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청와대 SNS에 '어르신 짤' 양식으로 예산안 홍보물이 게시된 것을 보고 단순히 키치적 유행에의 때늦은 영합인 줄 알았는데, 청와대 공식 유튜브에 따르면 이는 실제 그 밈의 유래가 된 방식으로 어르신들이 복지관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외형적으로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문화적 산물들도 그 생산의 과정이 다름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맥락으로 수용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배경 일화는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대중적인 것, 사적인 것, 공적인 것이 이 일화에서 서로 묘하게 겹쳐서 드러나므로 종합적으로 사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 짤' 밈은 그것과 외형상 비슷하면서도 결이 상당히 다른 '망한 PPT 밈'과 함께, 키치적 유행 중에서도 특히 실패하기 쉬운 종류에 속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에는 어김없이 권력 혹은 권위의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만약에 위와 같은 배경을 몰랐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간주할 수밖에 없듯이, 어르신 짤 밈에 SNS 담당자가 단순히 영합하였을 뿐이라고 (잘못) 가정해 보자. 키치적인 것 중에서는 공적 권위에 의해 추인됨으로써 더욱 빛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는데 그러할 경우는 전형적인 후자의 사례로써 사람들에게 실소를 유발할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실패는 공적 권위의 최종 심급에 위치한 청와대에 의한 것이므로 한국 내에서 원리적으로 가장 강력한(...) 실패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아래 링크된 기사에서 보듯, 실제로는 달랐다. 일단 청와대 홍보 담당자가 이러한 '어르신 짤'들이 밈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채로 기획을 했다는 것을 전제하자. 그렇다면 이러한 기획은 공적 권위라는 측면에서 끝판왕 급인 청와대 스스로가 그러한 유행의 원조를 추적하여, 사실은 그러한 키치적 유행의 원조는 임의의 대중이 아니라 특정한 프로그램들에 있는 것이었고, 그것도 다른 게 아니라 어르신들 대상의 복지 프로그램이라는 지극히 공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아우라를 귀환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복지관 현장에서의 생산 행위와 결부된 아우라가 귀환할 때, 복지관으로 대표되는 복지 제도를 유지하고, 또한 그러한 제도를 홍보할 수 있는 정부라는 공적 주체의 거대한 힘에 대한 인식 역시 은은하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논할 점은 결국 위 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도출되는, 궁극적인 구분 가능성의 문제이다. 위에서 전제하였듯이 밈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인지한 채로 진행된 것이라면 결국 키치적 유행을 공적 권위에 의해 전유하는 점은 다를 바 없는데, 그 유행의 근원이 사실 공적인 것에 있었다는 점에 의해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해진 것뿐이다. 과연 대중적 유행에 맞서 있는 모멘트로서 아우라를 복귀시킨 행위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공적인 것들도 사실 처음에는 사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했다는, 언뜻 잊기 쉬운 사실에 대해 세밀하게 살펴봐야한다.
나는 어르신들이 짤을 만들면 자동으로 이러한 양식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사들의 강의 내용, 축적된 샘플, 그리고 어르신들의 성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러한 양식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는 체계가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식은 따지고 보면 결국 '우연히' 공적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 어디까지나 '특정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식별하기 쉬운 이러한 양식의 존재를 통해, 결국 공적 권위라는 것은 처음부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이고 특정한 무엇인가가 공적 권위에 의해 선택되어 제도의 틀 속에 편입되는 데 성공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선택행위는 홍보 담당자의 홍보 방식 선택행위와도 겹쳐 보인다. 권위에 의한 선택에 따라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으로 추인되는 사태가 한 번은 공적 권위의 말단인 복지관 현장에서, 한 번은 공적 권위의 최종 심급인 청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중화된 구조인 것이다.
공적 영역은 언뜻 생각했을 때 '상징'이라는 키워드와 거리가 멀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는 않다. 특히 청와대 정도 되면 모든 활동 하나하나에 타의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므로, 상징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많은 상징들을 자의적으로 스스로의 내부에 포섭함으로써 적재적소에 메시지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공적 가치일 수도 있다. 현대 국가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권력에게 기대하거나 권력이 자처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감하지만 그것은 의례 행위 그 자체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안 된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며, 의례에 활용되는 양식의 선택과 공적 영역으로의 포섭 과정이 사실 수많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문제의식의 총화와도 같음을 고려할 때 권력이란 어떤 면에서 여전히 현대에도 어느 정도 제사장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