dive in 해 보아야 후회가 없이 흐름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한편으로는 세계 경기의 변동이, 대단히 도전적인 선택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그저 적당히 평화롭고 싶은 개인들의 일상과 진로 선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한 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도 일상과 건강과 인간관계를 유예해버리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할듯하다. 그러려면 시간을 더 밀도있게 써야 하고, 이를 위해 계획을 더 잘 지키고 더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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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7일 토요일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LNL)의 레이저 핵융합 성과 관련 포스팅 모음 (3건)

 1. 2022년 12월 13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LLNL 핵융합 중대발표가 한국시간으로 오는 새벽 12시쯤 (즉 두 시간쯤 후) 이라고 하는데 무척이나 기대된다. 내일 아침 출근이고 준비해야할 발표도 있지만 중계 보고 잠들어도 괜찮겠다.

미국 에너지부 홈페이지에서 중계가 된다고 한다. 에너지부 장관이 나올지 바이든 대통령이 나올지도 궁금하고, 어떤 내용의 발표일지도 무척 궁금하다. 기사들에서는 제법 구체적인 숫자들까지 제시하며 스포일러가 꽤 있었는데, 해당 내용 그대로여도 충분히 많은 의미가 있는 breakthrough일테고, 혹시 something more가 있는지도 기대해보게 된다.


다만 12년 전인 2010년에 NASA에서 우주생물학 관련 중대발표라며, 지구에서 발견한 비소 박테리아를 소개해서 대중들을 꽤 실망시킨 전례가 있기는 하다. 물론 충분히 의미는 있지만 아무튼 외계생물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기대를 일부러 낮추고 들어보려 한다 (생각보다 별 게 아니면 실망을 덜 해서 좋고, 생각보다 놀라운 거라면 그만큼 많이 놀라워서 좋고). 암튼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JWST) 이후로 금방이라면 금방,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에 세계인의 이목이 쏠릴 만한 과학 이벤트인 듯.


태양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핵융합은 꿈의 기술 취급받는데, 사실은 핵융합 그 자체는 이미 지상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혁신적인 발전 방식으로서의 실용화를 위해서는 안정성을 높여서 지속시간을 늘리는 것, 그리고 에너지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게끔 하는 게 남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다.


그런데 에너지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아야 한다는 건 뭔가 근본적인 제약을 돌파해야 한다는 느낌을 줘서, 내 기준에서 핵융합을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꿈의 기술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러 군데에서 듣기로는, 사실은 이게 근본적인 물리학적 장벽을 넘어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효율 점점 올리면 되는 느낌에 가깝다고 한다. 당연히 아예 없던 에너지를 만들순 없으니까, 저기서 말하는 투입량이라는 게 핵자간 에너지를 무시하고 우리가 직접 투입한 에너지만 따지는거겠지.

(물론 말이 그냥이지, 여기엔 엄청난 엔지니어링이 들어갈 것이다. 그치만 여전히 '원리적' 장벽은 아니라는 것)


그래도 뭔가 너무 단점이 없어 보이는 청정 발전 방식이다 보니, 어떤 이유로든 기술적으로 실현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회의론이 많은 게 사실이다. 만약 이번에 LLNL이 실제로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은 것을 미미하게라도 보여준 거라면, 그런 회의론이 어느정도 불식되고 더욱 적극적인 투자가 가능해질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과학기술은 순전한 진공속에서 그 실현 가능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변화하며 발전하는 명백한 가능세계의 사회적 구성물이다. 만약 그 중요성이 널리 인정되면서, 미미하게라도 실현의 가능성이 있다면 필요에 따라 투자해서 비용을 낮추고 실현가능한 범위 안에 들어오게 할수 있다.

이미 비가역적으로 발생하고있는 기후변화의 명백한 위협 앞에서, 핵융합 발전이 약간이라도 더 가시적인 범위에 들어온다면 작금의 인류에게 오랜만에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얘기가 될수 있을 듯...


물론 기술 독점 혹은 기술 유출의 문제, 국가별 불평등의 문제, 성장주의의 근본적 지속불가능성 문제 등등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얘기들이 산적해있겠으나... 이것은 현재와 같은 개념증명 시도의 단계에서는 다소 이른 얘기일 수 있다. 실현 가능한 발전방식으로서 가시적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쟁점들이 자연스럽게 구체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 개념과 사유의 고속도로를 미리 깔아두고 미리 합의해두는 사상적, 국제정치적 작업들 역시 너끈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정 과학기술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실현되어 가느냐에 따라 그러한 사유와 합의의 고속도로들이 꼭 그대로 사용되지는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그것을 건설해보는 경험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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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2년 12월 14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히어로 영화 <스파이더맨 2>의 빌런인 닥터 옥토퍼스의 핵융합로는 KSTAR 같은 자기장 속 플라즈마를 사용하지 않고 무슨 레이저를 쓰길래 상상의 산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핵융합 발전방식이었던 모양이다. 이번 LLNL의 발표가, 바로 이렇게 작은 연료 펠릿에 레이저를 쏜 방식이라고 한다.


