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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1일 금요일

비평형 능동물질과 배트맨 리턴즈: When does locality help?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다. 특히 계산기술의 양적, 질적 발전은 영상매체에서의 생생한 그래픽 표현을 직·간접적으로 뒷받침해준다.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한 영상 효과 구현을 위해서는 적절한 수학적 모형화와 대량의 계산이 필요하다. 실제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영상 효과를 담당한 회사 '웨타 디지털', 그리고 수식어가 필요 없는 애니메이션 회사 디즈니의 연구조직 '디즈니 리서치' 등에서는 일찍이 문화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로보틱스 연구자, 수학, 물리학 및 계산과학 전공자 등을 고용해 왔다.

이 글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스와 물리학의 관계에 대해서 재미있는 고전적 사례를 소개하고, 앞으로는 이들이 어떤 관계에 있게 될지, 그리고 꼭 관계가 있어야만 할지 등에 대해서 살짝 생각해 본다.


능동 물질과 배트맨 리턴즈

필자의 전공인 통계물리학은 수많은 입자가 상호작용하는 상황을 확률론을 도구 삼아서 기술하는 물리학의 한 분야이다. 일(work), 열(heat) 등 에너지의 흐름과 그 비가역성에 대한 학문인 열역학을 볼쯔만 등이 현대적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이 분야에서 2010년대 이후로 활발한 관심을 끌고 있는 키워드는 바로 능동 물질(active matter) 이다.

능동물질이란, 입자 간의 수동적인 충돌에 의해서 움직일 뿐인 보통의 액체 및 기체 등과 달리, 개별 구성 입자들이 스스로 연료를 소모하면서 적극적으로 헤엄치는 물질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생물체들의 세포 내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움직이는 여러가지 분자크기 기계들, 혹은 움직이는 세포 그 자체들, 그리고 어떤 추진 장치를 갖게끔 화학적으로 특별히 합성된 콜로이드 물질 등이 있다.

이러한 능동물질은 밖에서 공급되는 유용한 에너지를 꾸준히 소모하면서 (열로 전환하면서, 즉 우주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면서) 평형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므로, 비평형 시스템의 한 예시이다. 이러한 능동물질 연구의 효시로 꼽히는 연구는, 새들이 몰려다니는 집단적 움직임을 나타내기 위해 1995년에 제안된 비첵(Vicsek) 모델이다. 각각의 입자는 자체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돌아다니는데, 자기 자신의 '시야 범위' 내에 있는 입자들을 보고, 그 주변 입자들의 평균 방향으로 정렬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컴퓨터 그래픽 연구자인 C. Reynolds가, 이미 거의 동일한 모델을 Boids라는 이름으로 1986년에 제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Boids 모델은 Reynolds가 엔지니어로 참여한 1992년도 명작 영화 <배트맨 리턴즈> (배트맨 2) 에도 적용되어, 박쥐들의 집단적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주었고 이로써 영화에 음산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박쥐는 새가 아니지만 아무튼...).


https://journals.aps.org/prx/abstract/10.1103/PhysRevX.12.010501

(위 링크: 능동물질 분야의 대가들이 저술하여 Physical Review X에 게재한 총설논문 (접근 권한 필요). 논문 본문의 Introduction 부분에 배트맨 리턴즈에 대한 언급이 존재한다 (Boids가 물리학자들에게 여기서 처음 재발견된 것은 아니다). Bowick, Fakhri, Marchetti and Ramaswamy, Physical Review X, 12 (2022).)

배트맨 리턴즈가 포함된 이 영화 시리즈는, 현재 우리가 배트맨 실사영화 하면 떠올리는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의 전형을 확립한 작품들이다. 배트맨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팀 버튼 감독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이러한 수학적 모델링 아이디어와 계산 기술력의 진보 또한 영화 연출의 완성도에 일정부분 역할을 했다고 하면 무리한 추측일까.

국소성 (locality) 을 둘러싼 생각

아무튼 통계 물리학자들과 컴퓨터그래픽 연구자들은 서로의 분야에서 거의 비슷한 모델이 있음을 꽤나 오랫동안 서로 몰랐던 모양이다. 따라서 이를 이론과학과 문화기술의 직접적 상호작용이라고 보기엔 애매하다. 그러나 각 분야의 관심사 및 계산 기술의 발전에 의해 '나올 때가 되어서' 서로 비슷한 시기에 나온, 말하자면 예정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모델은 질량, 운동량, 에너지 등의 교환이 시공간적으로 서로 잇따라 (즉 '국소성 (locality)'을 만족시키면서) 전달되는, 전통적인 물리학에서 좋아하는 역학적 상호작용이 아니다. 메커니즘은 모르지만 아무튼 주변을 보고 그에 따라 정렬된다고 거시적인 규칙을 정해 준 것 뿐이다.

