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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단월드 사이비 세력의 뇌과학분야 침투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승헌의 사이비 세력인 단월드가 뇌과학 분야에 지속적으로 침투해 온 심각한 문제를 다룬 좋은 글을 오랜만에 보았다 (아래 하재영 연구원님 글). 최근에 대통령 발언으로 인해 환단고기가 논란이 되면서, 유사역사학과 뇌과학 양쪽에 발을 뻗고 있는 사이비단체 단월드에 대해 지적해주신 듯하다.



물론 '뇌과학' 자체는 단월드의 브랜드라기보다는 뇌에 대한 과학 연구를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이기는 하다 (설마 국내에서 이 단어의 정립 자체에도 단월드의 영향이 있었을까? 거기까진 아니라고 믿고 싶다). 공유한 글의 글쓴이께서 오랫동안 단월드 사이비 세력의 핵심컨텐츠 역할을 하는 "뇌교육"을 "뇌 과학"으로 단순히 잘못 표기한 것일지, 아니면 단월드 사이비 세력이 제도권 뇌 관련 학계까지 침투해서 오랫동안 오염시켜 온 정황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쓰신 것일지는 잘 모르겠다.


단월드 사이비 세력이 실제 뇌 관련 학계에 침투한 정황은 매우 전방위적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것만 해도 다음과 같다.

(1) 이름도 거창한 '한국뇌과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운영함 (참고로 제대로 된 국가차원의 뇌과학 연구소는 '한국뇌연구원'임)

(2) 실제 제도권의 뇌 관련 유명 원로 과학자들(신희섭 교수, 조장희 박사 등)에게도 접촉해서 같이 책을 쓰거나 행사를 개최함

(3) 내가 알기로 일단은 제대로 된 뇌과학 내용을 다루는 대회인 '한국 뇌 캠프'(구 한국 뇌과학 올림피아드)를 서울대, 고려대 등과 함께 주최/주관하기도 함

이처럼 단월드는 '뇌교육'이라는 자신들만의 컨텐츠 안에서만 노는 것을 넘어, 어느새 위 예시들처럼 실제 뇌과학계와 접점을 만들고 후원을 하는 식으로 그 경계를 흐리고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예전에 놀림받던, 눈 감고 색깔 맞히기 등 뇌교육 마술의 차원을 넘어선 지 한참 되었다. 뇌과학 학계에서는 이를 제때에 막지 못했고 오히려 꽤 많은 유명 원로들이 일회적이든 지속적이든 이들 세력과 협력하기도 했다. 슬픈 일이다.

일단 과학에 관심 있는 중고교생들이 참여하는 행사인 한국 뇌 캠프에서 단월드와 뇌교육을 반드시 퇴출시켜아 한다. 한국인지과학회 및 각 대학의 주최 측도 뇌교육 이름이 붙은 단월드 쪽 주관기관이 이상한 곳임을 모르지는 않을텐데 모종의 이유로 유지되고 있는 듯해서,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쉽지 않은 싸움이 예상되기는 한다.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

2025년 12월 14일 일요일

대통령 발언으로 공적 무대에 올라와 버린 유사역사학

하필 이재명 대통령이 "환빠" 질문을 한 상대방이 그 뉴라이트 행보에 논란이 있는 박지향 교수라서 논의가 꼬인 점이 있다. 야당 정치인들까지 이재명 비판에 가세하니 정부여당 측 지지자들은 진영논리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재명 대통령 발언을 무리하게 옹호하고, 심지어 식민사관 타도와 민족사학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유사역사학 자체에 힘을 실어주려는 듯한 흐름까지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 발언의 진의에 논란이 있으나, 일단 말 그대로 읽는다면 유사역사학을 주류 사학과 동등한 링 위에 올려 주는 발언인 것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과거에도 이덕일의 책을 읽었다고 올리기도 하고 '식민사관'도 종종 언급하는 등 유사역사학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정말로 중립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경청하려고 물어본 것일 수도 있고, 그러면 조금은 더 낫지만, 사실 유사역사학과 역사학 사이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것 자체가 유사역사학에 우호적인 것이므로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어렵다.

그 근거로, 유사역사학에 친화적인 인터넷매체들은 이재명 대통령 발언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 논평을 하면서 아래와 같이 굉장히 기대감 섞인 글들을 게재했다. 트래픽을 늘려 줄 것 같아서 클릭하지는 않고 검색창에서만 봤다.

"이재명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곧 기대가 된다. 이제는 '환빠'라는 조롱의 언어가 아니라, 공정한 검증과 ..." (환단고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대통령 - 한문화타임즈)
"이재명 대통령의 입에서 '환단고기'와 '환빠'라는 단어가 직접 거론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역대 그 어떤 대통령도 공식 ..." (사상 최초로 '환단고기'를 언급한 대통령, 역사 광복의 서막인가 - 한문화타임즈)
참으로 아찔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렇게 장차관, 고위공직자, 일반 시민 등이 함께하는 간담회를 자주 연출하는 편인데, 여태껏 그 상황들에서 대체로는 디테일한 상황 파악을 잘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런 행사들에서 종종 굳이 안해도 될 다소 가벼운 농담이나 튀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기도 하는데, 본인 스타일인 것 같지만 그것들 중 일부는 논란을 자초하기도 한다. 최근 1-2주 사이에 그런 게 유독 크게 보도되어 이런저런 논쟁을 낳은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북한 억류자 처음 들어본다, 언어순화 등), 이번 일도 그 중 하나라고 보아야겠다.

이덕일 류의 유사역사학은 단순히 그들만의 장사를 넘어, 중앙 정계에 있는 정치인들과 그 지지세력에게 상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학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기 위해 남용되는 '식민사학', '강단사학'이라는 단어가 그들 주변에서는 이미 너무나 당연하게 자리잡아 있을 정도이다. 주류 사학계에서 유사역사학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오래 노력해온 분들의 목소리가 효과적으로 정치계에도 전달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이들의 영향은 중앙 정계뿐 아니라 미시적, 지역사적인 부분에서도 상당히 마음 아픈 형태로 일어난다. 소외 의식과 민족 의식을 자극해서 주류 사학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하고, 이것이 실제 역사학적 작업을 왜곡하거나 좌초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공교롭게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전라도 천년사>, <김해시사> 출간을 둘러싼 사건들도 그 예시이다. 이는 조롱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세밀한 실천적 이성을 필요로 하는 논쟁인 것 같아서 꼭 팔로업하고 싶은데, 지난번에도 이에 대해 공부해 보겠다고 페북에 썼지만 아직은 문헌들만 찾아봐 둔 상태다.

이들뿐 아니라 맨 아래 공유한 글(기경량 교수님) 말미의 추천서적도, 누가 유사역사학 얘기를 하면 나도 몇 마디 얹을 수 있도록 한번 읽어 봐야겠다.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


2025년 10월 13일 월요일

주류 학계에 대한 반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강단사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내가 알기로는 조선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역사학자와 학도들은 역사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은 부분까지 입체적으로 발굴해내려고 노력하면서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높은 가치와 약간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체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캡처한 글(아래 이미지)의 후반부에서는, 실록이라는 훌륭한 기록물이 있는데 (아마도 매체나 세간에서) 세종대왕과 이순신 등 유명 인물만 조명받는다며 역사학계를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비난이 심하다 아니다를 넘어서 그 구도 자체가 매우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그 실록 번역과 전산화는 그러면 누가했을까?



실록 번역은 다 되었지만 (물론 더 쉬운 번역 등 접근성 개선은 필요할수 있다), 승정원일기라던가 다른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물들, 중요한 역사인물들의 사상을 담은 서적들의 번역이 아직 부족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역사학자들이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관심은 너무 많은데 역사학을 연구할 사람, 그중에서도 연구에 그치지 않고 번역까지 할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강단사학(?)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발산하기보다는 학계에서 어떤 논의와 협동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나도 역사는 정말 잘 모르는 입장이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상술했듯이 '역사학계가 세종과 이순신만을 조명한다'는 식의 구도가 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기존에 조명되지 않은 인물 및 사건을 다루거나, 이미 조명된 것이라면 기존의 토대를 계승하면서도 재구축하면서 새로운 측면을 다루어야 논문 감이 되지 않겠나.

꼭 이 글에 대한 얘기는 아닌데, 이 글과 덧글들이 나한테 상기시킨 어떤 다른 주제들, 다른 글들에 대한 얘기도 해보겠다. 문제가 있는 이야기들로 싸움을 먼저 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학계의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것은 왜 늘 강단사학 내지는 식민사관이라는 납작한 표현으로 단순화되고 사악한 기득권이라고 공격당해야 하나? 어디까지 착하게 말해야 하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착하게 말하는 과정에서 마치 동등한 두 입장인 것처럼 오히려 링 위에 올려주는 꼴이 되는 딜레마적 현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최근에 과학커뮤니케이션 논쟁에서도 약간 시사되는, 과학기술 쪽에서도 어느정도 동감이 되는 이러한 억울함은 궁극적으로는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딱히 도움이 안되고 학계가 더 노력해서, 더 착하고 재미있게 말함으로써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학계 구성원들에게 메타적인 억울함을 준다.
(애초에 학계라는 게 어느정도의 통용되는 합의는 있지만 대립도 존재하고, 따라서 한통속인 집단도 아니므로 위에서는 안전하게 '학계의 누군가'라고 썼다. 학계를 동질적인 집단으로 간주하거나 이상화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역사라는 게 워낙 민감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많은 주제이다보니, 그런 반감을 필요이상으로 조장하면서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취하거나 심하게는 유사역사학으로 이끌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것도 사실이고, 정치권에도 상당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도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오로지 학계의 문제점에서 파생된 부산물 내지는 현상으로만 보고 간접적 해결만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과도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창조과학 유행의 일차적 책임을 진화론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하지 않은 것에 돌리는 게 맞겠는가 아니면 꽤 많은 기독교 단체들에서 그런 걸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겠는가?

