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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9일 금요일

갈등선을 직시하며 연대를 지속하는 법: 배제가 아닌 상호이해의 젠더정치로


  내가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와 관련된 논란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작년 말 한국여성철학회가 다른 학회와의 공동 학술대회에서 유민석을 발표자에 포함시켰다는 이유로 TERF 활동가들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고 해당 학술대회에서 빠지기로 결정한 사건 때문이었다. 비록 유민석의 하차가 요구된 직접적인 근거가 그의 정체성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하차 요구가 주로 TERF 활동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한국여성철학회가 해당 학술대회에 참여를 포기한다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 점 등은 현재 TERF가 페미니즘 담론에서 가진 중대성을 보여준다.

  그 후에 전통 있는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리뉴얼하여 설립된 출판사 ‘이프북스’에서 국지혜를 포함하여 인터넷 상에서 퀴어포빅, 트랜스포빅한 언사를 행하고 그것을 정당화해 온 사람들의 글을 모은 서적인 ‘근본 없는 페미니즘’을 출간하기로 한 일이 있었다. 필진들의 인터넷 상에서의 언행들이 논란이 되면서 그 서적의 출간은 ‘사건성’을 획득했고, 페미니스트 가수의 축하 공연 논란, 필진 간의 불화, 원고의 미수합 등을 거치며 현재는 책 출간이 불투명해졌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는 출판사 ‘열다북스’에서 쉴라 제프리스의 저서를 출판하기로 하고 동성애자 남성에 대해 차별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쉴라 제프리스의 문구를 수록한 홍보 자료를 페이스북에서 공개하여 논란이 되었다. “동성애자 남성은 남성우월주의 체제의 순응자로 볼 수 있다”로 시작되는 그 문구는 이하에서 언급할 TERF 이론의 대표적인 오류인, ‘생물학적∙심리학적 측면의 부정’과 ‘정치성으로의 무한 환원’이라는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프의 책임자들은 그들의 서적이 논란이 되자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소개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으며, 스스로 ‘인터넷에 관심을 끊은 지 몇 년이 됐다’고 하면서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인터넷 위주로 유명세를 얻은 필진들을 옹호하기도 했다. 철저하게 현실에 근거해야 하는 학자적 태도가 결여된 행동이었다. 책을 ‘읽고 까라’고 주장하려면, 본인들부터 그들의 인터넷상의 행적을 ‘읽고 옹호해야’ 했다.

  열다북스 측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이미 과거에 논의되어 많은 비판을 받은 주장이므로 출간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했다. 그 말만 보면 마치 학술적 연구 목적으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출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홍보자료에서는 쉴라 제프리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소개한다는 뉘앙스를 전혀 느낄 수 없으며, 그의 퀴어포빅한 주장만이 크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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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현재 기성 페미니즘 학계에 있는, 즉 90~00년대 초반쯤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학자 및 활동가들 사이에서 트랜스배제적인 분위기의 맹아가 어느 정도 있었고(과거 이프의 하리수 인터뷰에서 보듯이), 그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요즈음 인터넷을 위주로 TERF 계열에서 생산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혐오에 대해 막연하게 묵인하거나, 심지어 동조하며 이론적 정당화를 돕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00년대 초∙중반까지 축적된 페미니즘적 논의들은 사회적 수용성의 미비로 인해 몇몇 무리한 주장들을 위주로 인터넷 상에서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회자되면서 대중들에게 충분히 계승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페미니즘이 다시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대중적인 담론이 형성되며 기성 학계 및 활동가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해진 상황에서, 관념론 혹은 진영논리에 천착하지 않고 구체적인 현상들을 보며 기존에 축적된 양질의 논의가 대중화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 왔는지 반성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굉장히 때늦은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TERF 이론을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이들의 이론이 그 기저에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심리학적 측면의 부정’과 ‘정치성으로의 무한 환원’이라는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고, 이들이 페미니즘에서 가진 문제성이 페미니즘과 퀴어 간의 ‘연대’와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이며, 페미니즘과 퀴어 사이에 잠재하고 있는 갈등선을 TERF처럼 배제의 논리가 아닌 상호이해의 논리로 활용하여 높은 수준의 연대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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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RF가 트랜스젠더, 그리고 퀴어 전반에 대한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게이와 트랜스여성 등이 그들이 가진 남성성을 바탕으로 여성들의 공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직관적으로는 메일바디를 가진 비수술 트랜스여성의 여자화장실 출입 예시, 그리고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혐오 예시 등을 통해 정당화하며, 이론적으로는 트랜스여성이 어쨌든 ‘남성’이라고 설득함으로써 정당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트랜스여성을 여성이 되고 싶어서 여성의 특징을 따라하는 ‘남성’이라고 보기보다는, 신체적으로 메일바디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피메일바디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주장은 트랜스여성들이 여장을 하는 등의 실천이 전통적인 이분법적 성역할에 복무하므로 여성혐오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분법적 성역할을 강요하는 문화 속에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기표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그들이 그 문화 속에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대로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그러한 기표들을 활용한다는 측면을 볼 필요가 있다. 한 페이스북 친구분이 사진찍어 주신 이름 모를 책에서 본 말대로, “그들에게 여성성은 과잉 수행해야만 얻어”진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TERF의 오해는, ‘만약 성별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아예 없어진다면 그 때는 트랜스젠더가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그들의 의문 속에 집약되어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여장’이라는 개념이 없을 것이므로, 현재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기표를 취할 필요는 없게 된다. 그러나 매우 당연하게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불일치감)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TERF의 이론은 순전히 의지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생물학적∙심리학적 영역에서의 젠더 디스포리아를 부정하며, 트랜스여성이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것을 순전히 의지에 의한 선택인 것처럼 묘사한다.