(예컨대 새가 주변의 다른 개체들을 눈으로 보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고 치자. 이것을 역학적으로 제대로 모델링하려면, 주변의 개체들에서 반사된 빛 입자가 새의 눈에 들어오고, 이것이 시각 세포를 자극하고, 그 신호가 신경을 통해 뇌로 들어가 어떤 판단을 일으키고, 그러한 판단에 따라 날개에 어떤 운동이 지시되어 비행 방향이 조절되는 것을 일일이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겠다고 일일이 역학적으로 모델링하여 컴퓨터로 재현한다는 것은,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별다른 실익이 없는 코믹한 일이다.)

물리학에서는 이러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중력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천체 사이에 작용하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전하 (+ 혹은 -) 사이에는 전자기력이 작용하는데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원격 작용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두 천체, 혹은 두 전하 사이의 모든 공간을 중력장, 혹은 전자기장을 비롯한 장 (field) 이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입자간의 상호작용은 장의 존재, 혹은 장의 변화를 통해 매개된다. 이로써 원격 상호작용으로 여겨지던 이러한 기본 힘들은, 장을 통한 국소적인 상호작용의 연쇄로 새롭게 이해되었다. 이러한 접근은 인류 과학사에서 손꼽힐 만큼 성공적이어서, 장론 (field theory) 은 거의 모든 현대 물리학 이론의 표준적, 통합적 기술 방법으로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장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도구가 아니라 근본적인 물리학적 실재(實在)처럼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다 (전자기파, 중력파와 같은 파동의 검출이 결정적이다).

그러나 이미 썼듯이 비첵모델은 매우 거시적인 수준의 모형이고,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구체적인 국소적 상호작용이 모형화되어 있지 않다. 또한 비첵 모델은 유효적 (effective), 혹은 현상론적 (phenomenological) 기술일 뿐, 위에 쓴 능동물질의 정의에도 있는 에너지 출입에 대한 고려, 즉 '열역학이 들어가 있지 않다. 따라서 평형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서 작동하는지 체계적인 분석이 어렵다. 이처럼 거시적인 새들 (혹은 박쥐들, 물고기들 등) 의 집단 운동은 도리어 '너무나 극명하게' 평형으로부터 멀다.

상전이와 보편성

위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비첵 모델은 에너지 출입에 대한 적절한 고려도 없고, 국소적인 상호작용의 연쇄로 이해될수도 없으므로, 물리학이라기보다는 그냥 입자기반 시뮬레이션 같은 것일 뿐이라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대체 왜 물리학으로 분류될까? 실제로 필자가 주변에서 많이 받는 질문인데, 이에 대한 답은 간단치 않다.

일단 일종의 제도론적인 답을 하자면, 그냥 물리학자들이 주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사실 이것이 제일 정확한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적 답변에서 그치지 말고 규범적 정당화를 시도해 볼 필요도 있다.

내 생각에 이런 종류의 모델들이 물리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전이 (phase transition) 의 존재 때문에 그렇다. 상전이란, 온도에 따라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것처럼, 파라미터의 변화에 따라 물질의 어떤 특성이 점진적으로 변하지 않고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전이가 왜 그렇게 이론물리학자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현상인지, 점진적인 변화와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도 다루고 싶으나, 물리학자들이 좋아하는 주제인 대칭성, 보편성 등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해 두고 그 세부는 지면상 생략한다. 결국 이러한 다소 인위적이고 현상론적인 모델도, 상전이를 보여준 덕분에 물리학자들의 활발한 관심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첵 모델은 새들의 밀도가 낮거나 노이즈가 클 때에는 무질서한 운동을 보이는데, 밀도가 높거나 노이즈가 작아지면 위에서 이야기한, 다같이 비슷한 방향으로 몰려다니는 large-scale 집단운동을 보여주게 된다 (여러 동물들에서 이러한 현상이 있는데, 새들의 경우에는 flocking이라고 불리고, 물고기는 schooling이라고 불리며, 보다 넓은 용어로는 swarming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몰려다니는 상태는 평형에서는 불가능한, 철저히 비평형적인 현상이므로 흥미롭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 주변에서 급격하게 일어난다.