공유한 글에서 언급하는 식민사관이라는 것의 실체(물론 이분이 생각하는 식민사관이라는 것의 외연은 지나치게 넓고 타겟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위와 같은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된 근거를 바탕으로 과도한 반감을 적극 조성하는 것은 비판하되, 그런 반감이 호응을 얻는 현상은 면밀하게 분석을 하고 관심을 가져서 보다 세심하고 간접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김해시사》나 《전라도 천년사》에 대해서도 굉장히 씁쓸한 이야기들이 있는 모양인데, 나도 이 두 개의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던 것인지 기회가 되면 논쟁을 팔로업하며 이해해 보고자 한다.

사실 이 정도로 비난 일변도인 짧은 글, 그것도 딱 후반부 2개 문단 정도를 보고 이렇게 굳이 길게 코멘트를 적는 것이 오히려 위에 썼듯이 '링 위에 올려 주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글 쓴다고 해서 딱히 링 위에 올려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글에 좋아요가 너무나 많고, 이 분 타임라인의 다른 글들을 보니 어쩌다가 나온 말만은 아닌 것 같아서 몇 마디 적는다. 그리고 위에 썼듯이, 딱 이 글만을 보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 글이 내게 트리거시킨 여러 다른 글에 대한 기억들을 상기하며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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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일 일요일

극우세력의 전방위적 역사수정전쟁을 예고하는 리박스쿨 논란

선 레이스의 최후반은 내란 종식과 나라의 미래에 대한 정책토론은커녕, 이준석과 유시민의 여성 발언 논란 그리고 리박스쿨 늘봄학교 의혹이 장식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미래와 당면과제에 대해 길게 글을 써 보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그냥 올리지 않으려 한다.

리박스쿨 논란은 정말 심각한듯하다. 2012년 대선 직전의 악몽 같은 상황이 생각난다. 정확한 타임라인이나 관계는 많이 잊어버렸지만, 그때도 오륜교회 윤정훈 부목사의 십자군알바단이 덧글작업 한걸로 논란이 되다가, 국정원 직원 셀프감금과 겹치면서 국정원, 국방부, 경찰청의 대선개입으로 논란이 확대됐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 김용판 당시 서울경찰청장이 대선 3일 전에 성급하게 무혐의로 발표했으나 나중에 결국 다 사실로, 그것도 처음 의혹보다 훨씬 더 대대적으로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홍역을 치러 놓고 ,박근혜 정부 때도 국정원과 청와대의 관변단체 동원을 통한 정치개입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확대되었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일선 학교 방과후학교 같은 데에 단월드 등의 유사과학/사이비단체가 들어가서 자기네 사상 퍼뜨리고 이런 일들은 원래도 종종 있어온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늘봄학교 자체가 이걸 위해 만든 정책이라고까지는 일단은 의심을 안 하려고 한다.

그러나 리박스쿨의 극우 역사교육이 늘봄학교에 실제로 침투해서 프로그램으로 운영이 된 것, 그 사람들이 정치 덧글작업에도 동원된 것, 그리고 그 리박스쿨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윤석열정부에서 아주 핵심적인 인사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현직으로 직함을 받았던 것까지는 분명히 사실로 보인다.


책임 소재 애매하게시리 분명히 정부여당 인사들이랑 연관이 없지는 않은 이런 반 관변단체(?)들이 나와서 선거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2010년대부터 보수세력이 버리지 못하는 아주 안 좋은 습관이다. 선관위 디도스, 국정원 사이버사 대선개입, 어버이연합 태극기집회 국정원 지원 등등... 이번에도 MB, 박근혜 때처럼 배후에 정보기관이 있을지는 조심스럽긴 하나, 일단 가능성을 열어는 두고 합리적인 선에서 추적을 해야 할 테다.

전광훈과 손현보다 전국 곳곳에 운영하는 미인가 대안학교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공교육 영역에 대놓고 침투하려는 것도 정말 잘 감시해서 막아야 할 것 같다. 전에도 썼듯이, 공동체가 갈수록 붕괴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어이없게도 제일 끈끈하고 제일 강한 공동체로 부상한 것이 다름이 아니라 극우교회이고, 이에 대응하기엔 사람들은 너무 무기력하거나 관심이 적다. 잘못하면 극우의 울타리 안에서 청소년 전사들이 양성되고 재생산되는 구조가 정착하면서 나라가 미국처럼 뒤틀린 복음화(?)가 되는건 순식간이라고 본다.


리박스쿨에서 극우개신교의 역할이 아직 확실하진 않으나, 김문수와 전광훈이 한창 행보를 함께하던 시절의 자료들을 보면 기독교가 꽤나 중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극우개신교이건 아니건, 정권 수뇌부가 정확히 인지했건 아니건, 이 사건 자체가 앞으로 한국사회에 극우세력이 일으킬 전방위적인 역사수정전쟁, 문화전쟁을 아주 선명하게 예고하고 있으므로, 당장 대선국면에서의 잘잘못은 물론이거니와 그 연원까지 끈질기게 파고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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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6일 목요일

임명묵 작가 기고문을 읽고: 극우의 세대화합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임명묵 작가와는 학부를 다닌 시기가 거의 겹치고, 스터디도 한두 차례 같이 하기는 했었다. 이미 20대의 나이에 책도 수 권 쓰고 여러 지면에 기고도 하며 이름을 알려서 내가 상당히 부러워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지만, 아마 그 분은 내 존재 정도만 아실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고된 탄핵 반대 집회 체험기(링크)는 평소보다 큰 논쟁을 촉발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한 마디씩 이야기를 얹을 수 있게 여러 가지 사유의 결을 풍부하게 깔아 놓았다는 점에서 그 글은 무척 성공적이다. 그러나 현상에 동조하는 게 아니라 진단할 뿐이라는, 우호적 독해에 근거한 팬들의 옹호가 어쨌거나 필요해졌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글이다. 글의 의도를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독해가 대립하는 셈인데,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났는가? 한 가지 이유는 언론 기고문이라는 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논쟁을 촉발한 글의 내용과 행간을 찬찬히 보면, 동조보다 진단에 더 가까운 면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언론기고의 경우 내용 및 행간뿐만 아니라 글이 게재되는 매체, 글이 소비될것으로 기대되는 방식, 글이 주로 소구하는 대상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독해되어야 하고 글쓴이도 이를 고려해야 한다.


관련된 또 다른 요인은 스펙타클에 근거한 글쓰기다. 내가 임 작가의 글에 대해 예전부터 느낀 인상은, 국내 및 국제 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정치적 평가를 다소간에 비우는 대신에, 그 대신 거기서 연출되는 상징적 장면들 자체를 위주로 심미적(?)으로 접근해서 어떤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고자 하는 특유의 스타일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대신에 한발 물러나서 그 스펙타클 자체를 감상하며 관조하듯이 평하게 되고, 자연히 서로 다른 여러 독해가 생겨날 공간이 늘어나게된다.

문화적 코드에 집중해서 '스펙타클한 장면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정치, 시사 등에 관심이 있는 페이스북 유저들에게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상당히 익숙한 글쓰기 방식이고, 나도 종종 즐기는 편이다 (특히, 웅장한 대륙적 아우라를 자랑하는 장면들을 다룰 때에는 유독 더 그러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쓰인 글은 언론 지면에 바로 나가기에는 좀 적절하지가 않을 수 있다.

스펙타클에 대한 관조적 향유와 동조적 열광은 언론 지면에서 구별되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스펙타클의 힘이고 언론지면의 힘이다. 그래서 '미적'으로 쓰인 글이더라도 정치 고관심층들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독해하게 된다. 그 결과는 덧글창에서 드러난다.


동조가 아닌 진단일 뿐이라고 하면, 그 진단이 과연 적절한지도 물을 차례다.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 이번 글에서는 진단 자체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현장에서 노년층과 청년층의 세대간 화합이 발생하는 장면은 기독교 보수 세력의 역할을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는 그 얘기가 아예 없어서 의아했다. 현장에 갔을 때 정말로 기독교적 코드가 느껴지지 않았는지는 나야 알 수 없지만... 각종 매체 보도와 뉴미디어 중계를 보면, 기독교 기반의 집회참가자들이 2030도 탄핵반대로 돌아섰다면서, 청년들을 기특해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언급해 줘야 한다고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정서에 편승하여, 청년구독자 위주 채널인 배인규는 가급적 선남선녀들(아마 외모 얘기일 것이다)을 발언대에 올려보내야 해서 고생했다고 하기도 했다. 내가 거의 6-7년 전부터 강조하며 우려했던, 국가주의 기독보수와 안티페미 청년보수의 접합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셈이다 (링크, 2018.11.26).

그런 강박에도 불구하고, 집회 안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 화합과, 그 안에서 청년을 챙겨 주어야 한다는 분위기 자체는 상당부분 '진짜'로 인간적인 화합일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화합이 꼭 정치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갈등과 불화를 금기시하고 인간미있는 연대의 힘으로 눙치며 외부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일을 화합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화합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반대하겠다. 상대방이 일으키는 불화에 대해서는 뿔달린 도깨비 취급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사회에 더한 불화를 일으키고 있지 않나. 증오와 음모론에 근거한 화합은 동료시민을 적대시하게 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면 나도 산업화 세대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세대화합 및 전통적 가족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뿔달린 좌파가 되나?

지금 국면에서 내가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계엄 사태의 중대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제대로 선긋기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게, 순순히 정권을 헌납하라는 뜻이 아니다. '탈윤'을 확실히 하고 철저하게 절치부심만 한다면 보수가 재집권해도 원칙적으로 아무 상관 없다 (계엄 사태에 대해 확실히 선긋기를 해준다는 전제 하에, 어디까지나 계엄에 대한 책임 여부에 한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당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계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많이들 이야기는 하는데, 그게 정말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한 인식과 표현, 불법적으로 행사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경계심이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면서 계엄 할 만 했다는 식의 얘기가 계속 섞여들어가고 있다. 여당 주요 정치인들의 행보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중진의원들도 계속 대통령 접견을 하고, 당협위원장들은 단체로 가서 구치소 앞에서 아예 공개적으로 설 세배 인사까지 했다. 대통령 측이 자기가 다 안고 가겠다는 식으로 하지 않고 계엄을 옹호하는 세력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여당의 이러한 행보 하나하나가 그러한 극렬 지지층에게 힘을 실어준다는걸 어떻게 모른 체 할 수가 있겠나.