  물론 현재 사회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성역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트랜스여성들이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상징들을 애써 취하지 않는 것이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 존재가 가시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비수술 트랜스여성이 ‘여성적’ 기표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냥 남성으로 인식되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젠더수행은 ‘여성적’ 기표를 취하는 것이다. ‘여성적’ 기표를 정해 놓고 여성이 되기 위해 그것을 취하는 젠더수행이 궁극적으로는 해소되는 게 이상적이지만, 그 책임을 트랜스여성 개인들에 부과하기보다는 (1)트랜스젠더의 존재가 가시화되어 있지 않고, (2)확고한 이분법적 성역할이 강요되고 있는 전통적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심지어 해석하기에 따라, 비수술 트랜스여성은 메일바디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적’ 기표를 취한다는 점에서, 이분법적 성역할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의 타파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잘못은 이분법적 성역할을 바탕으로 여장을 희화화하는 전통적 사회의 호모소셜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비수술 트랜스여성이 ‘여성적’ 기표마저 취하지 않는다면, TERF는 전통적 사회에서와 같이 그들을 그냥 남성으로 취급하여 더욱 배척할 가능성이 높다. 생물학적∙심리학적인 젠더 디스포리아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이 이해될 여지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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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에서 보듯 트랜스여성, 나아가 퀴어 전반에 대한 TERF의 문제제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일차적으로는 여성성의 공간에 침투하여 불안을 일으키는 남성성에 대한 경계이며, 보다 심층에서 그러한 직관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작용하는 개인의 생물학적∙심리학적인 측면을 간과하고 오로지 정치적∙사회적인 것으로 무한히 환원하는 사고 방식이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있어 ‘후천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의지에 의해 선택된다’의 세 가지는 매우 다른 것이지만 TERF는 그 차이를 간과하고, 정체성을 찾기 위한 젠더수행에서 비롯될 수 있는 ‘정치적’ 문제성을 바탕으로 개인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한다.

  트랜스젠더의 젠더 디스포리아는 TERF에서 흔히 감정의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곤 한다.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는 것이니까 생물학적으로 ‘진짜’가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젠더 디스포리아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들을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물학과 심리학이 분명하게 작용하며, (설령 후천적일지라도) 오로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다르게 설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TERF는 생물학적 신체를 매우 중요시하며 선천적 피메일바디만이 ‘진짜 여성’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트랜스젠더를 배제할 때에는 그들의 생물학적 신체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문제성을 철저하게 간과하고, 그들이 문화적 상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와 관련된 정치적∙사회적 측면에만 집중한다. 이것은 모순적이다.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즘은 2세대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서 정치적 레즈비어니즘과 그 내용 및 주요 인물에 있어서 상당 부분 교집합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특징은 표면적으로는 남성성에 대한 경계, 심층적으로는 정체성의 ‘생물학적∙심리학적 측면의 부정’과 ‘정치성으로의 무한 환원’으로, 지금까지 언급한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즘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인간관계(특히 연애관계) 형성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부각하고자 한 것이지만, 레즈비언을 오직 정치적으로 선택 가능한 것처럼 환원함으로써 정작 그 존재를 지울 잠재성이 있다. 정치적 레즈비언이 대체로 레즈비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인 이러한 잠재적인 갈등선의 존재를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100% 의지에 의해 선택 가능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의 위험성은 우호적인 대상에 대해 그렇게 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적대적인 대상에 대해 그렇게 할 때에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TERF 계열에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그러면 나도 ㅇㅇ젠더겠네?’라고 조롱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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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을 갖는 TERF를 과연 ‘사이비’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TERF에 대한 이우창 선생님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TERF를 ‘사이비’ 페미니즘보다는 일종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TERF와 페미니즘의 관계는 사이비역사학과 역사학의 관계, 사이비과학과 과학의 관계와는 매우 다르다. 사이비과학은 학술적으로 실존하지 않는 갈등을 허구적으로 만들어 내어, 본인들이 엄연히 과학의 한 이론으로서 다른 과학 이론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거나, 심지어 그들의 권위로부터 부당한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TERF는 페미니즘과 퀴어 간에 엄연히 잠재하는 갈등선을 (바람직하지 않은) 특정한 방향으로 활용하여 페미니즘 내에서 역사적으로 발생하여 실질적으로 다른 페미니즘 분야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하나의 분파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담론 내의 정치적 실패에 의한 어떤 ‘징후’로 이해되어야 한다. 거시적 정치에서도 극우의 득세를 단순히 그들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존 질서의 실패로 보듯이 말이다.