이러한 상전이 특성 탓에 비첵 모델은 물리학자들의 상당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고, 현재 최초 논문 1개만 해도 7600회 이상 인용되었다. 또한 커다란 개체 스케일이 아니라 세포 스케일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집단 현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틀로 분석을 하는 연구들이 생겨나면서 능동물질 분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능동물질이라는 하나의 인기있는 토픽으로 정리가 된 것은 보통 2010년쯤으로 본다.

그리고 정말로 '물질'이라고 불릴 만한, 분자크기 즉 나노~마이크로미터 스케일의 응집물질들 중에서도 에너지를 꾸준히 소모하며 헤엄치면서, 평형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흥미로운 집단현상을 보이는 계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능동물질이라는 틀에서 통합적으로 연구되게 되었다. 이제 이들은 확률과 결합한 현대적 열역학의 체제에서, 에너지를 얼만큼 소모하면서 평형으로부터 얼만큼 떨어져 있는지의 문제까지 포함하여 정량적으로 잘 기술되고 있다.

Concluding remarks: 그래픽스와 물리학의 관계 혹은 무관계

최근에 모종의 계기로 그래픽스와 물리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래픽스와 능동물질 물리학의 이러한 오래된 연결을 알게 되어 꽤나 신나는 심정이다. 이러한 그래픽스와 물리학의 관계가 앞으로는 어떻게 전개될지 다소 추상적으로나마 생각해보았다.

그래픽스는 기본적으로 꼭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다 (진실성을 추구하면 그때부터는 문화기술이라기보다는 과학의 영역이며, 주로 그래픽스라기보다는 시뮬레이션이라고 불린다). 이것을 반드시 물리학에 기반해서 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진실성과 별개로, 시청자를 설득할 만한 사실성은 대부분 필요하다. 사실적 표현을 하기 위해, 혹은 조금 덜 사실적이더라도 예술성을 기하기 위해 물리학과 그래픽스가 서로 영감을 주고받고, 더 나아가 물리학적 모형 및 방법론을 직접적으로 활용 가능한 지점은 꽤 많아 보인다.

현대 이론과학으로서 좁은 의미의 물리학뿐 아니라, 시간에 따른 자연현상의 수학적 기술이라는 좀더 넓은 의미의 물리학적 (혹은 동역학적) 방법론이라면 더욱 명백하게 그렇다. 어떤 경우엔 국소적인 상호작용을 물리학적 정확성에 집착하지 않아야 더 효율적으로 멋진 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물리학 지식의 도움을 받아 쉽게 멋진 장면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딥러닝 분야의 발전에 따라, 커다란 인공 신경망의 높은 일반화 성능, 그리고 특징추출 (feature extraction) 및 차원축소 (dimension reduction) 능력에 의해 동역학계 이론, 로보틱스, 컴퓨터비전, 컴퓨터그래픽스 등 여러 분야가 서로 glue되고 경계가 흐려지면서, 이러한 관심사는 더욱 여러 방향으로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위에서는 과학분야로서의 시뮬레이션의 경우 진실성을 기하기 위해, 국소적 상호작용을 얄짤없이 일일이 재현해야 하는 것처럼 말했다. 물론 거의 모든 경우에는 맞다. 그러나 요새는 심지어 시뮬레이션의 경우에도 딥러닝의 도움을 받아서, 통계적으로 희귀하지만 꼭 보아야 하는 이벤트, 혹은 강한 비선형 효과 등에 대해 적은 계산량만으로도 올바른 결과를 내겠다는 연구가 많다. 그 결과의 진실성을 어떻게 확신할지는 기술적으로도, 과학철학적으로도 어려운 문제일테다.

아무튼 그래픽스에서 이러한 딥러닝 방법은 국소적 상호작용을 일일이 재현하지 않고 사실성에 기여하는 핵심적인 윤곽만을 효과적으로 추출해서, 계산량을 줄이면서도 물리학 지식의 도움을 효과적으로 받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시적 현상들에서 뭐가 중요하며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미술가적인 이해를 돋우는, 일종의 '과학 아닌 과학'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결론짓자면 많은 계산량으로 악명높은 그래픽스 분야가 때로는 물리학적 정확성에 대한 추구를 폐기하면서, 때로는 반대로 물리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더욱 발전하여 사람들에게 문화적인 즐거움을 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적절한 판단 필요성의 중심에는, 결국 한편으로는 정확한 수학적 모형화를 돕고, 한편으로는 계산량을 더욱 증가시키는 국소성의 양면이 있다.