핵융합의 에너지 효율과 관련된 여러가지 개념들이 언론에서 잘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어 쓰이고 있으므로 아침에 잠깐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관계를 정리해 봤는데, 아래의 각 조건들이 서로 모두 다른 것인 듯하다. 아마 위로 갈수록 더 어려운 조건인것 같다.


* 점화조건(self-sustaining, burning, fusion ignition): 무한대의 Q factor에 해당. 아주 좋은 조건으로, 핵융합의 경제성있는 실용화에 꼭 필수는 아니라고 함.

: 근데 DOE(미 에너지부) 공식 아티클에서는 fusion ignition을 달성했다고 써 있는데... reddit에서는 ignition 아니라는 설명도 있다. 아래의 Q=1.54 얘기를 보면 이번 연구 결과가 fusion ignition은 아닌 듯.


* 연소조건(Combustion): 경우별로 다르나, Q가 약 5~10보다 큰 것에 해당. 플라즈마가 cooling되는 속도와 관련이 있음. 실질적으로 경제성있는 실용화의 조건은 이쪽에 제일 가까운 듯.


* Net energy gain = Q factor가 1보다 큰것 = scientific breakeven

: 이번에 처음으로 달성했다는 게 이것인 듯. Q=1.54 정도라고 한다.


(기존의 다른 연구들에서 Q가 1보다 큰걸 달성 했다는걸 몇 개 볼수 있는데, 아마 그것들은 여기서 말하는 진짜(?) Q가 아니라, 에너지 투입량의 일부를 무시하거나 해서 extrapolated breakeven이라고 하는, 좀 다른 양인것 같다. 위키백과 fusion energy gain factor 문서에 있다.)

(별개: Lawson criterion = 위의 여러 figure of merit들, 혹은 핵융합반응 발생 자체의 조건 등을 플라즈마의 밀도, 온도, 압력과 같은 구체적인 물리적 조건과 연결지어 계산한 것)

원리를 모르다보니 말로만 찾아봐서 힘들다. 틀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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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22년 12월 17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내가 이해하기로는 연료에 가해진 레이저 에너지보다, 연료에서 핵융합에 의해 나온 에너지가 많다는 것이 이번 Q>1 실험의 의미이다.


일각의 지적대로 end to end로 모든 에너지투입을 고려하려면 레이저 발진 자체의 효율까지 생각해야 하는 게 당연히 맞고, 그러면 합산 효율은 꽤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실제 청정하고 효율적인 발전원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따지는것도 이쪽 기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치 당장 청정에너지가 실현될 것처럼 보도가 이뤄졌다면 그런것들은 명백히 과장된 보도이기는 할 테다.

그러나 연료펠릿을 중심으로 한 apparatus에만 스코프를 맞추고, 그 안에서 energy conversion이 어떤지 보는 작업 역시 핵융합 실현의 한 마일스톤이 되는 선결과제이다. 에너지 투입은 이루어졌다고 치고, 그 연료펠릿이라는 apparatus가 Q>1을 달성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직접 보여주는건 정말 중요한 이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Q>1을 실증함으로써 핵융합 발전의 실현이 한걸음 더 가시적으로 다가왔다는건 전혀 과장된 보도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효율을 정의하는것은 전혀 trivial한 이슈가 아니고, 정답이 없다. 숨겨진 에너지 출입을 정말로 모두 고려하려면 레이저 발진의 효율뿐 아니라, 생성물인 헬륨보다 반응물인 D+T의 핵력 퍼텐셜에너지가 높게끔 형성되어 마련되어 있는 것 그 자체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건 빅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모든 시스템은 여러가지 에너지 출입에 따른 복잡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걸 어느 단계에서 끊어서 '계'와 '주변'을 나누게 된다. 이렇게 나눠 둔 상황에서 둘 사이의 에너지 출입을 빠짐없이 추적해서 효율 식을 쓰기만 한다면, 어디서 끊었느냐에 상관없이 열역학 제 2법칙에 부합하는 올바른 효율 식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심지어 에너지 출입이랑 별 상관도 없는 수많은 다른 efficiency measure들도 유익할때가 많다. 예컨대 kWh당 사망자 수라던지...)


