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명상과학연구소 관련하여 진즉에 공개적으로 있었어야 할 논쟁이 최근 며칠 사이에 페북에서 활발히 이뤄지는 모양이다.
먼저 확실하게 전제해야 할 것이 있는데, 어떤 부문이든 만약 과학적 방법론을 결여한 채로 검증을 우회하여 과학의 외피를 취하려는 시도가 발견된다면 과학계의 자정능력을 통해 단호하게 거부를 해야할 테다.
이러한 전제의 작동은 무슨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정상과학의 데일리한 프로세스로, 과학의 영역 혹은 그 부근에서 지적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규범이다.
그런데 페북에 여러 교수님들이 퍼 와 주신 명상과학연구소 측 (혹은 소장 개인)의 자료들을 보면 명상 효과의 과학적 검증이라는 취지와는 달리 종교 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 조화, 자비 등을 과학적 용어정의 및 문제설정으로 포섭하지 않고 그대로 적극 채용하여 서술해둔 부분이 많다.
이에 대해, 아직은 한정적으로만 알려졌더라도 앞으로 과학적 원리가 더욱 많이 밝혀질 것이니까 비전을 작성해둔 것이라고 한다면? 종교 단어라는 이유로 편견을 갖지 말고 지켜봐 달라고 한다면? 애석하지만 그런 말들은 이미 너무 여러 번, 너무 여러 곳으로부터 들었다.
차라리 그런 특정 종교색이 지나치게 강한, (과학의 맥락에서) 막연하게 들리는 어휘들은 잠시 접어두고 현재 자원을 투입해서 풀고 있는 과학 문제들 위주로 소개하고 홍보한다면 더 믿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하간 이러한 정황들로 인해 나는 인간 정신의 비일상적 영역에 대한 과학적 해명과 다채로운 활용을 매우 기대하면서도, 현재의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에 대해서는 본질상 흥미롭지만 아슬아슬한 기획인데 반해 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다소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어, 기본적으로 우려하는 입장임을 미리 밝혀둔다.
명상이라는 특수한 정신상태와 그 긍정적 효과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보고되고 이에 대한 연구가 다수 진행되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실 남의 분야라 자세히는 모르나 그렇다길래 그렇구나 한다).
나는 물질세계와 분리된 신비한 정신적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이란 지극히 복잡한 물질들의 작용의 산물로 주관에 표상되는 것으로서 물질계와 수반적인 관계만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영역을 상정하는 것보다는 가급적이면 성공적으로 검증되어온 기계론적 세계관 하에서의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설명을 유지하는 것이 더 받아들일만 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계론적 세계관은 과학 이해와 궁합이 좋을 뿐 실제 개별 과학활동을 하는 데의 필수 요건은 아니고, 그런거 없이도 지장없이 잘 연구하기도 하다 보니 이런 얘기가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므로 여담 정도로 해두기로 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있는 정신현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한 비물질적 세계를 표상해내어 그러한 현상의 해석에 동원하게끔 하는 듯한데, 이를 광의의 과학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상술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고수하더라도 퍽 흥미로운 일이다. 특정 종교에서 유래되어 그쪽에서 주로 이야기가 되어왔을지라도 인간 정신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여 긍정적 체험을 제공할 가능성, 그리고 꼭 신비한 비물질적 영역을 전제하지 않고 담백하게 설명될 가능성도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명상의 과학화를 추구하는 많은 심리학적, 인지과학적 연구들은 위에 말한 전제를 인지하여 조심스럽고 담백하게 진행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이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입장, 그리고 혹시 모를 종교부문의 부당한 과학침투를 적극 막고자 하는 입장에서도 이러한 연구들과 그 검증에 더욱 활발히 참여를 해주었으면 한다.
아무튼 명상의 과학화를 염두한 개별 연구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열린 태도의 비판적 검토가 잘 작동한다고 전제하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정말로 잘 작동한다고 확신해서라기보다는 그러한 전제 없이는 이하의 논의들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사실 서론이고, 이러한 과학연구의 개별 내용 자체에 대한 평가의 이면에 있는 좀 다른 논점으로 넘어가보자. 과학지식의 생산방식, 그리고 그것이 추진되는 동기 등과 관련한 '사회구성적 계기'를 논쟁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사회구성적 관점은 각 부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서도 바깥에서 대충 평할 수 있는 만능키 같은 것이기도 해서 굉장한 자제심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능히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오랜만에 꺼내본다.
