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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0일 금요일

모더니티, 페미니즘 그리고 보편성: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세간에서는 칸트 철학을 필두로 한 근대적 인식론이 오만한 근대성의 표상이자 답답한 합리주의의 전형처럼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중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탈근대적인 패러다임을 취하는 여러 철학 논문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것, 혹은 그렇게 해석하고 가능성을 탐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 미숙하게나마 내가 가진 철학적 견해이다.


물론 칸트가 실제로 논의한 정치적 견해 같은 것들에서 뚜렷한 한계가 보이는 지점은 분명히 많이 있다. 특히 근대의 남성 철학자라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여성의 능력을 특정한 방면으로 제한하고 한계를 설정하는 언급들이 많이 보인다. 그것도 단순히 지나가는 사적 견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자못 진지하게 학술적 견해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근대 인식론을 집대성한 칸트에게서부터 (혹은 아마도 그 이전부터), 현대철학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니체에게서까지, 자신들의 철학에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위치시키고 한계를 설정하는 태도는 상당히 뿌리깊다. 인종적 편견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잘못됐다고 다수가 말하지만, 남성중심 사회에서 은연중에 여성을 특수하게 취급하는 것은 여전히 만연해 보인다. 의도적으로 비하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나치게 어렵게, 지나치게 다르게 생각해서 탈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클리셰가 될 정도로 대표적인 것은, 여성의 모든 언행에 어떤 숨겨진 의도 내지는 시그널이 있을거라고 과도하게 전제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과 매우 다른 존재로 고착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일부에서 실재하는 그러한 언행과 서로를 강화하여 불신을 재생산하기도 하며, 정작 상황에 따라 그러한 방식이 선택되는 여러가지 이유에 대한 고찰은 중지함으로써 여성을 한번 더 타자화한다.

혹은 특정한 종류의 여성상을 정해 놓고 그것을 과도하게 추앙하는 것에서도, 그렇지 않은 여성을 부정적으로 간주하겠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미인이나 현모양처 등에 대한 선망이 대표적인데, 개인적인 선호와는 별개로 공적으로 발화되면서 일괄적 기준으로 강요된다면 비판적 사유의 대상으로 너끈히 삼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은 아예 생물학적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냉엄한 과학주의와 열렬한 극우개신교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이 지점에서는 놀라우리만치 잘 어우러진다. 다분히 전통주의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심리학 교수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담론에 일종의 ‘과학성’을 부여하는 감이 없지않아 있는 조던 피터슨이 대표적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의 주장에서 종교성이 적극 발견되지는 못한 채로,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상당히 널리 유통되어 왔다.

위의 모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자: 다른 것은 다르게, 같은 것은 같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한쪽 성별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특히 인터넷 공간의 많은 공개적인 장소들에서는 도리어 정반대로 다른 것이 같게같은 것이 다르게 간주되며 이는 기만적 도식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성별에 따른 신체적 차이는 상황과 논점에 따라 어떨 때에는 무시되고 어떨 때에는 부각된다. 한편, 성별에 상관없이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소통하는 인간이다 (혹은 그래야 한다) 라는 보편성 역시, 실질적인 의사소통 상황에서 (주로 발화자의 입장에 유리하게끔) 때로는 긍정되고 때로는 부정된다.

성별에 따른 차이점을 부각하여 여성은 어떻다, 남성은 어떻다라고 규정하는 언어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차이점을 고정적인 것으로서 부각하여 상대방을 보편의 지위에서 탈락시키는 언행도 가능한 반면에, 차이점을 임시적으로 부각하여 보편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활용하는 언행도 가능하다. 차이와 보편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통해 우리의 지향점이 변증법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공통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미묘함은 논쟁이 평면화되는 과정에서 세밀하게 이해되기 어렵다. '왜 너는 이때는 같다고 하면서 이때는 다르다고 하냐'라면서, 상대편의 이기심과 비일관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이쯤되면, 언제 공통점을 부각해야 하고 언제 차이점을 부각해야 할지, 과연 그러한 구분이 의미가 있기는 한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위를 감안하면 이것은 어떤 정답이 있다고 믿고 그걸 추구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권력을 균형화하는 정치적 영역의 문제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미시적 권력의 재편을 통해 기만적 도식을 해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다시 철학 얘기로 돌아오자. 내 생각에, 칸트 철학에서는 그 한계만큼이나, 놀랄만큼 열려 있는 부분도 상당부분 존재한다. 이는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합리성을 정초(定礎)하겠다는, 보편성을 중심에 둔 기본 정신 때문이 아닐까 한다. 대표적으로 칸트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평등론은 한쪽 끝에서는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이야기하는 실천이성비판과 맞닿아 있으면서, 다른 한 끝에서는 그의 정치철학이라는 응용적 계기로 연결이 된다.
(사실 이 정도의 견해를 펼친 사람이 성별에 대한 각론에서 왜 ‘굳이 애써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위치시키는지 의문이다. 후대의 철학자 니체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도 당연히 초인(위버멘쉬)이 될 수 있다고 하면 되는 것을, 니체는 여성은 초인을 출산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여담이지만 칸트는 실로 박물학(博物學)적이라고 부를 만큼 방대한 분야의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특히 뉴턴 물리학의 성공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깊은 감명을 받고 직접 탐구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칸트는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논의를 하고, 은하의 형성 과정을 다루기도 했다. 놀랍게도 후자의 경우 아직도 칸트의 견해가 정설에 가깝다고 한다.

