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지 꽤나 오래되었음에도 그 접근성과 사용 유인이 아직도 그리 높지 못하고 오히려 관심이 다소간에 시들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일 수도 있지만 - 결국은 VR에 관심이 없던 대중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지불하여 구매하고 착용하게 만들 만한 킬러 콘텐츠의 부재가 아닐까 한다. 대형 모니터가 아닌 VR에서만 가능한, 꼭 해 보고 싶은 풍부한 경험이 무엇이 있는지 설득이 안 되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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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AR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 개인적 경험은 2016~2017년 동안에 VR게임 개발 팀에 섭외되어 예술적 컨텐츠 구상에 참여했을 때이다. 그 팀에서 나는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나 (이 팀은 내가 그만둔 이후에 PC게임으로 전환하여 한국산 인디게임으로서는 손꼽히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컨텐츠 구상의 일환으로 여러 산업 박람회에 다니면서, 컨텐츠에 대한 영감뿐 아니라 VR 기기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들과, VR 산업의 분위기도 다소간에 읽어 볼 수 있었다.
당시에 컨텐츠 측면에서는, 나는 VR에서의 전방위 시야 활용을 디스플레이의 연장선이라기보다는, 건축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VR을 확장된 디스플레이로 볼 경우, 디스플레이를 기존의 콘솔 게임 등과 완전히 차별화하는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상호작용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반면에, VR을 확장된 건축이라고 볼 경우에는 기존의 건축에서 불가능했던 수많은 다채로운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 면을 배치하여 공간을 구획하는 것이 바로 건축이라고 보면, VR에서는 이러한 면들이 실제 물리적, 경제적 제약에서 탈피하여 완전히 자유롭게 배치되고, 심지어 시간축 상에서도 매우 빠르게 시시각각 변화할 수 있다. 이후로, 개념적 혁신력을 가지는 VR 컨텐츠들 중에 이러한 컨셉을 적극 채용한 것이 실제로 있을지는 모르겠다.
한편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당시의 VR은 생각보다 많이 무겁고 어딘가 답답하다, 혹은 불편하다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메타에서 낸 퀘스트2 (2020년이었을 것이다) 같은 경우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착용해 본 결과 상당히 편해졌고, 시야도 덜 답답했던 기억이다. 또한 컨트롤러를 조작하는 방식도 직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어느정도 표준화가 이루어진 동시에, 창의적으로 활용될 여지도 많이 남겨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실제 기술 특허 등을 추적해 보더라도 그동안 노하우를 축적해서 많은 개선이 있었다고 한다. VR/AR은 머리에 착용하는 것이고 시야 전체를 커버하는 것이다보니 컴퓨터 및 스마트폰과는 궤를 달리하는 여러 복잡미묘한 HCI 및 하드웨어 이슈가 있는데, 이것이 메타 등에서 개발한 여러 노하우를 통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개선이 많이 되어 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 시간 이상 착용하고 있는 것은 무리일 정도로, 불편감의 문제가 아직 결정적으로 해소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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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에 대한 두 번째 개인적 경험은 2017년, 필자가 대학생 시절 학업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시범연구이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5G 통신과 VR/AR을 연계하여 5G 기술을 확산시키고 시장을 확대하고자 했던 KT의 경영전략을 평가하는 것이 그 주제였다. 아래의 내용은 산업공학의 기초 개념들을 현실적 문제에 적용해보기 위한 모의 보고서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하였으며, 전문성이 담보된 분석이 아님을 밝힌다.
첨단기술이 실제 시장에서 채택되어 성공적으로 확산되는지의 여부는, 기술의 우수성 그 자체가 아니라 해당 첨단기술제품에 관심을 가지는 고객집단 풀의 변화에 따라서 판매자가 적절한 전략을 구사하는지에 의하여 결정된다.
KT는 2018년에 평창 올림픽에서 VR/AR 기술을 이용한 다채로운 중계를 선보였다. 그런데 VR에 요구되는 특유의 낮은 레이턴시(즉 짧은 응답 시간)과 대량의 계산을 고려하면, 이러한 중계는 데이터를 빠르게 송수신할 수 있는 고속, 광대역 통신 기술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야 한다. KT는 통신회사로서, 5G 기술을 통해서만 전적으로 실감나는(immersive) VR/AR중계가 가능함을 입증하고 5G를 홍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에 5G 기술은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생태계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이는 당시에 VR/AR 기술이 소비자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충분히 무르익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에 VR/AR을 구성하는 기술들(제스처 컨트롤러, 기기간 통신(일종의 사물인터넷) 플랫폼)이 주류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정도로 성숙하려면 최소 5년이 소요될 것이라고 다수의 문헌들에서 전망했다.