Alookso에서 이 글 보기: https://alook.so/posts/LKtaxGk (이론물리학 그리고 배트맨 리턴즈: When does locality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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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8일 화요일

물리, 그래픽스, AI 융합연구의 두 가지 방향

그래픽스나 컴퓨터비전 쪽을 physics-aware하게 하는 게 점점 중요해질 수 있어 보인다.


일단 이를 위한 첫번째 방법으로는, 오브젝트들을 생성하고 이동시켜주는 규칙을 최적화하기 위한 손실함수(loss function)를 잘 설계하고 이것으로 뉴럴 네트워크를 학습시켜서 '근사적으로' physics-aware하게 할 수도 있을테다. 즉 large scale 시스템을 일일이 시뮬레이션하지 않고 중요한 자유도만 살리면서도 올바른 윤곽을 흉내내게끔 하는것.

이런 건 이미 실제로 많이 하고 있다. 특히 계산량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유체 시뮬레이션 쪽이랑 빛 렌더링 쪽에서, 주요 feature를 뽑아주는 뉴럴넷의 파워를 빌려서 딥러닝 붐 초창기부터 이미 진전이 많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래픽스랑은 다소 다른 맥락에서 등장한 terminology 같긴 하지만, physics-informed neural network도 이런 비슷한 접근법이며 현재는 그래픽스 쪽에서도 많이 적용이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고, 아예 블렌더 등의 그래픽스 프로그램에서 동작하는 스크립트 같은 걸 GPT-4 같은 Language model을 통해 만들되, 그렇게 생성된 스크립트가 물리법칙을 respect하는 물체의 경로를 지시하게끔 한다면, 물리 지식이 없는 사용자도 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그래픽을 만들어낼 수 있을것이다. 그러면 그걸로 만들어진 스크립트는 뉴럴넷이라는 커다란 함수를 이용한 근사가 아니라 '정확히' 물리법칙을 존중하게 될테고.
수행하고 싶은 과업의 종류 및 계산량에 따라 이런 방향들 중 무엇이 더 적합할지가 갈릴텐데, 만약에 '시뮬레이션' 스러운 게 아니라 그냥 간단한 일상적 장면 표현 같은 데에 쓸 목적이라면 후자의 접근법도 꽤나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미지 전체를 아예 한번에 주조해 버리는 GAN이나 디퓨전 기반의 text-to-video generation (요샌 3d도 되는 듯) 으로 비벼 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런 거 말고 오브젝트들의 개체성이 선명해야 한다거나, 정확히 원하는 물리적 동작이 있는 상황이라면 현재와 같은 패러다임의 text-to-video generation은 조금 부적합할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물리법칙을 존중하는 어떤 장면을 만든다고 할때 그 구성요소에 유체역학 혹은 기체의 확산 같은 게 포함되어 있어 버리면 결국은 전자와 같은 방향도 관여될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하다.
(개인적으로 과학적(?) 재미는 전자쪽에 좀더 있는것 같기도 하다. 인간이 잘 모르는 중요 feature를 뉴럴넷이 알아내서, 적은 비용만으로 전반적인 윤곽을 상당히 정확하게 흉내낸다면, 그런 뉴럴넷을 뜯어보면서 우리 입장에서도 현상의 전체적인 윤곽에 무엇이 중요한 거였구나 하고 배울수가 있으니까.)
이런 접근에서 당장 생각나는 문제점이 있다면 GPT같은 무척 커다란 모델도 물리적 규칙을 이해하는건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자연어에 대한 통계적 이해로부터, 물리법칙을 존중하는 '자연어 생성' 및 '자연어 레벨의 추론' 능력이 emerge하지 않는다는 얘기일 뿐이고. 자연어가 아니라 물리법칙을 존중하는 '코드를 짜는 것'이라면 오히려 훨씬 더 쉬울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은 사용자가 물리학 지식이 있어서 공식을 아예 manual하게 지시해주고, 옳게 했는지 검토도 가능한 경우에는 지금의 ChatGPT 정도로도 그냥 쉽게 될 것 같다. 그걸 넘어서 일일이 안 알려줘도 실수없이 정확하게 하도록 파인튜닝하는 게 중요하겠지.

