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journals.aps.org/prx/abstract/10.1103/PhysRevX.12.0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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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1일 금요일
비평형 능동물질과 배트맨 리턴즈: When does locality help?
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물리, 그래픽스, AI 융합연구의 두 가지 방향
그래픽스나 컴퓨터비전 쪽을 physics-aware하게 하는 게 점점 중요해질 수 있어 보인다.
일단 이를 위한 첫번째 방법으로는, 오브젝트들을 생성하고 이동시켜주는 규칙을 최적화하기 위한 손실함수(loss function)를 잘 설계하고 이것으로 뉴럴 네트워크를 학습시켜서 '근사적으로' physics-aware하게 할 수도 있을테다. 즉 large scale 시스템을 일일이 시뮬레이션하지 않고 중요한 자유도만 살리면서도 올바른 윤곽을 흉내내게끔 하는것.
2023년 3월 11일 토요일
빛 감지 기관으로서 송과선의 기원, 그리고 통합된 감각질에 대한 상상
뇌에 있는 송과선 (소나무 열매 모양의 내분비선이라는 뜻인 듯) 은 호르몬을 통해서 밤낮에 맞는 신체 조건 조절(즉 circadian rhythm)을 담당하는 분비선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기관이 '두정안'이라고 하는 빛을 감지하는 기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인류에게서는 이 기관이 뇌의 일부로서 숨어들어가 있지만 일부 다른 생물들에서는 머리 바깥으로 나와 있고, 실제로 투명 혹은 반투명해서 빛을 감지하기 때문에 제3의 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수면 패턴이 빛과 관련이 있다는 것 자체야 평소에 많이 듣는 얘기기도 하고 뭐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그걸 담당하는 기관이 척추동물의 진화 초기에서는 아예 직접 밖에 나와 있는 채로 빛을 감지한다고 하니까 뭔가 신기하다.
그렇다면 두정안이 존재하는 생물들의 감각질(qualia)에서는, 수면 패턴에 따른 졸리거나 피곤한 감각이, 빛의 세기라는 시각적인 정보와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일까?
물론 제3의 눈이라는 다소간에 신비해 보이는 표현이 과연 적절할지는, 두정안에 연결된 신경이 뇌의 어디로 들어가는지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비록 빛을 감지하는 것일지라도 두 눈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전혀 다른 경로로 처리된다면, 시각정보와 통합되어 감각되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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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0일 금요일
모더니티, 페미니즘 그리고 보편성: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세간에서는 칸트 철학을 필두로 한 근대적 인식론이 오만한 근대성의 표상이자 답답한 합리주의의 전형처럼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중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탈근대적인 패러다임을 취하는 여러 철학 논문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것, 혹은 그렇게 해석하고 가능성을 탐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 미숙하게나마 내가 가진 철학적 견해이다.
성별에 따른 차이점을 부각하여 여성은 어떻다, 남성은 어떻다라고 규정하는 언어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차이점을 고정적인 것으로서 부각하여 상대방을 보편의 지위에서 탈락시키는 언행도 가능한 반면에, 차이점을 임시적으로 부각하여 보편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활용하는 언행도 가능하다. 차이와 보편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통해 우리의 지향점이 변증법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공통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미묘함은 논쟁이 평면화되는 과정에서 세밀하게 이해되기 어렵다. '왜 너는 이때는 같다고 하면서 이때는 다르다고 하냐'라면서, 상대편의 이기심과 비일관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사실 이 정도의 견해를 펼친 사람이 성별에 대한 각론에서 왜 ‘굳이 애써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위치시키는지 의문이다. 후대의 철학자 니체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도 당연히 초인(위버멘쉬)이 될 수 있다고 하면 되는 것을, 니체는 여성은 초인을 출산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취미판단은 쉽게 말해서, 'A는 B이다'라는 인식론적 판단 (지식) 과는 달리, 'A는 아름답다'라는 쾌/불쾌의 감정을 의미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은 객관적 외부 대상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 사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는 바로 감각 세계가 우리의 머리속 능력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그 중심에 있다.
칸트가 보기에 객관적으로 정당화된 지식이란,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온 잡다한 데이터가 직관의 형식 (시간적, 공간적 틀) 에 의해 정돈되고, 사고의 형식 (거칠게 말하자면, 논리적 능력) 에 의해 개념화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수학적, 물리학적 지식이 그 모범이다. 이렇게 얻어진 지식은 보편적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어떤가? 외부 세계는 기계론적이며 거기에는 어떤 의지나 목적이 예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이게 어떻게 하필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목적론적 사고를 가지게 된다.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한다.
이 때 우리의 인식 능력은 명료하고 객관적인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지는 못하지만, 무척 활발하고 다채롭게 작동한다. 아무것도 지식으로써 개념화되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필연적인 것이 있다고 느껴진다. 칸트가 보기에 이러한 취미판단은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설득의 가능성이 있는, 매우 특수한 사태이다. 이는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인식능력의 보편성을 신뢰하는 칸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자연을 보고, 혹은 아주 잘 만들어진 어떤 영화 같은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던 경험을 상기해 보면 칸트가 제시한 이러한 메커니즘(?)은 개인적으로 꽤 설득력있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매우 고전적인 설명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이에 동의되지 않는 이들도 많을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인식론적, 윤리학적 판단과 취미판단(미학)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선험적 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느냐의 문제로써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이들 각각을 합리성과 비합리성에 대응시켜 볼 수도 있다. 철학의 패러다임에서 주로 합리성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비합리성은 다소간에 격하되었던 반면, 인간 인식구조에 대한 해명을 바탕으로 미학이라는 영역을 노정하고자 했던 칸트에 이르러서 비합리성과 합리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통합적으로 이해될 길이 열린 것이다. 이 둘 모두를 받아들일 줄 알고, 그러면서도 두 영역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학적 문제를 윤리의 문제로 혼동하는 것, 윤리의 문제를 지식의 문제로 혼동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혼동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가져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비판철학의 요체이며, 메타적인 의미에서의 합리성일 것이다.
이에, 여기서도 다시 한번 저 위의 표현을 빌려 와 본다: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이러한 강령은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본문에서 이미 등장한 몇 가지 질문을 다시 던지면서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 보편성과 개별성은 일단 기본적으로는 충돌하는 관계인 것 같다. 보편성을 유지하고 권장하면서도, 개별성 및 맥락을 중시하는 방법으로 보다 총체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보편성이란 어떤 식으로든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철저히 개별성만을 긍정해야 할까?
- 생각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같고, 어떤 면에서는 다를 것이다. 그 중간쯤에서 현실적인 구분선이 형성될 것이며, 그 적절한 위치는 경우에 따라 모두 다를 것다. 이것은 정답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면 되는 지식 추구의 문제일까, 아니면 정답은 없지만 권력을 놓고 줄다리기하는 정치적 문제일까?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 보편성이라는 가치가 약자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폐쇄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게 하고,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대항의 수단으로 삼으려면 어떤 것이 중요할까? 현실적으로 유효한 수단은 어떤 것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