  TERF를 ‘사이비’로 인식하는지 ‘극단주의’로 인식하는지에 따라, 그에 대한 대응은 굉장히 많이 달라진다. 후자를 택할 경우에, 우리는 TERF가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과학적, 사회학적으로 부정확한 이해에 근거하여 보편적 인권을 부정하는, 그러나 여전히 페미니즘의 한 분파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된다. 그래서 페미니즘에서는 TERF의 이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되, 오로지 TERF를 비판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에서 그러한 징후가 왜 나타났을지에 대해 (안티페미니즘 쪽에서 TERF를 핑계로 페미니즘 전체를 비판하기 이전에) 누구보다 먼저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3세대 페미니즘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연대’의 문제와 정확하게 동일한 문제로서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아예 적극적으로 퀴어에 대한 혐오를 생산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TERF는 물론 페미니즘 내에서 소수의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시스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퀴어 담론이 낯설 수 있고, 소위 ‘누구를 먼저 챙길지’와 관련된 이해관계에 있어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자체는 조금 더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맨 위에 언급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보듯이, 그러한 이유들에 의해 TERF가 정당화되는 듯한 최근의 모멘텀은 페미니즘과 퀴어에서 추구하는 보편적 인권의 확대와는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퀴어와 페미니즘은 결코 필연적으로 단일하게 합쳐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며, 쟁점의 가시화를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그 둘 사이에 모종의 갈등선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갈등선을 직시하되, 정체성을 가지고 실존하는 상대방을 보편인권의 담지체로 인정한 상태에서, 그 갈등선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소수자가 이전에 비해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태도 때문이 아닌가. 위와 같이 트랜스여성의 젠더수행이 이분법적 성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파할 가능성을 보는 것 등이 그 갈등선을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일 것이다. TERF와 같이, 그 갈등선을 이용해서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고 혐오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비단 페미니즘과 퀴어 사이에서뿐만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모든 사회 운동에서는 ‘누구를 먼저 챙기는지’의 문제가 어느 정도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러한 갈등 요소를 해소하고, 기존의 사회가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차이점을 바탕으로 서로의 정체성에 대한 존중과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공통점을 바탕으로 보편 인권을 향한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퀴어가 이론적 차원에서 단순한 접합을 넘어 완전히 융합되어야 마땅하다거나, 실천적 차원에서 필연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연대는 수많은 잠재적인 갈등선 위에서 세워지는 고도의 사회적인 상호작용이며, 그 본성상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보편 인권의 담지체로서의 상대방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아야 하며, 혐오와 폭력을 생산하는 행위를 지양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의 라잇온미 단톡방 사태로 대표되는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혐오 역시 당연히 비판되어야 하며,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도 연대를 해치고 불안감을 유발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언사를 적극적으로 지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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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하자면, TERF는 퀴어와 페미니즘 간에 잠재하고 있는 갈등선을 상호이해의 단초로 사용하지 않고 배제의 단초로 사용하여 상대방의 정체성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는 방향으로 활용한다. 갈등선은 이해관계에 따른 것으로 순전히 정치적인 것이나, 정체성은 순전히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개인의 생물학적∙심리학적인 측면과 관련되어 있는 무엇이다. 그러나 TERF는 이러한 정체성이 100% 사회적으로 구성되거나 혹은 의지적으로 조절 가능한 것인 양, ‘순전히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들의 혐오를 정당화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금언을 오독한 결과이다. 개인적인 것에는 정치적인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고, 우리는 철저히 그것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의 젠더정치를 해야 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생물학적∙심리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런 작업을 진행해야만 그것에 대한 정치∙사회적 담론이 극단주의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정치성 너머에 있는 것을 사유해야만 높은 수준의 정치성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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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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