암튼 정말 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엄청나게 나오고 있으며, 기존 것들을 연결해서 새로운 서비스를 구현하는것도 너무 잘 되고 있으니.... 이런것들도 분명히 이미 있거나 조만간에 될 듯.
이런 여러가지 워크플로우들을, 기존에 잘 돼있는 것들을 직접 연결, 또 연결해서 만들어 낼 수만 있는 정도의 표층(?) 코딩 능력만 갖추더라도 지금 다가오고 있는 시대에 꽤 재밌게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장 최근에는 심지어 그것조차 하지 않아도 GPT가 알아서 다 연결시켜 주는 게 나온 모양인데, 그것까진 아직 팔로업하지 못했다.

나는 차라리 내가 바닥부터 직접 코딩하는 시뮬레이션 같은 것은 비교적 잘 할수 있지만 위와 같이 이미 있는 것들을 기민하게 연결해서 작업하는 일은 여전히 익숙하지 못하다 보니, ChatGPT한테 물어봐 가면서 점차점차 익혀 보려고 한다. 프로그래밍 연습 해야된다 해야된다 하면서 계속 안하고 버텼는데 지금이야말로 무조건 해야 될 적기인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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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1일 토요일

빛 감지 기관으로서 송과선의 기원, 그리고 통합된 감각질에 대한 상상

뇌에 있는 송과선 (소나무 열매 모양의 내분비선이라는 뜻인 듯) 은 호르몬을 통해서 밤낮에 맞는 신체 조건 조절(즉 circadian rhythm)을 담당하는 분비선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기관이 '두정안'이라고 하는 빛을 감지하는 기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인류에게서는 이 기관이 뇌의 일부로서 숨어들어가 있지만 일부 다른 생물들에서는 머리 바깥으로 나와 있고, 실제로 투명 혹은 반투명해서 빛을 감지하기 때문에 제3의 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수면 패턴이 빛과 관련이 있다는 것 자체야 평소에 많이 듣는 얘기기도 하고 뭐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그걸 담당하는 기관이 척추동물의 진화 초기에서는 아예 직접 밖에 나와 있는 채로 빛을 감지한다고 하니까 뭔가 신기하다.


그렇다면 두정안이 존재하는 생물들의 감각질(qualia)에서는, 수면 패턴에 따른 졸리거나 피곤한 감각이, 빛의 세기라는 시각적인 정보와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일까?

물론 제3의 눈이라는 다소간에 신비해 보이는 표현이 과연 적절할지는, 두정안에 연결된 신경이 뇌의 어디로 들어가는지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비록 빛을 감지하는 것일지라도 두 눈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전혀 다른 경로로 처리된다면, 시각정보와 통합되어 감각되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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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0일 금요일

모더니티, 페미니즘 그리고 보편성: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세간에서는 칸트 철학을 필두로 한 근대적 인식론이 오만한 근대성의 표상이자 답답한 합리주의의 전형처럼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중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탈근대적인 패러다임을 취하는 여러 철학 논문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것, 혹은 그렇게 해석하고 가능성을 탐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 미숙하게나마 내가 가진 철학적 견해이다.


물론 칸트가 실제로 논의한 정치적 견해 같은 것들에서 뚜렷한 한계가 보이는 지점은 분명히 많이 있다. 특히 근대의 남성 철학자라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여성의 능력을 특정한 방면으로 제한하고 한계를 설정하는 언급들이 많이 보인다. 그것도 단순히 지나가는 사적 견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자못 진지하게 학술적 견해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근대 인식론을 집대성한 칸트에게서부터 (혹은 아마도 그 이전부터), 현대철학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니체에게서까지, 자신들의 철학에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위치시키고 한계를 설정하는 태도는 상당히 뿌리깊다. 인종적 편견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잘못됐다고 다수가 말하지만, 남성중심 사회에서 은연중에 여성을 특수하게 취급하는 것은 여전히 만연해 보인다. 의도적으로 비하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나치게 어렵게, 지나치게 다르게 생각해서 탈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클리셰가 될 정도로 대표적인 것은, 여성의 모든 언행에 어떤 숨겨진 의도 내지는 시그널이 있을거라고 과도하게 전제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과 매우 다른 존재로 고착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일부에서 실재하는 그러한 언행과 서로를 강화하여 불신을 재생산하기도 하며, 정작 상황에 따라 그러한 방식이 선택되는 여러가지 이유에 대한 고찰은 중지함으로써 여성을 한번 더 타자화한다.