Make sense하는 발전원으로서의 가치를 따질때는, 지구에 이미 준비돼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출발했을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적절할 것이다. 다만 그런 재료들이 그냥 바로 쓸 수 있게 준비된 게 아니며 채굴하고 가공하고 운송해야 한다는 점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부품이나 각 연료 같은 걸 채굴하고 생산하는 체제가 총체적으로 연결돼 있는 만큼, 연구실을 벗어나 현실의 산업 망에 연결된 상황에서 어디서 끊어서 효율을 정의할지는 여전히 debate 해보아야할 점이다.


아무튼 이번 발표에 대해 언론 플레이이다, 혹은 심지어 사기극이다 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이는 과잉된 비판이라고 본다. 거대과학이 국가의 역량 과시와 관련이 깊고 군사 부문과도 종종 연관이 되어 있는 걸 대중들이 모르지 않으며, 그런것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지구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이게끔 다같이 비판적 관심을 가져야 하는 셈이다.

핵융합은 비록 아직 기초연구 단계이지만, 무슨 초대칭입자 찾는 것마냥 불확실한 가능성에 걸고 원리적인 장벽을 돌파해야 하는 게 아니라, 명백히 원리가 밝혀진 현상에 대해 효율을 높이면 되는 문제라서 (그렇다는 근거가 이번 실험에서 더욱 강화된 것이고), 연구결과가 축적되면 될수록 그 노하우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잘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예컨대 토카막 방식에서 제일 큰 문제가 플라즈마 안정성인데 기계학습을 이용해서 이걸 잘 제어해주는 연구들이 최근에 여러가지 나오고 있다. 핵분열과 달리 낮은 확률로 제어에 실패해도 큰일이 나지 않기 때문에 기계학습을 적용하기에 상당히 적절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냥은 잘 안 되는 걸 기계학습을 이용해서 쥐어 짜내는 식으로 최적화를 해야 한다면 뭔가 믿음이 안 갈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직관적으로 그러한 '쥐어 짜내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런 것 없이도 안정적으로 잘 되는 게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건 신재생에너지와 연결된 스마트 그리드 및 에너지 저장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미 너무 커져 버린 인류문명을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감당하기 위한 고도의 기술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물적/비생물적 행위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떠받쳐지고, 그런것이 없다면 하루 만에 무너지는 성격의 것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고출력 레이저를 이용해 연료펠릿을 집중적으로 가열하는건 Q>1이 가능하다는 개념증명에 가깝다고 보고, 실제 발전원으로서 의미있게 효율을 높이는 작업, 그리고 상시적, 지속적으로 운전하며 발전 가능한 반응로 개념에 좀더 가까운 설계는 여전히 토카막 쪽에서 나오지 않을까 한다. 이건 해당분야를 잘 모르는 관계로 순전한 뇌피셜이긴 하다.


위에서도 살짝 언급한 점이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청정 에너지가 나오기만 하면 문명의 규모가 무한히 성장할수 있다는 욕망 내지는 믿음은 개인적으로 비관론보다도 훨씬 두렵다. 아무리 효율을 쥐어 짜내더라도, 아무리 부작용을 줄이더라도 지구라는 물리적 한계에 의해서 지속적 성장이 근본적으로 제한되는 현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한계에 당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물론 꼭 필요하지만 아직 기초연구인 핵융합보다도 우리가 더욱 시급하고 명확하게 인식, 대응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 끝 -

2022년 12월 1일 목요일

중력현상의 시뮬레이터로서의 양자컴퓨터: AdS-CFT 대응의 이용

양자컴퓨터로 웜홀을 구현했다는 따끈따끈한 네이쳐 논문이 기사로 나왔다 (네이쳐 논문 링크, 국문기사(뉴시스) 하이퍼링크, 영문기사(quanta magazine) 하이퍼링크). 매우 네이쳐스러운 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주제들은 나도 교양수준으로만 알고 수식들은 거의 모르는데, 대략 이해한 내용을 써본다. '어려운 저차원 양자다체계 현상'과, '쉬운 고차원 중력현상'의 대응이라는 틀을 기억하면 읽기에 용이하다.


먼저 '양자전송'은 양자얽힘 현상에 의해 정보를 원격 전송하는 것으로, 양자암호(양자기반암호화, 양자내성암호)와 함께 양자통신이라는 큰 카테고리를 이루고 있다. 양자암호가 각국의 정부 및 산업계에서 상용화 관련 논의가 될정도인 것과 달리, 양자전송은 아직은 실험실 내의 기초과학 연구에 머무르고있다.