언론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 조선일보는 계엄사태에 대해 선긋기를 철저하게 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를 강조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보도들을 쏟아내면서 사법 불신을 과도하게 조장하고있다. 지금은 아직 조기대선 국면이 아니고 파면이 되냐 마냐의 국면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라면 정치적인 주제, 그중에서도 탄핵반대 집회를 주제로 하는 글은 이 시점에서는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서로 의견이 다를지라도 공통점을 넓혀나가는 대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는 군을 불법적으로 동원한 계엄사태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비판적인 인식을 유지한 채로, '계몽령' 따위의 언설에 대해서는 확실히 선긋기가 이뤄진 판 안에서 이뤄져야한다. 많은 우파 스피커들이 명시적으로는 계엄에 확고히 반대한다고 얘기하며 아마 실제 생각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부수적, 지엽적 논거들이 계엄 옹호와 탄핵반대 움직임에 실질적으로 연료를 공급해주고 있는 점도 보아야 한다.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공수처의 입법결함 지적, 야당의 패악질이 계엄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 등의 모든 부수적인 것들은 탄핵 인용 이후의 얘기다. 여기서 이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일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윤석열이라는 개인의 아주 복잡하고 특이한 성정에 남들보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추적해 온 입장에서,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이번 사태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면 역시 있다. 다양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고 요리 해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권위적인 보스 행세를 하며 아랫사람들에게 조인트를 그렇게 심하게 깔수 있는가. 이는 의대증원, 수능킬러문제, R&D삭감, 홍범도 흉상 등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윤석열 정부 특유의 뜬금없고 자폭적인 졸속정책추진의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링크, 2023.08.30). 또한 노무현을 좋아하고 김기춘이 부끄럽다는 사람이 어떻게 야당이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극우인사들을 기관장에 임명해서 대립을 격화하고 기관을 망쳐놓는 행위를 반복할수가 있는가.

윤석열은 자신의 직을 걸면서까지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다소 무리해서라도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관철하는,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특유의 방식으로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이를 통해 인지도를 쌓았다 (링크, 2021.03.05). 이러한 태도가 대부분은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에게 한번씩은) 원칙주의적 면모로 드러났지만, 때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절제되지 않은 행보로 나타났으며, 비상계엄 사태에서는 후자의 면모가 정점을 찍었다. 책임있는 민주정치를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는 이러한 도박적 태도가 얼마나 안맞았는가.

이번 비상계엄 사태는 거시적인 정치 여건 그 자체보다도 대통령 개인의 아주 이례적인 성정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일어난 사건으로, 국민들이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윤석열의 인간적 면모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역시, 그가 12월 3일에 저지른 비상계엄사태,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도 극우개신교에 소구하며 헌정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것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물은 이후의 얘기다. 여기서도 이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일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10년 안에 한국이 기독교극우 국가가 될 위험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세속의 논리와 별개로 돌아가는 신념체계를 신봉하면서도 그 논리가 세속에 관철되기를 바라는 소수의 음모론자들을 굳이 언급해서 키워줄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겠지만, 나는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본다. 2020년경 황교안대표 체제의 미래통합당 시기를 거치면서 보수정당 적극 지지층의 질이 너무 안좋아졌다. 극우목사 유튜브들의 수익모델이 확립되면서 세력이 커졌고, 급기야는 엄청난 발화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그의 변호인단이 그런 음모론적 생각들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아 반헌법적 계엄사태를 일으켜 버렸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까지 재생산하면서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면에 이를 견제해야 할 사람들은 거대야당의 지리멸렬한 일극체제 하에서 대체로 무기력하거나 분열되어있고, 이를 타겟한 양비론의 힘도 너무 크다.

요즘 보면 어이없게도 제일 끈끈한 공동체가 바로 극우교회다. 마음을 기댈 공동체가 없는 사람들이 갈수록 분열하는 것과 대조된다. 보수교회에 위임된 복지 및 커뮤니티기능을 재정확장을 통해 국가와 지자체가 회수해서 집행해야한다. 그리고 극우목사는 처벌하고 돈줄을 끊어야한다. 퍼블릭한 성격을 갖는 공동체를 복원해서 극단주의에 대응할 역량을 키워야한다.

단지 일부 소외된 노년층만의 일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들의 지분이 크다). 위에서 말했듯이 대통령 및 변호인단과 보수교회가 논거를 공유하며 서로 지지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형 보수교회들은 심지어 미인가 대안학교까지 다수 운영하면서 성전을 치를 전사들을 양성하고 후속세대를 재생산하고있다. 이걸 쉬쉬하고 무시할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하고 적극적으로 경계해야한다. 이쪽에서 나오는 발언들이 언뜻 볼때 종교적 색채가 지워진 채로 유통되더라도, 그 생산기제 및 행간으로부터 종교적 동기를 읽어내어서 적확하게 추적, 비판할줄 아는 적극적 세속주의자들의 실천과 표명이 필요하다.

보수기독교인들은 대한민국 헌법이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제정되었으며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을 자신들끼리 공공연하게 얘기한다 (윤석열 대통령 “성경이 헌법 근간” 주장에 법학자들 “반헌법적 발언” (법보신문 김민아 기자)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044). 이런 날조된 역사가 미래세대의 정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으며, 그게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더 널리 알려져야한다.

2030 청년이 기특하다는 말은 많은데 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청년에서는 중국에 선동당한 청년, 탄핵에 반대하는 청년, 계엄을 통한 윤대통령의 뜻을 깨닫지 못한 청년들 등이 배제되어있다. 이런 종류의 기특함에 의거한 화합은 공동체를 복원하고 세상을 구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이걸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 걱정이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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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일 수요일

매끄러운 설명을 경계하고 입체성을 직시하자 - 전청조 사기 사건을 보며 (2)

매끄러운 설명의 요구를 경계하고 사태의 입체성을 직시해야 한다.


최근 회자되는 사기 사건은 결국 전청조라는 사람이 남현희 감독과 그 가족들을 작정하고 헤집어 놓으면서 사기를 친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가족들끼리, 혹은 가족을 넘어 펜싱업계 사람들끼리 서로간에 이간질에 의한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고 이런 것은 마이너 디테일이라고 생각한다. 잘못이 전혀 없다는게 아니지만, 판을 짠 것에 말려들어서 그렇게 된 거면 당연히 제일원인은 전청조한테 있는 것 아닌가.

판단력이 흐려졌고, 계속 의심까지 했음에도 빠져나갈 계기와 용기도 부족했고, 그러면서 주변에 피해를 끼쳤고 이런 것들은 잘잘못을 가려야겠지만, 사기사건이라는 본질을 흐려 놓는 가해자의 몇마디 언사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연락도 통제하고 주변 환경까지 통제해 가며 작정하고 달려든 사기꾼한테 말려든 사람의 심리는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의심되긴 했다고 하면서도 결혼이라는 엄청 큰 선택까지 한 것이 밖에서 보면 너무 이해가 안될거고 나 역시도 그렇지만, 의심을 불식시키는 근거를 계속 제공함과 동시에 물질적 유혹과 인간적으로 조종, 통제하는 능력을 발휘하면 그 안에서 의아함을 갖더라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이다.


전문가들이 흔히 언급하는 사기의 메커니즘 중에서는, 어설프더라도 속임수 내용을 '믿고 싶어서', 즉 원하는 걸 제공해줘서 믿게 된다는 것을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진의도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 믿고 싶어서 믿게 된다는게, "거짓말인게 보이지만 나한테 이익이 되니까 믿어야지"라는 명시적인 악한 판단을 한다는게 아니지 않을까? 점점 의심이 안 발휘되게 되면서, 자기자신의 도식이 암시적으로 수정되면서 말려들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애초에 사태의 명백한 제일원인인, 작정하고 달려든 가해자가 있는 사기 사건인 이상 위 두 가지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한지, 혹은 중요한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그것을 애초에 처음에 안 당했거나, 아니면 중간에라도 용기를 발휘해서 빠져나갔거나 하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암튼 남현희감독한테는 무언가 이상하다, 깔끔하게 설명이 안된다며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전청조가 하는 말들이 훨씬 깔끔하고 명쾌하게 느껴진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직업적 사기꾼의 말은 단 한마디도 귀를 기울여 들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기꾼 본인이 상황을 통제하면서 사기를 친 입장이니까 당연히 설명이 더 매끄러운 것 아니겠는가.

복잡하고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인, 본인도 잘못이 없지는 않은 어떤 사람의 여러 입체적인 면모에 대해 꼭 '합리적 판단'을 하려 하지 말고 사태 자체로 바라봐야 할 때가 있다. 단순명쾌하고 매끄러운 설명만을 원하다 보면 오히려 사기에 취약해진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피해자 찾는 것의 거울쌍인 것 같다.

(뱀발로, 이전 글에서는 사람이란 게 피차 별거 없는걸 너무 심오하고 대단하게 생각할 때에 사기에 취약해진다고 했는데, 이 글과 얼핏 반대되어 보이지만 모순되지 않는 듯. 단순화/합리화된 이해와, 입체적인 판단중지를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오갈 줄 아는 것이 메타적인 합리성인 것 같음)


전청조는 남현희 감독을 위해서 돈을 쓴 것이고 자신은 얻은 게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애초에 왜 재벌3세를 사칭하고, 임신 여부도 속이는 등 온갖 속임수를 써서 접근한 것인가? 명백히 거짓말과 설정놀음으로 판을 깔고 자기 자신한테 돈이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어서 그 설정을 현실로 만들려고 한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남 감독을 위한 것이 되며 사람들도 그런 주장에 휘둘리는가.

