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몇 번 썼듯이, 현재 대통령은 경제사안이나 국제문제 등에 대해 본인의 사적인 (즉 공식적 보좌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을 선명하게 가져가는 타입인 것으로 보이며,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이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출발언이나 실언이 많은 편이다.
대통령이 UAE를 방문 중이라는 상황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란이 UAE의 적이라고 강하게 규정하는 발언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상상은 해 볼 수 있다. 아마 시아파-수니파 차이를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고, 이란이 북한처럼 국제무대에서 공인된 소위 '악의 축'이므로, 북한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 상황과 관련지어서 얘기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상세는 발언자인 대통령이 직접 밝히지 않는 한 불명이다.
대통령은 외교무대에서 상징성을 갖는 행동들과 적절한 의례를 수행한다. 이를 위해 맥락에 맞는 자료와 적절한 보좌를 제공받아, 각각의 상황에서 기대되는 내용을 준비해서 발언하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이다. 물론 즉흥적인 쇼맨십이나 임기응변도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번 발언은 국제무대에서 흔히 나오는 종류의 발언이 아니기에 모종의 합리적 의도가 추론되지 않고 불안감을 조성하게 되며, 전형적인 윤 대통령 특유의 사적 신념에 따른 돌출발언에 해당하는듯하다.
여러 후속보도들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UAE와 이란은 비록 삐걱삐걱하지만 최근에 잘 지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관계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란이 UAE의 '적'이라는 단정적 발언은 일단 사실 자체로 틀렸을 뿐더러, 모종의 합리적 의도를 추론해 내기 힘든 기괴한 발언이다. 아시아대륙 반대편 나라의 수장이, 두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고 서로 '싸움 붙이는(?)' 발언을 대체 왜 한단 말인가?
여러가지 외교 실언 논란의 전례에 비추어봤을때도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의 돌출적 발언임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돌출적 발언이 한국 주도의 외교 새판짜기가 아니라 오히려 해명을 계속해야 하는 곤혹스런 상황으로 이어진것으로 보아, 스트롱맨 타입의 지도자들이 종종 하는 의도된 강경발언이라기보다는 단순 실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솔직한 해명을 하는것이 제일 깔끔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정치인들의 무리한 옹호가 오히려 사태를 더 키워서 상황을 더 어렵게 꼬아 놓는 듯하다. 그중에서도 아예 대놓고 거짓말인, '이란과의 관계에 대해 대통령은 언급하지 않았다' 같은 무마용 발언은 그렇다고 치자. 오히려 더 걱정되는 것은 지나치게 거창한 옹호들이다.
특히 한국-이란 관계, 나아가 국제 무대에서 이란의 위치 등을 언급하는 큼직큼직한 발언들이 교통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여러 한국 정치인들에게서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는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으로 보인다.
이란의 인권탄압국이자 테러지원국이라는 면모를 무시하자거나, 이란은 한국한테 중요한 나라니까 쩔쩔매자거나 하는게 당연히 아니다 (위의 '거창한 옹호자'들이 주로 저렇게 매도한다). 외교현장에서 일반적으로 발화되지 않는 종류의 발언이 나왔으니 그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란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국제무대 전체가 지켜보는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포인트를 짚자면, 이란에도 적절한 정보와 판단능력을 갖춘 외교 전문가들이 없지 않을 테니, 이번 발언이 단순히 우리 대통령 개인의 돌출적 실언인지, 아니면 양국관계 규정의 근본적 변화를 시사하기 위해 의도된 외교적 사건인지 정도는 구분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다른 어떤 웬만한 나라도 마찬가지다. 낸시 펠로시 패싱 사건 때 결례의 수준이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이 그냥 넘어간 것은 당시 사건이 철저하게 의도된 결례가 아니라, 정권이 메시지를 적절한 수준으로 잘 조직해서 발신하는 데에 서툴러서 일어난 사고에 불과(?)하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유지하는것이 우선이므로, 한국정부의 당시 외교 의전 역량 부족을 굳이 들춰내서 언급할 이유가 없으니 모른척 연기하는 것이다.
이란은 반미 국가이고 심지어 한국의 적인 북한을 지원한다고 단골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나라인데도, 경제 교류가 있어서 그런지 신기하게도 한국-이란 양국은 노골적 외교 갈등을 피하고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가 국제정세 변화와 대이란 제재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요즈음, 우리 대통령의 실언은 이란 쪽에서 꺼낼수 있는 하나의 좋은 '패'가 된다. 그쪽이 뭔가 수틀리면, 돌출발언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모른 체하고 유리하게 이용할 수가 있다. 당장 사건 직후에 해명하라고 압박하거나 대사를 초치한 것도 넓게 보면 그 일환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위와 같은 발언이 돌출발언에 불과했다는 점을 우리 정치권 스스로도 인정을 못 해 버리면, 그건 이란이 사용하는 '패'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므로 결국 상대방 좋은 일만 해주는 셈이다.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한 한국정치권의 외교역량에 대해 국제 사회의 의구심이 발생할 수 있어 보인다.
한편 이란은 어차피 빌런 같은 국가인데 왜 그들의 카드놀이 패에 대해 눈치를 봐야 하냐는 주장도 종종 보인다. 이 역시 위의 내용들로 충분히 반론이 되리라 본다. 그러한 주장은 대통령의 발언을 옹호하기 위한 임기응변으로서, 대통령의 당초 의도에도 없었을, 눈치를 안 보고 소신을 얘기하는 일종의 '강짜' 내지는 '사이다' 외교를 대통령이 수행한거라고 선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맥락상 어색할 뿐더러 한국이라는 나라의 기존 외교 행보, 그리고 품위와 체급에 맞지 않다. 또한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번 발언을 통해 한국이 얻는 것이 딱히 없고 계속 해명을 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만 처하게 되고 있으므로 그 효과 또한 의문이다.
국내 정치인들이 마치 대통령 발언의 무오류성을 수호하겠다는 일념을 내비치듯, 외교관계에 대한 민감한 발언들을 트럭단위로 쏟아내며 대통령 철통방어에 복무시키는 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이라고 하겠다. 외교에서 여러 예상치 못한 사건이야 늘 생길 테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여당의 외교적 역량은 실시간으로 시험대에 오르게 되며 이는 잠재적으로 각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수있는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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