이 둘을 연계하여 차별화를 시도할 때, 통신은 인프라인 반면 소비자에게 직접 와닿는 컨텐츠는 VR/AR이므로, 전자보다는 후자가 소비자들에게 직접 어필하여야 한다. 여기서 기술 확산에 대한 캐즘(chasm) 이론에 따르면, 전체 잠재적 고객집단(통신산업의 경우 한국 국민들)의 맨 앞쪽 15%에게 기술이 전파되었을 때쯤에 집중화, 차별화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해야 한다. VR/AR과 연계된 5G 통신기술이 국민의 15%에게 선택되었을 시점은 그 당시 통신기술 확산의 전례를 보았을 때 2018-2019년 정도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위에 썼듯 2017년 당시에도 2018-2019년에 VR/AR이 충분한 파괴력을 갖출 수 없다고 전망되었으므로, 평창 올림픽을 계기 삼아 VR/AR을 매개로 하여 5G 통신 기술을 파괴력있게 데뷔시키겠다는 KT의 전략은 시기상조였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 평창 올림픽 개최 이후로도 이 전략은 대중적으로 크게 소구하지 못하여, 5G 기술의 시장 채택은 3G 및 4G의 확산에 비하여 다소 애매한 수준의 폭발력만을 보여주었다. 또한 VR/AR의 대중화 역시 수많은 노하우의 축적에 의한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대감이 무색하게 상당 기간 동안 답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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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세를 반전시킬 계기는 없을까? 위의 2017년 당시 모의 보고서와, 당시에 내가 참고했던 문헌들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2020년대 초반 생성형 AI의 매우 이른 시장 데뷔였다. 사실 나는 2014년에 발표된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 생성적 적대 신경망)을 필두로 한 고성능 생성 인공지능을 보며 그 문화기술로서의 가능성에 꾸준히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자유도가 높은 플레이그라운드형 게임에서 원하는 맵과 배경, 원하는 사물, 그리고 이들을 이용한 상호작용을 생성형 AI를 통해 쉽게쉽게 만든다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기존에 전혀 생각하기 어려웠던 매우 다채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면에서 내가 필생의 꿈(?)으로 생각하고 한 십몇년 뒤엔 달성되겠지 했던 수준의 것들이, 2021년경부터 매우 급속히 대중화된 text-to-image generation(DALL-E 2, Midjourney, Stable diffusion 등 디퓨전 모델들에 기반함)과 거대언어모델(ChatGPT 등)에 의해서 순식간에 매우 실질적으로 입증되고 돈을 벌어들이는 단계가 되어 버렸다. 지금시기에 정신을 잘 차리고 재미있는 것들을 꾸준히 팔로업해 보면 좋을 듯하다. 문화기술로서의 생성 인공지능이 전혀 새로운 종류의 게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이젠 진짜 금방 되겠다는 확신이 있다.
다시 이 글의 주제인 VR/AR로 돌아오자. 당분간 답보 상태였던 VR 사용자 층의 저변을 결정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그것 또한 다름 아닌 생성형 인공지능이 아닐까 한다. 즉, VR을 모르던 사람들이 갑자기 대거 관심을 가지고 구매 및 사용할 만큼의 킬러 컨텐츠가 나온다면 결국 생성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컨텐츠에서 나올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심지어 생성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컨텐츠는 더 이상 단순히 단일 컨텐츠가 아니라, 과장을 조금 섞자면 무수히 많은 새로운 컨텐츠를 사용자 스스로 생성해서 즐길 수 있는 플레이그라운드가 된다. 단순히 시각적인 장면만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언어모델이 작성해주는 코드를 통해서 사용자가 겪는 상호작용의 형태, 더 나아가면 게임의 디자인 자체를 어느 정도 레벨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서 플레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하면 VR에서 킬러 컨텐츠의 부재가 일으키는 악순환이 매우 효과적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왜 하필 번거롭게 VR이어야 하냐 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은 안될수 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VR을 디스플레이의 연장이 아닌 건축의 연장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위의 내 주장을 통해 갈음해 본다.
결론적으로, 애플이든 누구든, 생성형 AI를 통해 VR/AR의 가능성, 더 나아가서 꼭 VR이 아니더라도 아주 새롭고 다채로운 형태의 게임적 상호작용을 적극 탐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현재 생성형 AI에 의한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형국에서 애플이라는 회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우려가 세간에 있는 편이기도 하다. 혹자는 애플이 자신이 원하는 아주 잘 정제된 방식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까지는 섣불리 얘기를 안하는것 뿐이니까 걱정할거 없다고 하지만... 글쎄다. 진짜로 그 동안 무언가를 못 해 왔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확률에 의존하는 생성형 AI 자체가 애플의 완벽주의적 철학에 다소 맞지 않는 면이 있기도 하거니와, 현실적으로 AI 연구개발 조직에 무언가 문제가 있고 제대로 운영이 되지 못해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그동안 실제로 생성형 AI 연구를 잘 못 해 왔고 이제야 대폭 채용하면서 박차를 가하는 중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긴 한 것 같다.
과연 VR이 대중화되는 순간이 오긴 올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반드시 와야만 한다는 믿음도 개인적으로 사실 없지만... 축적된 기술적 노하우들과 열심히 개발된 컨텐츠들이 크게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오면 좋지 않을까 생각은 든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생성형 AI에 의해 강하게 assist된 형태일 것이라는 확신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