남현희 감독을 위한 것이었다거나, 물질적인 선물을 남현희 감독도 거절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말은 표면적으로 '깔끔한 설명'은 될수 있을지언정, 전청조라는 가해자 본인이 애초에 판을 깔아서 주변 환경까지 통째로 바꾸어 놓고 조종, 통제하고 한 것은 쏙 빼놓으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한 아전인수격 발언들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고 처벌받겠다는 등의 말들은, 사기행위가 이미 들통난 상황에서 누구나 그냥 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언설들이고 말이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정이나 이익관계를 통해 심리적으로, 일적으로 얽히다 보면 공동 책임이 생기는 부분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생기게 되는 것인데, 바로 그런 지점을 부각해서 '어쨌든 당신도 다 오케이하지 않았나' 하는 것은 전형적인 가해자의 책임회피 수법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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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심리 해킹을 경계하라 - 전청조 사기 사건을 보며 (1)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대인관계에서 감정 소모와는 별개로 정신세계의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건드려질 일은 잘 없고, 설령 건드리더라도 거기에는 피차 아주 대단하거나 특별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불완전하고 얕은 면모와, 심연같고 신비로운 면모를 다들 피차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테다.

근데 만약에 그리 친밀하지 않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그런 내밀한 부분이 사정없이 건드려지는 느낌이 든다면, 혹은 지나치게 고양되거나 푹 빠지는 기분이 든다면 (상대방이 의도했든 아니든) 사실은 상당히 무례한 일을 당하고 있는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대화를 통해 뭔가 인간에 대해 기존과 다른 시각, 특별한 시각을 체험했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런걸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잘 디자인된 허풍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진짜로 우리네 심리구조의 어떤 의미있는 영역을 건드린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사람 사이에서 그게 굳이 끄집어내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며... 만약 그게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례한 악취미라고 생각해 버려도 크게 나쁠 게 없는 듯.


꼭 의도하지 않더라도, 대화하는 질감이 남들과 약간 다른 사람들이 있긴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는 뭔가 남다르고 깊은 게 있다거나, 상대방을 꿰뚫어본다는 느낌을 주기가 쉽고, 말을 하는 본인까지 이것을 자각해서 활용하다 보면 위처럼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다.

이렇게 언변이 지나치게 좋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한)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발언이나 그럴듯한 거짓말 같은 걸 일삼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해킹하기에 용이하게끔 타고난, 혹은 어디서 배운 몇가지 스킬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를 바탕으로 비즈니스적인 사기를 기획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도 결국 믿음의 영역을 건드려서 해킹하는 것이다 보니 사이비종교와 약간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일테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을 꿰뚫어볼줄 아는 것'이나, '사람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식의 말들을 확실한 컨텐츠 없이 모호하게 강조하면서 중요시하는 사람들, 혹은 인간의 내밀한 심리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타인한테든 자신한테든 그러한 영역을 심오한 것인 양 뜯어보는 것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바로 그러한 관심사 때문에 사기나 컬트에 매우 취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그런 영역까지 건드릴 일이 없다는걸 기억하고, 사적으로 잘 관리하면서 자기 할 일을 잘 하면 되는 것 같다. 사적이라는 게 꼭 혼자 힘으로 라는 뜻은 아니다.


이런건 공부든 예술이든 체육이든 자기 할일을 잘 하는 능력과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나이를 먹다 보면 심리적으로 취약한 부분, 혹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과 지내면서 물러지는 부분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잘 파고드는 사람을 주변에 계속 두고 있다 보면 하나둘씩 그리 권할 만하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되는 듯하다.

근데 그러면서도 자기 하는 일의 영역에서는 변함없이 멀쩡하게 잘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남들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혹은 알아채더라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도 하고... 참 어려운 문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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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30일 일요일

KAIST 명상과학연구소 논란에 부쳐: 과학, 후원 그리고 지식생산의 건전성

KAIST 명상과학연구소 관련하여 진즉에 공개적으로 있었어야 할 논쟁이 최근 며칠 사이에 페북에서 활발히 이뤄지는 모양이다.

먼저 확실하게 전제해야 할 것이 있는데, 어떤 부문이든 만약 과학적 방법론을 결여한 채로 검증을 우회하여 과학의 외피를 취하려는 시도가 발견된다면 과학계의 자정능력을 통해 단호하게 거부를 해야할 테다.
이러한 전제의 작동은 무슨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정상과학의 데일리한 프로세스로, 과학의 영역 혹은 그 부근에서 지적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규범이다.


그런데 페북에 여러 교수님들이 퍼 와 주신 명상과학연구소 측 (혹은 소장 개인)의 자료들을 보면 명상 효과의 과학적 검증이라는 취지와는 달리 종교 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 조화, 자비 등을 과학적 용어정의 및 문제설정으로 포섭하지 않고 그대로 적극 채용하여 서술해둔 부분이 많다.
이에 대해, 아직은 한정적으로만 알려졌더라도 앞으로 과학적 원리가 더욱 많이 밝혀질 것이니까 비전을 작성해둔 것이라고 한다면? 종교 단어라는 이유로 편견을 갖지 말고 지켜봐 달라고 한다면? 애석하지만 그런 말들은 이미 너무 여러 번, 너무 여러 곳으로부터 들었다.
차라리 그런 특정 종교색이 지나치게 강한, (과학의 맥락에서) 막연하게 들리는 어휘들은 잠시 접어두고 현재 자원을 투입해서 풀고 있는 과학 문제들 위주로 소개하고 홍보한다면 더 믿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하간 이러한 정황들로 인해 나는 인간 정신의 비일상적 영역에 대한 과학적 해명과 다채로운 활용을 매우 기대하면서도, 현재의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에 대해서는 본질상 흥미롭지만 아슬아슬한 기획인데 반해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다소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어, 기본적으로 우려하는 입장임을 미리 밝혀둔다.


명상이라는 특수한 정신상태와 그 긍정적 효과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고되고 이에 대한 연구가 다수 진행되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실 남의 분야라 자세히는 모르나 그렇다길래 그렇구나 한다).
나는 물질세계와 분리된 신비한 정신적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이란 지극히 복잡한 물질들의 작용의 산물로 주관에 표상되는 것으로서 물질계와 수반적인 관계만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영역을 상정하는 것보다는 가급적이면 성공적으로 검증되어온 기계론적 세계관 하에서의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설명을 유지하는 것이 더 받아들일만 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계론적 세계관은 과학 이해와 궁합이 좋을 뿐 실제 개별 과학활동을 하는 데의 필수 요건은 아니고, 그런거 없이도 지장없이 잘 연구하기도 하다 보니 이런 얘기가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므로 여담 정도로 해두기로 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있는 정신현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한 비물질적 세계를 표상해내어 그러한 현상의 해석에 동원하게끔 하는 듯한데, 이를 광의의 과학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상술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고수하더라도 퍽 흥미로운 일이다. 특정 종교에서 유래되어 그쪽에서 주로 이야기가 되어왔을지라도 인간 정신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여 긍정적 체험을 제공할 가능성, 그리고 꼭 신비한 비물질적 영역을 전제하지 않고 담백하게 설명될 가능성도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명상의 과학화를 추구하는 많은 심리학적, 인지과학적 연구들은 위에 말한 전제를 인지하여 조심스럽고 담백하게 진행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이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입장, 그리고 혹시 모를 종교부문의 부당한 과학침투를 적극 막고자 하는 입장에서도 이러한 연구들과 그 검증에 더욱 활발히 참여를 해주었으면 한다.
아무튼 명상의 과학화를 염두한 개별 연구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열린 태도의 비판적 검토가 잘 작동한다고 전제하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정말로 잘 작동한다고 확신해서라기보다는 그러한 전제 없이는 이하의 논의들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사실 서론이고, 이러한 과학연구의 개별 내용 자체에 대한 평가의 이면에 있는 좀 다른 논점으로 넘어가보자. 과학지식의 생산방식, 그리고 그것이 추진되는 동기 등과 관련한 '사회구성적 계기'를 논쟁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사회구성적 관점은 각 부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서도 바깥에서 대충 평할 수 있는 만능키 같은 것이기도 해서 굉장한 자제심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능히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오랜만에 꺼내본다.


나는 아직 펀딩을 직접 따 보거나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수행하는 입장이 못 되고, 복잡한 거대 실험과학이나 IRB 필요한 생물과학이 아닌 순수 이론과학의 말단에서 첫 발을 뗀 후보생인데다, 페북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계정은 아니다보니 오히려 약간 더 발언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이라 사견을 보태 볼 수 있는 부분들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우선 기금 출연을 해주시는 높으신 분의 의지(혹은 사립대학의 경우 대학 재단 소유자)에 의해서 다소간에 튀는 전공이나 연구기관이 설립되는 것은 국내의 수많은 대학교는 물론이고, 이름난 해외 명문대학에서도 아주 없는 일은 아닌듯하다.

그리고 서양권 종합대학들은 종교학의 연구 대상에 가까운 직업 종교인 당사자들이 직접 종교학전공에 있으면서 영성을 탐구하고 학위 하는 것에 대해 더욱 관대하고 긍정적인 경향이 있어보이기도 한다 (혹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여기에 결합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보는 것은 지나친 태도일까).
조심스럽지만 서구 백인 인텔리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학계에서, 다른 인간집단을 지나치게 이국적인 연구 대상으로만 대해 온 것에 대한 반성적 경향 때문에 비교적 폭넓게 그런 것들을 열어두는 것 같다. 다양성을 찾아나가면서 지적 전통을 혁신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아카데미의 지식생산 규범을 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럴때에 비로소 따뜻하고 열려있는 보편성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돌아와서, 카이스트 경우에는 SK 일가의 부회장 급의 의지에 의해 명상과학 연구소가 처음 추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걸 보면 좀더 구조가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기금을 출연하는 측의 개인적 관심분야에 학교 측이 맞춰 드리면서 제너럴한 과학기술과 관련된 지원도 받고, 그러면서도 그 특정 관심분야 내에서도 가급적 학적 엄밀성을 잃지 않고 의미있는 연구성과가 나오도록 학자들이 이끌고 가는 것은 잘 된다면야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후원은 과학사에서도 상당히 흔했을 것이다.
물론 현대국가에서의 거대과학은 주로 왕이나 귀족의 개인적 관심사가 아니라 민주적 합의에 의해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후원자' 모델은 과거의 것으로서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기초과학에 투자할수 있는 규모와 방식은 한계가 있으며 (심지어 한국은 그 집행방식이 늘 논란일지언정 R&D 예산의 총량 자체는 이미 많다고 알려져있기도 하고) 민주적 합의에 의해 과학기술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도 어쩔수 없다. 그러므로 민간의 자본에 의한 후원으로 당장에 돈이 안되는 과학기술연구가 진흥되는 것은 상당히 고마운 일이다.
다만 그러한 후원이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진실성, 그리고 과학기술 연구 비용이 국민들 앞에 정당화되기 위한 공공성이라는 가치에 적절히 복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후원자가 자신의 사적, 궁극적 동기보다는 아카데미의 솔리드한 강령 하에서 과학자들이 자율적으로 생산하는 성과를 더 우선시하고 재미있어해야 한다는, 일종의 '쿨함'을 통해 구현되는 책임성 또한 필요하다.