양자전송은 국소성 (대충 말해서, 물리적 현상은 공간상에서 정보가 잇따라 전달되면서 나타나며, 한번에 여기서 저기로 점프하진 않는다는 믿음) 을 위배한다. 이것이 직관적으로는 매우 이상하므로 해명이 필요한 역설이라고까지 생각되기도 했는데, 우리 학부 김석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상하긴 해도 국소성이 깨지는 게 그냥 사실이라고 한다. 그것이 양자세계의 비직관성이며 양자전송의 놀라운 점이다.


양자전송을 하려면 양자상태들 사이의 얽힘(entanglement)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양자컴퓨터는 여러 양자상태의 얽힌 상태를 유지하며 제어해서 한꺼번에 커다란 계산을 해내는 장치이므로 얽힘을 유지하는 노하우가 많이 들어가있다. 그렇기때문에 양자컴퓨터는 얽힘 실험을 하기에 최적의 시스템이다. 이번 논문에서도 9 큐비트짜리 양자컴퓨터 위에서 양자얽힘을 활용해서 실험을 했다.


이 논문도 기본적으로 양자전송을 실험적으로 구현한 여러 논문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 논문의 재밌는 점은 바로 홀로그래피 원리, 더 정확히는 AdS-CFT correspondence (반 드 지터 공간 - 등각 장론 대응성) 를 이용해서, 흔한(?) 양자통신을 넘어서 훨씬 멋있는 해석을 했다는 점이다.


AdS-CFT 대응성이란 홀로그래피 원리의 일종이다. 간단히 말해서 (1) 높은 차원 공간에서 정의되며 상호작용의 크기가 약한 이론 (주로 양자 중력이론의 후보인 끈 이론) 과, (2) 그 고차원공간의 '경계면'인 낮은차원공간에서 상호작용의 크기가 강한 이론 (주로 응집물질 계에 대한 양자 장론) 이 형식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고차원공간의 정보가 그 경계면인 저차원 공간에 오롯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홀로그램을 연상시켜서 그렇게 부른다.


이 대응을 이용하면, 우리가 사는 차원에서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다체계 (쉽게말해 양자컴퓨터 내지는 고체 및 반도체 같은 응집물질들) 의 풀기 어려운 문제를, 고차원에서의 끈 이론의 풀기 쉬운 문제로 대신해서 쉽게 풀 수 있다. 더 멋있게 말하면, 물질 속의 집단현상 문제를 우주 속 중력 문제로 대신해서 풀 수 있다. 이것이 홀로그래피의 강력함이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는 위와는 정반대 방향의 접근을 한다. 둘 사이에 그런 대응이 있다면, 실험으로 만들기 힘든 웜홀 같은 양자중력현상을, 실험으로 어느정도 구현가능한 저차원의 다체계현상으로 대신해서 실험할 수 있다는 재밌는 접근이다.


먼저 우주에 있(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웜홀에서 양자전송이 가능한것처럼, 실험실 속의 양자 다체계에서도 양자전송이 가능하며 이는 이미 꾸준히 실험으로 확인이 되고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양자정보의 전송이라는 점에서 통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별개의 물리현상이다. 전자는 양자중력 현상이고 후자는 중력과 상관이 없다.


이 논문에서는 양자컴퓨터의 설비로 sparsified SYK 모델이라는 양자다체계를 구현해서 실제로 양자전송을 했다. 그런데 이 모델은 흥미롭게도 AdS-CFT 대응에 의해, 웜홀에 대한 중력이론과 같은 방정식으로 기술이 된다. 이렇게 웜홀의 양자전송과 양자다체계에서의 양자전송이 (형식적으로) 연결되게된다.


따라서 양자컴퓨터를 양자중력현상에 대한 적절한 시뮬레이터로 쓸수 있다는 개념증명을 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실제로 웜홀에서 있어야 하는 여러가지 성질들이, 이 논문에서 연구한 시스템에서의 양자전송에서도 나타났다고 한다. 다만 이 (가상의) 웜홀은 아주아주 짧은 거리 사이의 웜홀이라고 한다.


마지막 질문은, 어떤 양자다체계랑 웜홀이 같은 이론으로 기술이 된다고 해서, 그 양자다체계 실험장치 속에 정말로 웜홀이 생긴 것인가? 이는 굳이 따지자면 따질 수 있는 과학철학적 문제인데, 보통은 상식적으로는 'No'라고 답할 것 같다. 실제로 논문에서도 웜홀을 실제로 만들었다 라고 무리하게 주장하기다는, 실험실 속에서 양자중력을 간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쭉 쓰고 나서 생각해 봐도 정말로 네이쳐스러운 논문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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