혹은 특정한 종류의 여성상을 정해 놓고 그것을 과도하게 추앙하는 것에서도, 그렇지 않은 여성을 부정적으로 간주하겠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미인이나 현모양처 등에 대한 선망이 대표적인데, 개인적인 선호와는 별개로 공적으로 발화되면서 일괄적 기준으로 강요된다면 비판적 사유의 대상으로 너끈히 삼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은 아예 생물학적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냉엄한 과학주의와 열렬한 극우개신교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이 지점에서는 놀라우리만치 잘 어우러진다. 다분히 전통주의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심리학 교수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담론에 일종의 ‘과학성’을 부여하는 감이 없지않아 있는 조던 피터슨이 대표적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의 주장에서 종교성이 적극 발견되지는 못한 채로,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상당히 널리 유통되어 왔다.

위의 모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자: 다른 것은 다르게, 같은 것은 같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한쪽 성별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특히 인터넷 공간의 많은 공개적인 장소들에서는 도리어 정반대로 다른 것이 같게같은 것이 다르게 간주되며 이는 기만적 도식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성별에 따른 신체적 차이는 상황과 논점에 따라 어떨 때에는 무시되고 어떨 때에는 부각된다. 한편, 성별에 상관없이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소통하는 인간이다 (혹은 그래야 한다) 라는 보편성 역시, 실질적인 의사소통 상황에서 (주로 발화자의 입장에 유리하게끔) 때로는 긍정되고 때로는 부정된다.

성별에 따른 차이점을 부각하여 여성은 어떻다, 남성은 어떻다라고 규정하는 언어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차이점을 고정적인 것으로서 부각하여 상대방을 보편의 지위에서 탈락시키는 언행도 가능한 반면에, 차이점을 임시적으로 부각하여 보편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활용하는 언행도 가능하다. 차이와 보편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통해 우리의 지향점이 변증법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공통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미묘함은 논쟁이 평면화되는 과정에서 세밀하게 이해되기 어렵다. '왜 너는 이때는 같다고 하면서 이때는 다르다고 하냐'라면서, 상대편의 이기심과 비일관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이쯤되면, 언제 공통점을 부각해야 하고 언제 차이점을 부각해야 할지, 과연 그러한 구분이 의미가 있기는 한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위를 감안하면 이것은 어떤 정답이 있다고 믿고 그걸 추구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권력을 균형화하는 정치적 영역의 문제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미시적 권력의 재편을 통해 기만적 도식을 해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다시 철학 얘기로 돌아오자. 내 생각에, 칸트 철학에서는 그 한계만큼이나, 놀랄만큼 열려 있는 부분도 상당부분 존재한다. 이는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합리성을 정초(定礎)하겠다는, 보편성을 중심에 둔 기본 정신 때문이 아닐까 한다. 대표적으로 칸트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평등론은 한쪽 끝에서는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이야기하는 실천이성비판과 맞닿아 있으면서, 다른 한 끝에서는 그의 정치철학이라는 응용적 계기로 연결이 된다.
(사실 이 정도의 견해를 펼친 사람이 성별에 대한 각론에서 왜 ‘굳이 애써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위치시키는지 의문이다. 후대의 철학자 니체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도 당연히 초인(위버멘쉬)이 될 수 있다고 하면 되는 것을, 니체는 여성은 초인을 출산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여담이지만 칸트는 실로 박물학(博物學)적이라고 부를 만큼 방대한 분야의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특히 뉴턴 물리학의 성공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깊은 감명을 받고 직접 탐구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칸트는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논의를 하고, 은하의 형성 과정을 다루기도 했다. 놀랍게도 후자의 경우 아직도 칸트의 견해가 정설에 가깝다고 한다.

약간 옆길로 샐 뻔했다. 만약에 칸트의 평등론에서 예고되는 것처럼, 칸트적인 보편성을 배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특수자를 포함하기 위해서 따뜻하고 세심하게 포용적으로 사용한다면 칸트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더 발전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칸트를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더 많은 생각들을 세밀하게 해 보기 위해서이다.