이런 관점들을 종합해 봤을때, 명상의 과학화를 추구하는 명상과학연구소의 초대 연구소장이 과학자가 아닌 직업 종교인인 점은 내게 의구심을 크게 더해주는 부분이었다 (물론 과학기술부문은 아니지만 학위가 있는 분인것은 맞다).
개인적으로는 명상의 과학화라기보다는 명상의 과학적 검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은데, 전자는 종교에서 유래된 개념들의 과학영역으로의 편입 시도가 다소간에 무비판적으로 일어날 경우에 이를 예방하기 어려워 보여서다. 물론 단어가 본질이 아닐순 있다.
이러한 편입은 단순히 내용적인 것뿐만 아니라 과학활동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통합 내지는 전이를 포함하며 이는 여러 사람들의 이익과도 관련되어 있다. 위의 '당장에 돈이 안되는'이라는 표현과 굳이 비교해보자면,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한테 당장에 돈이 되는 방식으로 이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비판적 관심이 끊기는 순간 엄격한 과학적 태도를 결여하게 되는 것은 금방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종교에서 유래된 개념을 심리학적, 인지과학적으로 해명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우나, 근본적으로 아슬아슬한 동거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심리학적으로 연구가 되고 있는 현상일지라도 종교에서 유래되었고 현재적으로도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한국에서 현실적인 종교권력이 부당하게 과학계에 침투하거나 그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고자 했던 과거 주요사례들의 트라우마도 고려되어야 한다.
비판적 검토를 포함한 종합적인 관심이 끊기지 않을 때 건강한 지적 생태계가 구성될수 있고 이를 위해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는, 그리고 다른 모든 연구기관들은 오히려 더욱 꾸준한 화제와 관심을 받아야 한다. 나도 미약하게나마 앞으로 그러한 종합적 관심에 꾸준히 참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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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1일 화요일

과학친화적 세계관을 철지난 계급주의로부터 적극 분리해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진화론의 수호자이며 합리성의 옹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생학이랑 별로 다를 바 없는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게 꽤 많이 보인다. 설령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는 능동적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사회의 변천을 유전자 풀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결국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월-열등 개념 (특히 지능이나 외모 관련) 을 바탕으로 한 '낯설게 보기'만이 남는 그런 아티클들 말이다.


최소한 우생학은 지금 와서는 윤리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적절히 비판받고 사장되었지만 당시에는 수리통계학을 만들다시피 한 사람들까지 적극 참여하는 정상과학의 지위를 누리고 있기라도 했던 반면에, 한국 인터넷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러한 우월-열등 설왕설래는 동시대의 나무위키 주석에서조차 극우주의로 규정되고있는 실정이다.


만약에 이를 집단유전학을 비롯한 진화생물학 및 사회과학의 세련된 정량적 연구방법론, 그리고 과학연구가 인간 사회에 대해 말해줄수 있는/없는 것에 대해 실제로 잘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본다면 뒷목 잡을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작 저들은 자신의 계급주의에 대한 적절한 비판을, 엉뚱하게도 진화론에 대한 도전, 내지는 좌파적인 상대주의로 잘못 간주하게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지독한 농담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는 담론지형을 꼬이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 한해선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런 잘 훈련된 학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창조과학 같은 사이비이론에 비판적일테고, 정치적 동기를 가진 지적 상대주의를 경계할 것이므로 과학의 적법한 옹호자일텐데 말이다.


진영을 오독하고 스스로 진화론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면서 불필요한 분란을 촉발하는, 그러면서도 과학 및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인 이러한 과학주의적-계급주의는, 유사과학 비판 및 광의의 과학커뮤니케이션에 관심있는 실력있는 연구자들에게 곤혹스럽기 그지없을테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진화생물학을 인용하는 아티클이나 영상컨텐츠들 중에 과도하게 '썰 풀기 식으로만' 되어있는, 혹은 개별 과학지식의 전달을 넘어 어떤 이념 내지는 '세계관'의 구축에 몰두하는 것들은 일단은 의심하고 보기 시작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권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두에서 언급한 냉정한(?) 과학주의적 주장들뿐만 아니라, 자연의 연결성과 총체성을 중시하며 주로 진보적 의제를 서포트해주는 과학기반 담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좁은 지성계 및 출판계의 역사에서 간헐적으로나마 주류로 등장하는 이쪽의 계보를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작업도 꽤 의미가 있을테고 언젠가는 취미삼아 해 봐야 하는데 아직 문헌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해보지는 못했다.


아무튼 내생각엔 비과학 및 유사과학에 대응해서 과학적 합리성을 적극 전파하려는 사람들 ㅡ소위 말하는 스켑틱 진영ㅡ은 이렇게 인간학과 생물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특유한 유사-학술적 주장들과의 디커플링을, 지금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천명해야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얘기지만, 외부에서 보기에 스켑틱진영은 이러한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와 오히려 비슷하게 여겨질 때가 많으며, 스켑틱진영 스스로도 이들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명시적으로 설정해두진 않을때가 많다. 나는 나름 내부자인 입장에서 그러한 동일시가 대부분 오해라고 생각하지만, 적극적 선긋기가 부족하다면 100퍼센트 그렇다는 보증은 못 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의 연원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그냥 가설이다. 김정희원 선생님의 최근 Facebook 포스팅(전체공개가 아니어서 링크하지 않음)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약간 나왔는데, 소위 명문고 및 명문대 재학생들 중에 지능 및 학업성취 관련해서 과몰입한 경우엔 우열에 대한 얘기를 꽤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나도 노골적 우월-열등이라는 개념까지는 거부감을 느껴서 안 다다르긴 했지만, 학창시절 소수 고지능자들의 사례를 보며 지능이 높느니 낮느니 하는 것에 과몰입한 시기가 길었던 건 사실이다. 경쟁하며 스트레스 받는 학생들의 시야에서 이것이 자연스러울듯하며, 다만 적절한 교육을 통해 조기에 또다른 시야들도 경험하고 선택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튼 이렇게 머리가 좋다 나쁘다와 관련된 설왕설래가 오가며 '끕'을 나누는 사고방식을 고착시키는 대치동 학원 내지는 오르비 마인드셋에, 고교와 학부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학습한 과학지식,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느끼는 돈 및 외모 등에 대한 관념 같은 게 절묘하게 결합해서 위와 같은 세계관이 형성되는 듯하다. 물론 하나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이지 꼭 이렇다는 건 아니다.


세계관 얘기를 더 해보자. 학부수준의 과학지식 및 교양과학지식 학습,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가 모종의 과학 친화적 세계관 (기계론적, 원자론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을 유발하는 면은 분명히 있는 듯하며 나 또한 그런 세계관을 어디 가서 지지 않을 만큼 당연히 가지고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이들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러한 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지식을, 그리고 과학에 대한 애정을 갖고있지 않을 거라고 잘못 가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비교적 지적/실천적으로 건전하게 쓰일만한 과학친화적 세계관에, 자꾸만 자신들의 차별적 생각을 덤으로 끼워넣고자 시도하게된다.


아무튼 사람들이 살아가고 공부해나가면서 형성한 세계관과 인지도식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인식의 층위를 분별하여 세계관과 개별 지식을 잘 구분하고, 각각을 적재적소에 꺼낼 줄 아는 훈련은 이공학도들 및 과학 애호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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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30일 목요일

자기계발 일변도의 교훈 향유 문화는 담론을 평면화하고 스캠을 낳는다

역대 본 것 중 손꼽게 열받는 유튜브컨텐츠 및 채널인듯하다. 자석은 왜 서로 밀거나 당기는지에 대한 파인만의 유명한 답변 영상을, 본 채널에서는 매우 교훈적, 자기계발적으로 전유해두었다.


사실 파인만의 원래 영상도 뛰어난 고찰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킹받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과학자의 태도와 과학지식의 성격에 대해 알려주는 유익한 메시지이다. 그런데 거기에 K-자기계발이 더해지니, 과학 지식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 난데없이 인생에 대한 교훈으로 바뀌어 버렸다.


다른 나라라고 이런 게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에서는 만물에 대한 자기계발 일변도의 교훈적 소비 문화 (그리고 그것의 상업화)가 정말 발달해 있는 것 같다.


사람 1명, 문구: '자석을 들고 댓글 작실만일 작심만일 성공 마인드 동반자님이 고정함 작심만일 성공 마인드 동반자 2개월 전(수정됨) [작심만일 오프라인 퍼포먼스 코칭모집] "단 30개 영상으로 5개월만에 유튜브 15만 구독자 만든 비결" "목표 성공의 본질을 체화하게 해드립니다" https://bit.ly/3xw6hdR 49'의 이미지일 수 있음 

사람 1명, 문구: '"후..이것봐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먼 11:05 질문자의 우문에 인생 현답을 하다 작심만일 전설적인 물리학자의 몰입감 쩌는 인생 교훈... (과연 나는 어떨까?) 작심만일 성공 마인드 동반자· 조회수 80만회· 2개월전'의 이미지일 수 있음

그 원인을 추측해 보자면 발달한 매체 환경, 대학입시의 절대적(?) 중요성, 취업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및 힐링 필요성 등이 있을 것이다.

