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머리를 짧게 했다고 해고되었다는 뉴스와, 머리를 짧게 했다고 린치를 당했다는 뉴스를 거의 동시에 보았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는 환경에서 페미니즘을 향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식의 말들이 어떻게 기만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싸움의 원인은 도대체 누구의 어떤 말들에 의해서, 누구의 어떤 행동들에 의해서 제공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오지랖의 문제이다. 정치적 의도를 논하기 이전에 여성이 머리를 짧게 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개인의 자기표현일진대, 그것을 공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면 안 된다. 그 공격이 바로 여성이 머리를 짧게 함으로써 페미니즘을 표방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핵심적으로 비춰져야 하는 지점은 명백하게 젠더폭력의 문제가 된다. 후자가 핵심이므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되 전자의 측면도 조명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탈코르셋이 교조주의적으로 흐를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최근에 많다. 나 역시 탈코르셋 운동이 가진 여러 함의 중 '기존 질서에 복무하는 특정한 상징의 철폐'라는 함의가 강화되고 '상징의 채택에 있어 간섭받지 않음'이라는 함의가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목소리에 동감하는 면도 없지 않다. 개별 상징 자체의 철폐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징이든지 일방적으로 소비해 버리는 기존의 시선을 파괴하는 것이 더 궁극적인 목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결은 이 문제에서 상관없다. 어찌되든 저런 논의는 우선 맨 처음에 제시한, 사람을 해고하거나 때리고 심지어 죽이면서 삶의 조건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젠더폭력이 제거되고 난 뒤의 문제이다. 단순히 시간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인식상의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해야겠다. 저런 거대한 문제가 계속되는 한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교조주의를 둘러싸고 편갈라 토론하면서 충분히 세세하게 성찰할 만한 여력이 없게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것은 교조주의를 정당화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조주의를 경계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런 교조주의의 발흥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단순히 그 과격한 모습을 비판하고 그 모습에서 눈을 돌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과격함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더 과격하지만 더 은밀한 것이 마치 당연한 듯이 자리잡아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자신과 그 주변, 나아가 사회의 폭력적인 인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돌아보면서 싸워낼 필요가 있다. 어떤 문제이건간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착하기를 잠시 중단하고 일상을 투쟁화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페미니즘적 실천과 참여라고 불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페미니즘'은 틀렸고 '진정한 페미니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래서 잘못되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일관되게 주장해 온 바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커다랗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미시적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만의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사람들 각자가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삶의 일정 부분 이상을 이 문제에 개입시키고 있을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과격한 태도를 중단하고 조곤조곤 설득해서 '선뜻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오히려 과격한 태도를 유지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역시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를 직장에서 해고하거나 린치를 하는(그리고 그것에서 젠더폭력의 맥락을 애써 지우는) 사람들을 상대로는 말이다. 특정한 언어표현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같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남이 페미니즘을 표방하건 말건, 머리를 짧게 하건 말건 해고하거나 린치하지 말자는 기본적인 문제 정도는 그런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시민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와, 시민적 합의를 달성하기 위해 일단 상대방을 시민 취급 좀 하라는 문제는 다르지 않나. 물론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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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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