나는 아직 펀딩을 직접 따 보거나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수행하는 입장이 못 되고, 복잡한 거대 실험과학이나 IRB 필요한 생물과학이 아닌 순수 이론과학의 말단에서 첫 발을 뗀 후보생인데다, 페북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계정은 아니다보니 오히려 약간 더 발언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이라 사견을 보태 볼 수 있는 부분들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우선 기금 출연을 해주시는 높으신 분의 의지(혹은 사립대학의 경우 대학 재단 소유자)에 의해서 다소간에 튀는 전공이나 연구기관이 설립되는 것은 국내의 수많은 대학교는 물론이고, 이름난 해외 명문대학에서도 아주 없는 일은 아닌듯하다.
그리고 서양권 종합대학들은 종교학의 연구 대상에 가까운 직업 종교인 당사자들이 직접 종교학전공에 있으면서 영성을 탐구하고 학위 하는 것에 대해 더욱 관대하고 긍정적인 경향이 있어보이기도 한다 (혹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여기에 결합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해보는 것은 지나친 태도일까).
조심스럽지만 서구 백인 인텔리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학계에서, 다른 인간집단을 지나치게 이국적인 연구 대상으로만 대해 온 것에 대한 반성적 경향 때문에 비교적 폭넓게 그런 것들을 열어두는 것 같다. 다양성을 찾아나가면서 지적 전통을 혁신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아카데미의 지식생산 규범을 비판적으로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럴때에 비로소 따뜻하고 열려있는 보편성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돌아와서, 카이스트 경우에는 SK 일가의 부회장 급의 의지에 의해 명상과학 연구소가 처음 추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걸 보면 좀더 구조가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기금을 출연하는 측의 개인적 관심분야에 학교 측이 맞춰 드리면서 제너럴한 과학기술과 관련된 지원도 받고, 그러면서도 그 특정 관심분야 내에서도 가급적 학적 엄밀성을 잃지 않고 의미있는 연구성과가 나오도록 학자들이 이끌고 가는 것은 잘 된다면야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후원은 과학사에서도 상당히 흔했을 것이다.
물론 현대국가에서의 거대과학은 주로 왕이나 귀족의 개인적 관심사가 아니라 민주적 합의에 의해 정부가 주도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후원자' 모델은 과거의 것으로서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기초과학에 투자할수 있는 규모와 방식은 한계가 있으며 (심지어 한국은 그 집행방식이 늘 논란일지언정 R&D 예산의 총량 자체는 이미 많다고 알려져있기도 하고) 민주적 합의에 의해 과학기술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도 어쩔수 없다. 그러므로 민간의 자본에 의한 후원으로 당장에 돈이 안되는 과학기술연구가 진흥되는 것은 상당히 고마운 일이다.
다만 그러한 후원이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진실성, 그리고 과학기술 연구 비용이 국민들 앞에 정당화되기 위한 공공성이라는 가치에 적절히 복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후원자가 자신의 사적, 궁극적 동기보다는 아카데미의 솔리드한 강령 하에서 과학자들이 자율적으로 생산하는 성과를 더 우선시하고 재미있어해야 한다는, 일종의 '쿨함'을 통해 구현되는 책임성 또한 필요하다.
이런 관점들을 종합해 봤을때, 명상의 과학화를 추구하는 명상과학연구소의 초대 연구소장이 과학자가 아닌 직업 종교인인 점은 내게 의구심을 크게 더해주는 부분이었다 (물론 과학기술부문은 아니지만 학위가 있는 분인것은 맞다).
개인적으로는 명상의 과학화라기보다는 명상의 과학적 검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은데, 전자는 종교에서 유래된 개념들의 과학영역으로의 편입 시도가 다소간에 무비판적으로 일어날 경우에 이를 예방하기 어려워 보여서다. 물론 단어가 본질이 아닐순 있다.
이러한 편입은 단순히 내용적인 것뿐만 아니라 과학활동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통합 내지는 전이를 포함하며 이는 여러 사람들의 이익과도 관련되어 있다. 위의 '당장에 돈이 안되는'이라는 표현과 굳이 비교해보자면,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한테 당장에 돈이 되는 방식으로 이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비판적 관심이 끊기는 순간 엄격한 과학적 태도를 결여하게 되는 것은 금방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종교에서 유래된 개념을 심리학적, 인지과학적으로 해명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우나, 근본적으로 아슬아슬한 동거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심리학적으로 연구가 되고 있는 현상일지라도 종교에서 유래되었고 현재적으로도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한국에서 현실적인 종교권력이 부당하게 과학계에 침투하거나 그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고자 했던 과거 주요사례들의 트라우마도 고려되어야 한다.
비판적 검토를 포함한 종합적인 관심이 끊기지 않을 때 건강한 지적 생태계가 구성될수 있고 이를 위해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는, 그리고 다른 모든 연구기관들은 오히려 더욱 꾸준한 화제와 관심을 받아야 한다. 나도 미약하게나마 앞으로 그러한 종합적 관심에 꾸준히 참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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