이런 토양에서 대학입시 강사들이 청소년들 세계관에 비대한 영향력 행사하며 가스라이팅 하고, 더 나아가 성인들까지 현혹하는 졸꾸맨 신박사도 탄생하고 뭐 그렇게 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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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6일 목요일

최무영 교수님의 비평형통계역학 특강 TA를 담당한 소감

교양과학서적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를 중학교 때 인상깊게 읽고 자기소개서에도 쓰고 그랬었는데, 10년쯤 지나서 이번 학기에 최 교수님의 '응집물질물리특강 1 (비평형통계역학)' 수업조교를 맡아서 하게 되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 과제물을 일일이 살펴보신 뒤에 조교에게 채점하게끔 주시는데, 이번에 마지막 과제 받으러 찾아뵐때 책을 가져가서 싸인을 받아도 되는지 여쭈었고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몇번 개정이 되고 표지도 바뀌어서 이제는 아마 구하기 힘든 판본일게다.


당시 내가 구입할 때 아버지도 같이 사 읽으셨어서, 싸인 받는다고 하니까 같이 갖고 가서 받아오게끔 부탁하셨다. 아버지는 이과 전공은 아니지만 수학도 내게 고등학생 초반까지 한 수 가르쳐 주셨을 정도로 워낙 잘하시고 했다보니 이런 과학쪽에도 기본적으로 관심이 있으시고, 당시에 내가 물리학 관심있어 한다니까 함께 읽어보고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서 사 읽으셨던 것 같다.


다른 물리학자 교수님들과 최교수님이 공저하신 신간 <그렇게 물리학자가 되었다>도 마침 오늘(!) 출간이 되었다. 그래서 그것도 교보에서 사서 가지고 가려 했지만 아쉽게도 우리 학교 교보에는 아직 입고가 안 되었더라. 자서전 느낌인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수업 얘기를 좀 해 보자면, 인문대 수업에서는 현실 정치사회에 대한 튀는 말씀도 꽤 자주 하신다고 하는데 (그러한 내용들이 종종 등장하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또한 요즘으로 따지면 '인문사회계를 위한 물리학'에 해당하는 수업에서 강의하셨던 걸 다듬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는 박사과정 특강 수업이다 보니 철저히 전공내용 위주로 진행을 하셨다.


그래도 가끔씩 수업 내용과 관련해서 과학지식의 인식론적 기초, 사회구성적 성격 같은것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시는데 교수님의 견해만을 바탕으로 단정적으로 얘기하기보다는 해당 학계의 여러가지 설을 소개해주시는 식으로, 지극히 합리적인 견해 형성 방식을 갖고 계시다고 느꼈다.


특히 미시적인 대상들과 규칙들의 동역학이 실재에 가깝고 통계역학은 그것들로부터 유도될수 있어야 하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물리학도 특유의 환원주의적 도식이, 반드시 맞는건 아닐 수 있다는 말씀도 재밌었다. 우리는 현상의 설명에 가장 유용한 이론적 틀을 골라서 적용하는 것일 뿐이고, 단단한 실재라고 믿어지는 것들도 마찬가지인 것.


이건 내가 시스템의 미시적 디테일이 irrelevant해지고 '근본적으로 거시적인' strict한 법칙들이 등장하는 universality class 같은 걸 보면서 했던 생각들과도 그 결이 비슷했다. 여하튼 소박한 환원주의에 대한 그런 의심은 언뜻 들으면 다소 신비주의적인 계기를 갖는 것으로 오해될수 있으며 한때 '신과학' 등의 구호 하에 지나칠 정도의 총체성에의 추구로 물리학자들을 이끌기도 했지만, 최 교수님은 한때 유행했던 그런 것들과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신 걸로 알고 있고, 해당 언급 역시 철저히 인식론적 문제의식이라고 생각된다.


뭐 모두 중요한 얘기들이지만 사실 여담들이고, 전공 내용 자체에 대한 최 교수님의 강의 실력 또한 두말할필요 없이 명불허전이셨다. 학기 중후반부에는 진도 때문에 너무 급하게 진행했는데 이것이 상당히 아쉽다.


물리 교수님들의 강의 방식을 내 마음대로 두 가지로 나눠 보자면 대단히 심오하고 미묘해보이게 설명하는 방식과, 최대한 클리어하고 담백하게 해설해서 아우라를 부수는 방식이 있다. 들어본 수업 중에는 김석 교수님이 대표적으로 후자 쪽이었다. 최 교수님 수업의 경우 관점은 기본적으로 전자에 가까우신 것 같은데, 그 미묘한 것들조차 단순히 말로 하는게 아니라 정확한 이론적 statement들로 풀어내셔서 오히려 후자에 가깝게 느껴지는 탁월한 강의였다.


이번학기를 끝으로 퇴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명예교수 되시고 나서도 기회가 되면 강의를 열어주시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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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0일 금요일

5.18을 보는 관점: 강요되는 극복과 보편적 기념 사이에서

민주당 박지현 공동비대위원장이 임행곡 가사를 보면서 부른 것이 뭐가 문제냐는 옹호에 큰 틀에서는 동감하지만, 옹호들 사이에서도 결이 좀 나뉘는거 같다. 그 중에서 임행곡이 잊혀져야 비로소 건강한 민주주의라는 의견들은 특히나 좀 미묘한 것 같다. 특히 그것이 민주당쪽에서 나올경우 더욱 그렇다. 외웠냐 안외웠냐로 공격하며 상징자산에 대한 피로감을 유발하는 정치는 지양되어야겠으나, 몰라도 된다라는 친민주당 쪽의 옹호들 중 꽤 많은 수에도 ㅡ특히 뉘앙스에 따라서 하술할 강박적 쿨함이 느껴질 경우엔ㅡ 전적으로 동감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수 진영도 임행곡을 거리낌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취하며 신의를 확보하게 되어야한다. 민주당 진영이 5.18의 가치를 부르짖는것 그 자체로 정치적 효용을 얻을수 없게 되어야 한다. 요컨대 5.18 아픔을 지워내고 극복하고 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보편적으로 기억하고 기념해야한다.


보수 쪽에서 호남에 열린 태도를 취하는 분들 중에서도 5.18을 보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고 극복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그 미묘한 차이는, 호남이 보수정당에 표를 안 줘 온 현상을 '이상한', '비정상적인' 일로 취급하는지 여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호남뿐만 아니라 그 어디의 표심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늘 지적하듯이, 이상하다는게 사실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아픔을 극복해야 하는데 과거에 묶여 멈춰있다는 식의 저런 주장들은, 하루빨리 5.18 같은 정신적(?) 가치를 철회하고 자신들을 지지해 주면 좋겠다는 호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강요되는 망각, 강요되는 극복에의 요구는 매우 시혜적이다.


물론 일각에서 ㅡ주로 민주당을 관성적으로 옹호하기 위해ㅡ 호남인들은 5.18 정신과 같은 가치 본위의 현명한 투표를 한다 라며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나는 5.18에 대한 성역화가 있다며 과도한 불만을 토로하는 극우(내용적인 걸 떠나 성역에 대한 반감이라는 형식 면에서)적 주장을 매우 싫어한다.


그렇지만 일부 민주당 정치인들이 5.18 정신을 자신들이 필연적으로 담지한다고 착각하고 관성적으로 외치며 활용하다가 문제를 일으킬때는, 혹은 기념의 과정에서 헛발질을 할때에는 아 저러니까 성역화라고 하는구나, 빌미를 주는구나 싶어 마찬가지로 화가 나기도 한다.


물론 그때 잘못은 그러한 정치인들에 물어야 할것이며, 그들을 지지하거나 선출한 ㅡ혹은 그렇다고 평면화되어 간주되는ㅡ 호남 유권자들을 타자화하며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일테다. 늘 말하지만 이것은 나쁜 일이기 이전에,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일각에서의 불만과 달리, 호남의 유권자라는 집단을 탓하는 일의 원리적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은 성역화라고 할 수 없다.


호남정치가 꼭 이념적 가치본위의 투표냐 하면 당연하게도 그렇지도 않다. 지역조직에서 민주당이 강세라 굉장히 많은 정치적 스펙트럼이 민주당 깃발 아래 모여있는 데서 오는 특수성 같은 게 있다. 진영을 떠나 각 지역의 정치적 특색을 '보편성 속의 특수성'으로 이해해야 타자화, 희화화 없는 제대로된 관점이 수립될수 있을것이다.


아무튼 말하고 싶던 건, 민주당 지지층 일각에서 90년대생인데 뭐 어떠냐고 옹호하는 것도, 그 구체적인 뉘앙스에 따라 다소간에 강박적인 쿨함으로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박적인 쿨함은 의도치않게 위와 같은 극우로부터의 '강요되는 극복'에 동조하는 효과를 낼수 있으므로 경계해야한다.


가사를 봤느니 안봤느니 자체가 좀스럽고, 90년대 생이라면 모르는게 당연하다고 할수도 있겠으나 나는 사실 생각이 좀 다르긴 하다. 난 민주당에서 박지현 위원장만큼 올바른 언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근래에 없다고 보고, 이런 논란은 부당한 공격인 측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아직까지도 어느 정도 외부자적인 위치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겠으나 그 또한 행보와 역량에 의해 가능한 포지셔닝일테다.


그래도 (비록 마이너한 디테일이긴 하겠으나) 이런 논란이 안 생기게끔 한번더 숙지하고 불렀다면 어땠을까 싶긴 하다. 근데 뭐 계속 안보고 부르다가 잠깐 본것이 캡쳐된 것이라고 하니 결국 다소 좀스럽게 공격을 한 쪽에 비판의 화살을 돌리게 되기는 한다.


잠깐 내 얘기를 해보자면 나는 학부시절에 지나가는 킹반학우였기 때문에 대학가에서 흔하다는 민중의례도 직접 참여해본적 없는것같다. 그치만 일종의 너드적 취미 + 음악 찾아듣는 취미로 소련, 미국 등의 국가를 찾아 들어 보는거랑 기본적으로 비슷한 선에서, 그러나 불과 수십년전 우리나라에서 있던 일에 대한 구체적인 맥락을 아는 입장에서 조금 더 각별한 마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여러차례 들어보고 잘 외우고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홍콩 민주화운동에서 임행곡이 불리었다길래 기억에 더욱 선명히 남아있다.