약간 옆길로 샐 뻔했다. 만약에 칸트의 평등론에서 예고되는 것처럼, 칸트적인 보편성을 배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특수자를 포함하기 위해서 따뜻하고 세심하게 포용적으로 사용한다면 칸트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더 발전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칸트를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더 많은 생각들을 세밀하게 해 보기 위해서이다.

위에서 말한 것도 마찬가지다. 보편적 기준틀이 강요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폐쇄하며 개별자를 배제한다. 그러나 보편적 기준틀을 바탕으로 보편성을 실제로 획득하고자 하는 요구는 보편성의 영역을 확장하며 포용의 언어이자 대항의 무기가 된다. 이는 결코 이상주의적인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칸트 철학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로 다시 돌아와보겠다. 위의 명백한 한계와 별개로, 칸트의 인식론을 확립한 3비판서(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의 이론적 체제를 기반으로 해서, 칸트 철학이 꽉 막힌 합리주의로만 치부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일단은 그 중심에 미학의 영역을 놓아 볼 수 있다. 이 논의에서 일단은 사람의 주관이 외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다루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루는 상호주관적 계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논의가 상당히 소박해지기는 한다.

칸트는 엄밀한 의미의 인식(지식 획득)은 아닌, 그럼에도 우리가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 구성요소로 인정해야 하는 ‘취미판단'이라는 영역을 탐구함으로써 미학 분야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물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고대부터 있었고, 근대적 체제로서의 미학 역시 칸트보다 바움가르텐이 먼저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더 기반이 탄탄하게 된 면이 있다).

취미판단은 쉽게 말해서, 'A는 B이다'라는 인식론적 판단 (지식) 과는 달리, 'A는 아름답다'라는 쾌/불쾌의 감정을 의미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은 객관적 외부 대상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 사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는 바로 감각 세계가 우리의 머리속 능력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그 중심에 있다.

칸트가 보기에 객관적으로 정당화된 지식이란,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온 잡다한 데이터가 직관의 형식 (시간적, 공간적 틀) 에 의해 정돈되고, 사고의 형식 (거칠게 말하자면, 논리적 능력) 에 의해 개념화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수학적, 물리학적 지식이 그 모범이다. 이렇게 얻어진 지식은 보편적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어떤가? 외부 세계는 기계론적이며 거기에는 어떤 의지나 목적이 예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이게 어떻게 하필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목적론적 사고를 가지게 된다. 이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한다.

이 때 우리의 인식 능력은 명료하고 객관적인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지는 못하지만,  무척 활발하고 다채롭게 작동한다. 아무것도 지식으로써 개념화되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필연적인 것이 있다고 느껴진다. 칸트가 보기에 이러한 취미판단은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설득의 가능성이 있는, 매우 특수한 사태이다. 이는 인간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인식능력의 보편성을 신뢰하는 칸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자연을 보고, 혹은 아주 잘 만들어진 어떤 영화 같은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던 경험을 상기해 보면 칸트가 제시한 이러한 메커니즘(?)은 개인적으로 꽤 설득력있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매우 고전적인 설명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이에 동의되지 않는 이들도 많을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인식론적, 윤리학적 판단과 취미판단(미학)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선험적 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느냐의 문제로써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이들 각각을 합리성과 비합리성에 대응시켜 볼 수도 있다. 철학의 패러다임에서 주로 합리성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비합리성은 다소간에 격하되었던 반면, 인간 인식구조에 대한 해명을 바탕으로 미학이라는 영역을 노정하고자 했던 칸트에 이르러서 비합리성과 합리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통합적으로 이해될 길이 열린 것이다. 이 둘 모두를 받아들일 줄 알고, 그러면서도 두 영역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학적 문제를 윤리의 문제로 혼동하는 것, 윤리의 문제를 지식의 문제로 혼동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혼동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가져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비판철학의 요체이며, 메타적인 의미에서의 합리성일 것이다.

이에, 여기서도 다시 한번 저 위의 표현을 빌려 와 본다: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 이러한 강령은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본문에서 이미 등장한 몇 가지 질문을 다시 던지면서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Concluding remarks

  • 보편성과 개별성은 일단 기본적으로는 충돌하는 관계인 것 같다. 보편성을 유지하고 권장하면서도, 개별성 및 맥락을 중시하는 방법으로 보다 총체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보편성이란 어떤 식으로든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철저히 개별성만을 긍정해야 할까?

  • 생각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같고, 어떤 면에서는 다를 것이다. 그 중간쯤에서 현실적인 구분선이 형성될 것이며, 그 적절한 위치는 경우에 따라 모두 다를 것다. 이것은 정답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면 되는 지식 추구의 문제일까, 아니면 정답은 없지만 권력을 놓고 줄다리기하는 정치적 문제일까?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 보편성이라는 가치가 약자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폐쇄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게 하고,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대항의 수단으로 삼으려면 어떤 것이 중요할까? 현실적으로 유효한 수단은 어떤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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