위에서 말한 것도 마찬가지다. 보편적 기준틀이 강요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폐쇄하며 개별자를 배제한다. 그러나 보편적 기준틀을 바탕으로 보편성을 실제로 획득하고자 하는 요구는 보편성의 영역을 확장하며 포용의 언어이자 대항의 무기가 된다. 이는 결코 이상주의적인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칸트 철학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로 다시 돌아와보겠다. 위의 명백한 한계와 별개로, 칸트의 인식론을 확립한 3비판서(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의 이론적 체제를 기반으로 해서, 칸트 철학이 꽉 막힌 합리주의로만 치부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일단은 그 중심에 미학의 영역을 놓아 볼 수 있다. 이 논의에서 일단은 사람의 주관이 외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다루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루는 상호주관적 계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논의가 상당히 소박해지기는 한다.

칸트는 엄밀한 의미의 인식(지식 획득)은 아닌, 그럼에도 우리가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 구성요소로 인정해야 하는 ‘취미판단'이라는 영역을 탐구함으로써 미학 분야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물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고대부터 있었고, 근대적 체제로서의 미학 역시 칸트보다 바움가르텐이 먼저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더 기반이 탄탄하게 된 면이 있다).

취미판단은 쉽게 말해서, 'A는 B이다'라는 인식론적 판단 (지식) 과는 달리, 'A는 아름답다'라는 쾌/불쾌의 감정을 의미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은 객관적 외부 대상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 사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는 바로 감각 세계가 우리의 머리속 능력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그 중심에 있다.

칸트가 보기에 객관적으로 정당화된 지식이란,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온 잡다한 데이터가 직관의 형식 (시간적, 공간적 틀) 에 의해 정돈되고, 사고의 형식 (거칠게 말하자면, 논리적 능력) 에 의해 개념화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수학적, 물리학적 지식이 그 모범이다. 이렇게 얻어진 지식은 보편적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어떤가? 외부 세계는 기계론적이며 거기에는 어떤 의지나 목적이 예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이게 어떻게 하필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목적론적 사고를 가지게 된다.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한다.

이 때 우리의 인식 능력은 명료하고 객관적인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지는 못하지만,  무척 활발하고 다채롭게 작동한다. 아무것도 지식으로써 개념화되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필연적인 것이 있다고 느껴진다. 칸트가 보기에 이러한 취미판단은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설득의 가능성이 있는, 매우 특수한 사태이다. 이는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인식능력의 보편성을 신뢰하는 칸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자연을 보고, 혹은 아주 잘 만들어진 어떤 영화 같은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던 경험을 상기해 보면 칸트가 제시한 이러한 메커니즘(?)은 개인적으로 꽤 설득력있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매우 고전적인 설명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이에 동의되지 않는 이들도 많을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인식론적, 윤리학적 판단과 취미판단(미학)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선험적 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느냐의 문제로써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이들 각각을 합리성과 비합리성에 대응시켜 볼 수도 있다. 철학의 패러다임에서 주로 합리성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비합리성은 다소간에 격하되었던 반면, 인간 인식구조에 대한 해명을 바탕으로 미학이라는 영역을 노정하고자 했던 칸트에 이르러서 비합리성과 합리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통합적으로 이해될 길이 열린 것이다. 이 둘 모두를 받아들일 줄 알고, 그러면서도 두 영역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학적 문제를 윤리의 문제로 혼동하는 것, 윤리의 문제를 지식의 문제로 혼동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혼동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가져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비판철학의 요체이며, 메타적인 의미에서의 합리성일 것이다.

이에, 여기서도 다시 한번 저 위의 표현을 빌려 와 본다: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이러한 강령은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본문에서 이미 등장한 몇 가지 질문을 다시 던지면서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Concluding remarks

  • 보편성과 개별성은 일단 기본적으로는 충돌하는 관계인 것 같다. 보편성을 유지하고 권장하면서도, 개별성 및 맥락을 중시하는 방법으로 보다 총체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보편성이란 어떤 식으로든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철저히 개별성만을 긍정해야 할까?

  • 생각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같고, 어떤 면에서는 다를 것이다. 그 중간쯤에서 현실적인 구분선이 형성될 것이며, 그 적절한 위치는 경우에 따라 모두 다를 것다. 이것은 정답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면 되는 지식 추구의 문제일까, 아니면 정답은 없지만 권력을 놓고 줄다리기하는 정치적 문제일까?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 보편성이라는 가치가 약자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폐쇄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게 하고,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대항의 수단으로 삼으려면 어떤 것이 중요할까? 현실적으로 유효한 수단은 어떤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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