암튼 외워서 부르든 보면서 부르든, 그렇게 보편적으로 기념하게끔 추인하겠다, 혹은 추인에 협조하겠다는 정치적 태도가 훼손되지 않으면 아무렴 상관없지 않을까 한다. 특히나 반말 써가면서 고압적으로 비난하는 일부 민주당 코어 지지층의 태도는 정말 불쾌하다. 자신들의 당 내에서 비대위원장 개인을 공격하느라 상징자산을 소모시키지 말고, 5.18의 헌법전문 수록을 비롯한 보편적 기념을 향해 묵묵히 힘써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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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4일 토요일

자유와 반지성주의: 근미래 이념정치의 두 키워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를 던졌다. 둘 모두 원래대로라면 내가 관심을 크게 가질 법한 주제이다. 좀더 정확하게는 그 단어들 자체보다는, 그 단어들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어떤 싸움을 벌이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사회의 정치적 전선을 매우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두들 그 얘기를 열심히 하니깐 나로서는 특별히 추가로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어져 버린 것이 괜히 아이러니하고 아쉽다.


내 생각에 저런 것들이 재밌는 이유는, 합리성이라는 가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극단주의적 오용이 무척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중 실현이 쉬운 것은 언제나 후자 쪽이다.


물론 이것들만이 합리성이라는 주제와 필연적, 근본적으로 연관된다고 신봉(?)해서는 안될 것이며, 요즘 자주 언급되는 가치들 중 저런 것들이 합리성에 대한 내 관심사와 연관되는 것 같다고 소박하게만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자유는 수 차례 지적했듯이 보수 진영에서는 적극적으로 취하고 싶어하는 가치인데, 난 자유에 대한 그쪽의 이해 역시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반면 민주당 진영에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가치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관심 자체가 그다지 없는 듯해서 무척 아쉽다. 이 둘 모두,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이를 정치권력에 반영하는 수단으로서의 공적 이성과는 꽤나 떨어져 있는 처사겠다.


한편 반지성주의 같은 경우는 상대진영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로의 다소 넓은 쓰임도 있는 반면, 어떠한 정치적 경향의 구체적인 연원과 기능을 지적하는 개념으로서의 좁은 쓰임도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 둘이 경합하면서 유의미한 한국적 맥락의 담론이 탄생한다면 재밌을 것 같다.


미국정치의 성공과 실패, 통합과 분열의 역사가 이 자유와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들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담론 중 이념중심(?)적인 것들은 좌우를 불문하고 미국의 상응하는 담론들에서 영적인(?) 부분만 조금 탈색시킨 채로 그것들을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런 키워드들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감있게 얘기할 수. 있는 역량이 앞으로의 한국의 이념정치에서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근데 각 진영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가치를 담지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싸움이 성립되고 한국적 맥락이 변증법적으로 발전 하는 것인데... 민주당이 이러한 단어들에는 일관적으로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게 무척 아쉬운 점이다. 5년동안 실천적 이론가(?)라고 할수있는 사람들이 그런 빌드업을 게을리 한 결과, 자유와 반지성주의를 오남용하는 정치적 극단주의에 대응할 사회적 역량이 많이 떨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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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일 토요일

한국 과학담론의 지형

한국에서 과학기술 및 그 인접활동에 참여하고있는 그룹을 크게 세네 가지 정도로 나눠보자면 (1) 과학, (2) 과학문화 및 출판, (3) 과학인문학 (과학철학, 과학기술사회학, 과학사) 정도라고 할수 있을듯하다. 여기에 과학저널리즘도 있을거고, 과학현장에서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쪽에 발을 걸친 분들도 있다.


과학전공자 및 과학자들의 참여비중이 높은 과학적 회의주의라고 하는 활동의 경우는, 독자적인 그룹일수도 있겠지만 과학문화 및 출판 쪽에 포함을 시켜 볼 수 있을 듯하고... 명확히 묶이는 단체가 있다기보다는 스켑틱진영이라고 하면 대략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듣는 편이다.

이들은 흥미롭게도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00~10년대를 주름잡은 문과분야 '논객' 집단이랑도 얼기설기 꽤 연관이 되어있기도 하다. 이러한 연관성은 황우석 사건을 키워드로 찾아보면 여러가지 자료가 나온다.


물론 칼같이 나눠지는것은 아니다. 이들은 교집합도 많고, 서로간에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긴장하며 여러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듯하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 과학과 과학인문학 사이의 협력과 긴장
: 과학사회학자들이 과학자들의 과학활동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데, 현장 과학자들이 볼때 동의가 되지 않는 경우.
: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분야의 성격에 대한 메타적 고찰(철학?)이, 과학철학에서의 인식론적 진단과 충돌하는 경우.
: 과학자들이 인문학을 모방해서 나름의 사상을 전개하는 경우. 한국의 경우엔 물리학 원로교수들을 중심으로 프리고진의 영향을 받아 전개한 '신과학 운동'이 있다.

- 과학과 과학문화 사이의 협력과 긴장
: 과학 학술행사에 과학문화 쪽 세션도 편성되어 대중화를 꾀하고 협력하는 경우.
: 과기부, 창의재단 등이 가진 예산의 배분 문제. 과학문화에 의해 과학적 지식이 왜곡 전달될거라는 과학 연구자들의 우려

그치만 생태계가 꽤 좁다보니 굳이 이런 식으로 규정과 분류의 언어를 사용해서 서로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얘기들을 잘 안하게 되고... 제3자 입장에서 이러한 과학 및 인접활동의 구조를 종합하고 개괄하는 얘기가 적극적으로 나오지는 않는 듯하다.

나같은 경우는 일개 학생으로서 밖에서 지켜보는 입장이지만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이런걸 잘 아는 누군가가 각 그룹들 사이의 협력과 대립을 기록해 주면 좋겠다. 역사적 관점도 좋고 건조한 관료적(?) 보고서 형식도 좋다. 아마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역시 또 한명의 과학인문학 학자이거나 과학기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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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8일 수요일

누가 자유를 훼손하는가? 도그마와 정설을 구분하자

어떤 분야에서 이미 자유로운 토론의 결과로 확립된 정설이 있을 때, 그걸 뒤집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이 의심을 하면서, 그 정설이 부당하게 권위를 취하고 있다며 의심할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진화 부정을 비롯한 각종 유사과학이 대표적이다.


잊을만하면 중앙 정치무대에 소환되지만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5.18을 둘러싼 극우적 발언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주로 합리성과 냉철함을 내세우지만 그 논리적 구조와 정치적 지위는 상술한 숱한 유사과학 및 음모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5.18에 대해 역사적으로 확립된 평가를 대놓고 부정하는 경우는 은근히 드물며, 민주화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인정한다고 주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의심할 자유 그 자체를 계속 외친다. 이 말대로면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알 수가 없는지라 사실 더 이상하다. 실제로 어떤 의심을 품고있지만 말하지 않고 있거나, 정설이긴 할지라도 그것이 헤게모니를 차지하고있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들거나 둘중에 하나일 거다. 그것을 파헤칠 생각은 없다.


물론 악인에게도 변호사가 필요한것처럼 논란성 발언에도 자유는 필요하지 않냐는 주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단지 그거라면 무척 중요한 얘기고 당연히 동감하는데,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대체 얼마나 침해가 되었길래 그런 발언을 해온 노재승이 공당의 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고 그러겠냐는 거다. 표현의 자유 침해의 실체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발언내용과 명확히 선긋기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잘못된 주장을 링 위에 올리고 싶다는 말에 다름 아니게 되며 이는 자유로운 비판의 적법한 대상이다.


나도 단톡방 같은 데서 내 생각과 다른 말을 볼 때는 무조건 열내지 않고 최대한 차근차근 얘기하려는 편이다. 애초에 찍어누를(?) 언변이 별로 안되기도 하고. 그러나 공인을 논하는 태도는 다르다. 사인이던 시절 발언이라며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도 없는 상황인 만큼, 영입 철회가 안되고 이대로 간다면 음모론의 공적 권위로의 부당한 추인을 가만히 지켜보는 셈이다.


과연 누가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는가? 자유사회에서 어떤 민감한 문제에 대해 이미 확립된 정론을 향해 근거가 불충분한 의심을 표했다가 공적인 비판을 받을때 자신들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또한 얼마나 개복치같은가. 그 민감함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들면 성역화라고 막연한 불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올바르고 진지하게 토픽을 다루는 방법부터 익혀야한다. 민감함을 이해하려는 공부와, 상황에 맞는 질문이 필요하다. 성역화라는 그들의 진단이 과장된 언사라고 생각하지만, 설령 그런 게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는 자명할것이다.


물론 어떤 헤게모니가 또다른 부당한 도그마로 작용할 가능성은 당연히 경계해야 하며, 그걸 막는 과정에서 사회가 한단계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론적인 얘기고, 현재 이들의 문제제기 내용과 방식은 도그마틱한 권위와 정설의 권위를 혼동하고 있으므로 그 필요성이 전혀 설득력있지 않다. 그런 과정은 극단주의적/음모론적 주장을 배제한 판에서 알아서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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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13일 화요일

유사과학에 대한 내 생각의 변천사: 침펄풍 월드컵을 보고

침착맨 유튜브에 침펄풍이 함께한 유사과학 월드컵이 올라왔는데, 마침 3년 전에 내가 이런 글을 썼길래 다시 읽어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유사과학에 대한 내 생각은 약간 정반합 느낌으로 바뀌어왔는데, 가장 처음에는 과학 애호가로서 그런 것들의 존재에 충격받고 여러가지 생각을 해본 게 컸다. 저게 왜 비과학이냐는 질문에 나름대로 말과 글로 짚어내려는 시도를 많이 해봤고, 철학에 관심을 가져보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두번째로는 이 글에서처럼, 유사과학을 지목해서 비판하는 게 운동(?)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약간 냉소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구성원 다수가 유사과학임을 아는 무언가를 다같이 비판하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효능감을 유발하는데, 그 효능감이 다른 분야에서 작동되는 것을 상상하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것이 놀이의 형태로 널리 퍼진다면 그 유사과학으로 돈을 버는 게 더욱 어려워지니 아무래도 좋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 연장선 상에서 최근에는 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세상이 균질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그런 지목이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적절한 사회적 조건이 갖춰졌을 때), 주변에서 그런 사례를 몇번 접하면서다. 유사과학이라고 모두가 생각하지 않는, 반신반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효과가 더욱 명백하다.

