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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9일 목요일

삶, 기록, 의미... 그리고 재조직화하는 흐름으로서의 인간

람들 혹은 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의해 회고되는 위대하거나 소소한 성취들을 보면서, 매우 최근까지도 implicit하게 가지고 있던 어떤 사고방식이 있다. 대략 언어화해 보자면, 아무리 즐거운 기억, 아무리 훌륭한 성취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다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생각, 혹은 조금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훌륭하고 즐거운 사건들은 오직 기록되기 위해서 기획되고 전개되는 것일 거라는 정도의 생각이다.


몇 달 전에 내 사고방식의 그런 부분을 명시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마침 내 흘러간 과거의 개인 자료들을 보게 되는 등, 거의 동시에 일어난 몇 가지 우연한 계기 때문에 최근에 생각이 크게 바뀌고 있다. 시간 눈금을 조금 길게 잡아서 보면 그런 기록물들과 현재의 우리와의 관계는 생각보다 금방 단절되는 감이 있다. 사람들과 함께하며 어떤 활동을 함께한 기억은 그 사람들을 만나거나 상기할 때 거의 즉각적으로 호출될 수 있고, 심지어는 축적된 경험으로서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면서 개인과 세계에 영향을 주는데, 이런 기억과 경험들이야말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원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기억과 경험들 및 그 영향도 당연히 영속하지는 않고, 지속시간으로만 따지면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과 별반 다르지 않거나 더 짧을 수 있다. 하지만 요지는 영속성이 아니라, 그 충만함의 정도와 양태가 많이 다르고, 둘 중에서 전자가 인간에게 있어서 '의미'라는 부분에 더 많이, 더 직접적으로 닿아 있지 않은가 하는 것.

위대하거나 소소한 성취들과 사건들의 경우에도, 그 기록이 아주 적거나 아주 많거나 상관없이, 현장에 참여하지 않은 채로 기록된 내용들만 보아서는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비텍스트적인 면모들도 많다. 바로 그 공간, 바로 그 시간에 있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고, 심지어 바로 그 시공간에 있었더라도 거기에서 발생한 사건을 나의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와 사회성의 많은 부분을 열정적으로 쏟아부어서 충실하게 체험하고 의미화하지 않았다면 재현해내고 공유하고 집단적으로 향유하기 어려운 그런 것들.


인간 활동의 응집력은 그 활동에 관여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지면서 생각보다 금방 흩어지게 마련인데, 그 활동들이 의미가 되고 영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기록보다는 이런 식으로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의식적 기억,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경험들이 아닌가. 물론 나는 성향상 그런 참여에 충실하지 못하고 기록 위주로 생각하고 간접 경험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을 굳이 돌아돌아 생각까지 해야 알 수 있는 거고.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꾸만 '저장', 그리고 '처리와 재조직화'라는 두 키워드를 대조하는 방식으로 생각이 전개되게 된다. 인간의 정신은 정보를 단순히 쌓아둘 수도 있지만 정보를 예쁘고 유용하게 처리하고 가공해서 흘려보내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마저 재조직화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어떤 형식인데 이러한 처리 능력이 그저 인간의 기능적인 부분에 그치는 대신 유희적이고 감상적인 부분, 인격을 형성하는 부분에까지 심원하게 닿아 있고 (물론 내용을 단순히 저장하는 기능도 정보처리에 따른 side effect로서 개인과 세계에게 매우 중요하긴 할테다), 그로 인해 위와 같은 일이 생기는 듯하다.

심지어 '저장'이 아닌 '처리와 재조직화'라는 이러한 인간 역량은, 수많은 사람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와중에 문명 전체를 관통하면서 흐르는 어떤 기능일 수도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그 무엇도 명시적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버려지더라도 그러한 내용들을 처리하고 재조직화하는 형식의 작동을 통해 그 형식 자체가 발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발전한 형식이 존재하는 한 그 모든 사라진 내용들, 혹은 발견되기 어렵게 가라앉아 있는 내용들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고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문명사적 차원에서도 유효한 것 같다. 너무 거창한 예시지만 언어들의 초기 역사 중에서는 절대로 알수 없게 돼버린 것들도 많을텐데 그 과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나.

