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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4일 금요일

아닌 건 아닌 거다: 무리한 자기정당화를 경계하며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과학지식(처럼 보이는 것)의 이름을 빌려서 차별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그러면서도 진지한 목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종국에는 모든 걸 진보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로 귀결시키는 우파세력의 행태를 비판해 왔다. 나 역시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미약하게나마 지적해 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러던 이들이 정작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자 본질적으로 정확히 똑같은 종류의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 보인 현장은 참으로 희극적이다. 손아람 작가가 페이스북에 최근에 쓴 글이 댓글로 많은 지적을 받자, 그 글을 즐겁고 유쾌하게 읽었던 많은 사람들이 손 작가에 대한 옹호에 나선 그 현장에 대한 이야기다(손작가님 Facebook 게시물 링크).
그들은 과학지식(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주장의 확고하고 든든한 근거로 쓰이기를 바라며 직접 인용하거나, 혹은 '그 인용이 사실 이런 의미였지 않겠냐'라고 애써 선해하여 정당화하면서, 정작 그러한 옹호가 무리한 것임이 드러날 때에는 '웃고 넘기면 되는 주장인데 왜 달려드느냐'며, 순식간에 그 지식들을 그냥 편한 대로 쓰다가 버리면 되는 썰풀이 소재 정도로 전락시키기도 하는 모순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옹호자들의 상당수는 손 작가의 글에 대한 비판자들이 '버튼 눌려서'(트리거가 걸려서) 부들부들하는 상태에 있으며, 자신들의 태도는 이와 반대로 맥락과 의도를 읽을 줄 아는 합리적인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이 그 글을 유익하게 읽었다는 이유로, 글 속의 문제적인 대목들을 억지스럽게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그네를 학습하는 유전 알고리즘을 '문화의 유전'과 결부짓는 주장을 포함하여) 그들이 실제로 '과학적'이라고 여기는 주장들뿐 아니라, 흔히 반 농담조로 '사이언스'라고 불리는, 일상에서 도출한 귀납적 결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손 작가의 골상학 언급은, 최근에 남성 연예인 성범죄 연쇄보도 이후로 유행하는 '역시 관상은 사이언스다'라는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일종의 유머 내지는 수사로 이해하자고 옹호되었다.
그러나 정작 손 작가 자신이 쓴 댓글들에는 단순히 재치있는 수사에 대한 것으로 보기에는 그 무게감이 심히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진지한 변호가 들어 있다(심지어 손 작가는, 자기 자신은 진화론을 지지하고 진화를 이해하고 있으나 비판자는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완전히 거꾸로 된 생각마저 내비치면서 비판자를 '창조론자'라고 비꼬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아슬아슬한 희화화의 수사들은 만약 탁월하게 구사될 경우 전복적인 언어구사로서 결집을 돕는 강력한 힘을 갖지만, 이런 식으로 한 번 진지하게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힘을 잃게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손 작가의 옹호자들은 그가 한국인들의 전형적 외모 등을 희화화하며 언급한 대목에 대해서도, 그 역시 한국인이므로 당사자인데 무엇이 문제냐며, 유머러스한 서술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레이시즘적 계기로 연결될 여지를 애써 차단하기도 한다. 물론 한국인의 특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외국인이라는 타자를 적극적으로 상정하여 한국인과 비교하는 레이시즘적인 계기가 직접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표준 동양계 서양시민', '문화적 교정' 등의 표현은 만약 우파진영 스피커에 의해서 나왔다면 가히 우리를 아연실색케 할 만한 표현으로, 그 타겟이 내집단인지 외집단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포비아적 뉘앙스로 얼마든지 읽힐 수 있다.
정리하자면, 옹호자들의 위와 같은 태도는 '어쨌든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면 되지 않느냐', '재미있지 않느냐'라는 생각으로부터 오는 지적 안이함, '나는 재밌게 읽었는데 반응이 왜 이렇지'라는 심리적 당혹감, 그리고 '적들이 꼬투리를 잡아서 욕하는 상황을 모면하도록 돕겠다'는 사회적 정의감이 결합해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비판적 독해를 잠깐 접어두고 애써 선해해야만 간신히 옹호가 가능한 대목, 적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만한 대목이라면 그냥 애초부터 글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던 것 아닐까? 그런 대목들이 비유 내지는 수사일 뿐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면 되었던 것 아닐까? 그 대목들에 대한 무리한 옹호를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유머일 뿐이지 않느냐고 일축하는 분열적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정의감을 잠시 유보하고 당혹감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지적 안이함을 비껴가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비록 이 상황이 온전히 손 작가가 의도하고 통제한 범위 내에서 벌어진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스스로도 약간의 당혹감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논쟁을 만들어내어 페북 상의 수많은 네임드 분들을 '참전'시킨 손아람 작가의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뛰어나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글 속에 세부적인 결을 많이 설정해 놓음으로써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무언가 논평을 할 여지를 잔뜩 제공하는 글을 쓰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글에 무리한 주장들이 있었다면(실제로 '골상학'을 언급한 대목은 지적이 있자 수정하셨다), 그러한 지적들에 대해서는 비꼬지 않고 책임 있게 대응하여야 마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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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으로부터 포착되는 정신세계

  단지 깨어났을 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가끔가다 꾸는 내 꿈들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등장하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 일이 별로 없고, 스스로가 가진 건축적 구조를 통해 내 행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말없이 조건짓는 '공간'들이 부각되어 등장하는 편이다.

  보다 자세히 묘사하자면, 내 꿈에서는 현실에서 경험한 공간들 중 인상에 남은 공간들이 상당히 웅장하게 과장되어, 그리고 때로는 서로 조합되어 등장한다. 그런 공간들 중 특히 자주 등장하는 것들로는, 긴 복도에 작은 공간들이 나뭇잎처럼 달려 있는 전형적인 학교 형태의 공간, 롯데월드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 틀림없는 거대한 실내 놀이공원, (어릴 때 자주 갔던 다양한 콘셉트를 갖춘 찜질방의 이미지가 반영된 듯한) 깊이 들어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테마들을 보여주는 모험적인 선형적 공간, (중고등학교 때 다녔던 학원 건물들의 구조에 대한 표상으로 추정되는) 좁은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수직적으로 연결된 각기 다른 테마의 공간들, 건축 자재와 제어설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복잡한 환승 구조를 가진 지하철역 등이 있다.

  이런 꿈 속 공간들에 대한 매우 신기한 점은, 이들이 몇 개월 혹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어떠한 예고도 없이 꿈 속에 계속 재등장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 각각의 공간들이 현실 세계로부터 떨어진 어딘가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크게 변하지 않은 구조를 가진 채 말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명시적 의도와는 상관 없이 형성되는, '정신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어떤 형태로든지 분명히 있긴 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러한 '정신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지, 그리고 단순히 꿈 속에서 갑작스레 일방적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탐사하면서 시험하고, 나아가 특정 목적으로 활용해 볼 방법은 없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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