결국 유사과학을 지목하는 권위가 가장 멋지게 활용되는 순간은 특정 시공간적 맥락(그것이 폐쇄적 집단이건, 세계 전체이건)에서 무언가가 유사과학이라고 누구도 감히 지목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유사과학을 가장 소리높여 비판해온 사람들조차도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에 그것을 지목하여 실추시키되, 그것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사회적 기제에 대한 폭로까지 가닿는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당대에는 '유사과학 비판'이라고 인식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아무튼 영상이 너무 길어서 보다가 말기는 했지만, 침펄풍 세 명이 유사과학의 기제와 쟁점들을 꽤나 설득력있고 재치있게 짚어내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유사과학이라는 토픽은 접근성이 낮지 않으면서도 과학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과 관련해서 이성, 믿음, 사회, 문화 등 많은 주제에 대한 생각을 쉽게 꺼내게끔 하는 이래저래 재밌는 토픽이 아닐까 한다.

+ 핸드폰 등 다른 데로 눈을 돌린 채 설거지를 하다가 사고로 응급실에 가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고 한다. 설거지 하면서 보면 되겠다는 게 베댓의 주요 레퍼토리지만, 실제로는 영상을 보기보다는 전방주시를 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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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2일 일요일

경계에 선 시민참여 저널리즘: 퇴행인가 대안인가

오마이뉴스가 그 모토에서부터 드러나는, 일반적인 저널리즘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긍정적인 쪽으로 가져갈 수 있으려면 목수정 작가의 이번 글과 같은 기사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고민이 필요할 때다.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전세계적인 화두이고, 일부 이상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인 줄 알았던 음모론이 거시적인 정치세력의 응결핵이 되어 정국을 구체적으로 들었다놨다 하는 시대다.

특정 사건에 대해 정권이 석연치않은 대처를 하면서 사실관계를 불명확하게 만들 때 생겨나는 각종 의심들 중에서 음모론이 섞여 들어가고, 많은 사람들이 헛발질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구태여 발굴해서 조롱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이 드러나기 전에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나를 포함한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코로나와 같은 사안에 대해 이미 프랑스 현지에서도 거짓임이 확인된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걸러내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일반 언론과 차별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도 퇴행적인 것에 불과하다. 설령 좌파적 문제의식의 발로라고 하더라도 극우 음모론과 그다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물론 기성 언론에서도 교묘한 왜곡보도와, 사실확인이 안된 채로 특정 방향을 가리키는 보도를 통해 공익을 해치곤 하며 이런 저널리즘 역시 문제적이다. 그러나 가짜뉴스 및 음모론의 생산기제는 아직까진 그런 것들과 나름대로 구별이 가능하다고 본다.

오마이뉴스의 특별한 저널리즘은 독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면서 그런 최후의 경계마저 흐릴 것인가? 아니면 정형화된 언어 속에 프레임을 숨겨두는 행태에서 벗어난 담백하고 개성있는 저널리즘을 통해 성공적인 대안으로 꾸준히 기능할것인가? 앞으로는 후자와 같은 날카로운 시각의 기사를 더 많이 보게 되기를 바란다.

(Facebook 페이지 '오하이오의 낚시꾼'의 게시물(링크)을 공유하며 추가한 코멘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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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6일 수요일

극우적으로 동원되는 종교와 과학: 부당하게 자연화된 가치명제로서

 '차이를 인정하고 살라'는 주장은 우생학스럽고 차별적인 것인데도, 나름의 논리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아서 찾아볼 때마다 놀란다. 예전에는 그 메시지를 나름대로 감추려 했던 것 같은데, 요새는 아예 저 문장을 직접 말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박근혜정부 때 권력과 결탁했던 청년단체 쪽에서 좌파를 욕하던 맥락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차이가 있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걸 부당하게 전복하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한때 관심을 모으던 성평화라던가, 보수 유튜버들이 패시브로 깔고 가는 안티페미니즘(이는 사실 보수뿐 아니라 반대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에도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그것을 선명하게 극우담론에 복무시키는 매체 위주로만 다룬다)도 그렇다. 많은 청년 대안우파 흐름이 있지만 그들의 핵심은 결국 저 메시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건 전통적인 성역할을 자연적인 것으로 강조하고 뉴에이지(?),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경계하는 극우 개신교 논리와 통해 있다.

물론 디테일한 차이점은 있다. 먼저 기독교 보수주의에서는, 상술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세계관 상에서의 모종의 질서가 붕괴될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우려한다. 반면 청년 대안우파는 주로 과학과 이성을 내세워서 차이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과학 중 꽤 많은 것들은 사실 부정할 수 없는 '과학지식'이라기보다는, 환경과 사회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사회적 선호 같은 것을 과학적 진리라고 본인들 마음대로 생각한 것이거나, 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함량미달의 과학을 인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그들이 말하는 과학은 부당하게 자연화된 가치명제로서, 종교에서 말하는 자연의 섭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어 버린다.

물론 모범사례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과학지식과 종교적 신념은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 자체가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과도한 신봉에서 오는 폐해를 비판하는 취지에는 동감할지라도) 그 차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외곽지대에서 왜곡된 형태로 극우논리에 동원되는 방식은 서로 별로 다르지 않다. 극우 개신교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이 기독교에 기반을 두었다는 등 자신들의 세계관과 세속국가인 한국의 국가관을 얼토당토않게 동일시한다. 이들은 심지어 국가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보수주의에 친화적이지 않은 국가권력은 제대로 된 권력으로 인정을 안 한다. 한편 청년 대안우파에서도 나름의 논리를 기반으로 좌파이념이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이질적으로 출발한 저 둘은, 자연스러운 차이가 지워짐에 따른 사회(혹은 국가)의 붕괴를 우려하는 보수주의라는 한 몸체의 양쪽 바퀴로 귀결된다.

이 양쪽 바퀴가 향하고 있는 길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먼저 청년 대안우파의 경우 크게 성폭력 개념의 확장에 따른 공포, 문화컨텐츠에 대한 PC로 요약되는 좌파적 개입에 대한 반감, 그리고 군대문제가 핵심으로 보인다. 앞의 두 개는 사실 잘못 흘러간 케이스가 분명히 없지는 않았던데다(그러나 잘못이 없다고 잘못 알려진(...) 케이스 역시 분명히 있다), 기존에 디폴트로 존재해온 잘못된 인식이 뿌리깊기 때문에 그것과 싸우다 보면 헛발질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으므로 정말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문제성은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대응하지만, 디폴트로 존재해온 문제적 인식은 별로 인정하지 않고, 타개하는 데 협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문화컨텐츠에서 여성 소비자들의 발언권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길게 봐야 하고, 더욱 시급한 것은 군대문제가 아닐까 한다.

군대 문제는 근본적으로 어처구니 없이 심각한 것이 맞기 때문에, 더욱 빠르게 실질적인 개선을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평상시 복무환경뿐 아니라 의료시스템이나, 사고 발생 시 대처 역시 매우 열악하며, 단순히 열악함을 넘어서 '할 수 있는데도 안 해서' 문제가 터지는 군대 특유의 뭣같음이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잘만 한다면 정치적 효능감을 건전하게 발휘할 기회도 있을 것이나, 적어도 현재와 같은 식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보수정권이 아닌 현 정권에서 군 문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된 점이 많은데 이에 대한 홍보 역시 필요하다고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개신교 극우주의에 대한 대응 문제다. 먼저 극우 개신교 커뮤니티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여러 '이상한' 주장들이 비과학적이며, 나아가 종교적 신념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 자체가 우려스럽고 위험하다는 식의 비판은 많은 비종교적인 이공학도의 입장에서 꽤나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명히 있는 종교적 경향을 지나치게 타자화시켜 오히려 그에 대한 통찰을 방해하고, 종교에 대해 인류가 기존에 쌓아 온 '문과적' 학술지식과의 접점이 많지 않아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하며, 결정적으로 정작 필요한 곳에 잘 가 닿지를 않는다. 예컨대 소위 신무신론의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밈 이론'은 방법론적으로 학술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적, 유비적인 낯설게 보기에 가까우며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도 많지 않아 보인다. 극우 개신교의 이상한 주장들이 가진 문제점을 링 위에 올리려면, 그 주장들이 생산되고 소비되며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구조를 사회학적으로 따지는 구체성이 필요하다.

현재 코로나19 재확산 국면에서 나타나는 반사회적, 음모론적 태도를 포함하여, 한국 극우개신교에서 이상한 지식이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는 것은 현상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현상의 '원인'에 보다 가까운 것은 공적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지역사회 커뮤니티 기능과, 노인과 탈북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심지어 교육 기능 일부까지 과도하게 종교단체에 위임(극우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되어 있는 상황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책임을 위임하는 대가로, 세속사회와는 다른 인지도식이 신도들에게 체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떠한 반사회적 신념이 침투할지는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그 중 일부가 정치적으로 동원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위임된 공적기능을 집행하는 종교활동 현장에서 사적 신념이 설파되는 것 자체를 국가가 신경써서는 안 되고, 게다가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종교의 직접적인 정치동원만을 제도적으로 막는 것만 해도 위험할 수 있다. 한편 비종교적 민간영역은 복지를 굴릴 유인이 없다. 따라서 이렇게 종교단체에 과도하게 위임되어 있는 사회적 기능을 비용을 들여서라도 국가가 어느정도 회수하여 집행할 필요가 있다. 공적 프로그램에서라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를 통한 감시와 의견표출이 비교적 자유롭고, 조직 역시 종교지도자와 같은 특정인으로 소급되지 않기 때문에 보다 건전한 운영이 가능하다. 한편 세속적 민간영역에서 관심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각종 복지프로그램에 대한 진심어린 참여 및 감시와 함께, 컬트적이지 않은 지식을 공적 영역, 특히 교육 등에 효과적으로 공급하는 것 역시 절실히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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