암튼 이게 나로서는 꽤 충격적인 생각의 전환이라 지난 6월쯤에 며칠간 실제로 멍함을 느낄 정도였는데, 그 며칠 동안 들었던 생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와 같이 글로 적을 수 있을 정도로 꽤나 명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멍하던 상태는 이런 생각을 계속 상기해보더라도 다시 재생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별로 쾌적한 상태도 아니고, 이런 생각과 상관없이 그냥 컨디션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때 하필 왜 이런 생각이 들게 됐는지, 그러한 기분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너무 깊게 회고하거나 분석하려 들지 말고, 내 마인드도 이런 생각을 처리하면서 어떻게든 재조직화되었을 테니 그대로 놔두고 활용하는 게 더 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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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9일 금요일

지중해의 휴양지, 코르시카 꺄흐제즈(Cargèse) 여름 학교에 가다!

여기에 와서 유럽 학생들이랑 어울리겠다고 처음으로 WhatsApp이랑 PayPal을 다 깔아봤다.
지금 참석 중인 Summer School은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에 있는 Cargèse라는 마을에서 열리고 있다. 교과서적 프랑스어 발음으로 말하자면 꺄흐제즈 정도일 텐데 여기 사람들은 그냥 카르제스 정도로 부른다. 코르시카의 최대도시인 아작시오(Ajaccio)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산악지대 풍경을 보면서 굽이굽이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오면 도착한다.

여긴 통신이 잘 안 터질 때가 많고 에어컨이랑 찬 음료가 없어서 좀 지치긴 한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와 제로콜라가 그립다... 내가 있는곳은 숙소 겸 학회장소 (IESC, Institut d'Études Scientifiques de Cargèse) 인데, 주변엔 아무것도 없고 정말 이 시설뿐이다. 손전등 들고 30분 정도 산길을 걸으면 상점과 식당이 있는 중심가가 있어서 저녁은 거기서 먹는다. 거기도 말이 중심가지 인구가 13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살면서 와 본 모든 곳 중 제일 외진 듯.

물론 멋진 점이 훨씬 많아서, 위와 같은 약간의 불편함들도 낭만으로 느껴진다. 밤이 되면 수많은 별들이랑 심지어 은하수까지 흐릿하게나마 보일 정도로 하늘이 깨끗하고 (12일 밤에는 페르세우스 유성우도 떨어진다고 해서 무척 기대 중이다), 이 일대에 말 그대로 우리밖에 없다 보니, 바닷가가 꽤 넓은데도 굉장히 프라이빗하고 깨끗하다. 엄청 오랜만에 사람들과 어울려서 해수욕 해 봤다. 그리고 빌리지가 멀다보니 아침 점심은 다 숙소에서 해결하는데 메인메뉴 작은 거 하나에 과일, 요거트, 빵 정도라서 뭔가 살 빠지고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더워서 숙소 창문은 활짝 열고 자는데, 바닷가 + 산골인데도 곤충이나 뱀이 안 들어오는 것도 신기하다. 섬 자체에 뱀은 좀 있긴 하지만 독사는 없다고 한다. 밤길에 보면 도마뱀이랑 박쥐는 있다.

그렇다면 왜 스쿨을 이 곳에서 하는가? 이 스쿨은 나도 무척 관심 많은 곳인 룩셈부르크 대학의 통계물리, 생물물리 그룹들에서 주최하는 것인데, 코르시카가 약간 유럽인들에게는 제주도 포지션이라 그쪽 교수님들이 휴양 겸해서 하려고 여기로 잡은 것 같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뿐만이 아니라 이 IESC라는 곳 자체가 1960년대에 출범해서 그때부터 이런 학회를 꾸준히 호스팅해온 근본있는 시설이라고 한다.

특히 이론물리학자 헤라르뒤스 엇호프트(Gerardus t'Hooft, 아직도 살아 계시고 작년인가에 한국이 주최하는 워크숍에서도 강연하심)가 이휘소 박사님의 강연을 듣고 영감을 받아 후일에 노벨상을 받게 되는 업적을 이룬 게 다름이 아니라 여기 카르제스 스쿨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여기 시설에 뭔가 연혁이 써 있거나 흔적이 있거나 하지는 않던데, 그래도 그런 역사가 일어난 곳이라고 하니 반갑고 뜻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21일에 한국 돌아가자마자 삼척에서 invited talk 하는 게 있어서 맘 편히 있지는 못하고 그것도 틈틈이 준비 해야 되기는 하지만, 다시 오기 힘든 좋은 곳인만큼 스쿨 참여도, 휴양도 즐겁게 한 뒤에 귀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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