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논란은 처음부터 대통령발 사고였지만, 최근에 교육부가 직접 킬러문항 (사실상 앞으로 출제되어서는 안되는 종류의 문제라는 뜻) 목록을 구체적으로 찍어서 공개해 버린 건 정말 이 논란의 정점을 찍는 초대형사고인 것 같다.
정책 찬반을 떠나서, 선정된 문제들이 애초에 누가 봐도 킬러문항이긴 하다고 동의할 만하지조차 않았다는 게 일단 문제다. 대체 이게 왜 교육과정 밖에서 출제된, 혹은 사교육을 조장하는 문제인지 의문이 많다고 한다. 심지어 수험생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 고난도 문항들은 오히려 빠진 경우도 많다는데...
확실한 방침에 의거한 전문적 검토가 아니라, 대통령실의 요구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즉 킬러문항 리스트라는게 아무튼 정치적으로 필요해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졸속으로 선정한 문제들임이 명확해보인다.
이렇게 되면 킬러문항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불명확하여 대체 어떤 종류의 문항을 말하는지가 모호해지므로, 올해 수능이 어떻게 출제가 되더라도 이 킬러문항 리스트에 비추어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왜 이게 킬러문제랬는데 나왔냐, 왜 이건 더 어려운데 나왔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다해도 한번 본 시험은 되돌릴수 없으니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그리고 만약에 (실제와는 다르지만) 교육부가 과도한 고난이도 문제들만 킬러문항으로 잘 골랐다고 치더라도 이번 조치는 여전히 문제가 된다.
설령 그 문제들이 지나치게 어렵다, 혹은 사교육을 유발한다는데 동의하더라도, 일단 현 수능 기조 내에서는 그런 문제들이 출제되어온 이유가 있기는 했던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내용적으로 보면, 엄연히 출제위원들과 검토위원들이 교육과정 내에서 출제근거를 찾아서 만든 문제들이다.
그런데 대통령실의 요구에 따른 교육부의 졸속 발표로, 기존에 이미 검토를 거쳐 출제됐던 그 문제들이 '짜잔~ 사실 알고보니 교육과정 내에서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라며, 순식간에 존재해서는 안 됐을 문제로 둔갑하는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이고 이번 발표가 제일 대형사고인 이유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의, 그리고 지금까지의 수능 출제에 대한 수험생들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결국 지금 사태에서 교육정책 및 수능 출제기조의 향방을 놓고 제대로 싸우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졌다. 대통령실이 상황 수습을 위해 발언을 철회하거나 다소 천천히 하겠다는 등의 책임지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비판 차단만을 위해 연쇄적인 졸속 논점을 생산하고 강경 일변도로 나오면서 오히려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들고, 정책의 일관적 기조라는것 자체를 찾아볼수 없게끔 헤집어놓는 것은 정말 문제적이다.
이번 킬러문제 목록발표를 포함한 여러 방침을 리셋하고 올해 초부터 예정됐던 출제방침으로 되돌려놓는게 순리가 아닐까 싶은데 이미 그렇게 하기도 늦어버린 것 같다. 아예 말이 안되는 얘기를 할경우에 그냥 무시하고 평가원 독립성 보장을 근거로 기존 방침대로 밀고 나가면 좋겠긴 한데... 그럴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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