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자율독서모임에 가져가서 읽은 책은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이다. 저자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로, 20년쯤 전에 <피로사회>로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책을 작년에 훈련소에 갔을 때 진중문고 서가에서 처음 보고는 한병철의 이름과 <서사의 위기>라는 제목만 보고 기억을 해 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눈에 띄길래 구입했다. 많은 철학사상들이 인용되어서 다소 어렵긴 하지만, 어떤 의도로 그러한 철학들을 인용하는지 잘 설명해 주는데다 책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생각보다 금방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만 보고는 사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농도짙게 가져가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적되고 전승되어 온 고맥락 리터러시가 무너지고, 즉물적인 것에 의해 지배되며 '재미'라는 가치가 과대대표되는 밈 컬쳐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때의 유해성이라는 주제에 내가 최근에 관심을 갖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책의 내용은 현대 미디어가 인간의 세계 지각과 행동 양식을 바꾸어놓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내용이었다.
서사, 즉 내러티브는 누적된 경험들이 생략과 증폭을 거쳐 서로 잇따라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서사가 붕괴되고 밈, 쇼츠가 유행하고있다. 나도 밈을 굉장히 즐기기는 하지만, 밈의 특징은 ‘의미 없는 재미’에 있다. 만약에 내가 즐긴 밈을 보고 남이 ‘어 그거 아닌데’, ‘어 그거 틀렸는데’라며 훼방을 놓는다면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 들 것이고 이는 불쾌감으로 이어진다. 만약에 정치적인 의도 하에 편집된 밈이라면 이러한 불쾌감은 상대 진영을 향한 적대감으로 이어지며 이를 응집력 삼아서 사람들을 조직해낼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정치에서의 이러한 밈적 사고를 경계하는 편이다.
실제 책 내용 역시 밈, 쇼츠, 커뮤니티 등과 깊은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었던 매스미디어 시대의 정치학보다는 인식론에 더 가깝다. 서사에서 경험된 것들의 생략과 증폭을 통해 얻어지는 일종의 신비로움, '생각할 틈'을 철학자들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대 미디어에서는 모든 것이 지극히 선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록되며 무한히 복제되고 편집된다. 매스미디어에서 정보는 그렇게 누적되고 전승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여기서 아우라는 파괴된다.
책 표지에 있는 ‘스토리 중독 사회’라는 말에서 스토리란 언뜻 보면 서사와 똑같은 말 같다. 그러나 사실 반대로, 여기에서의 스토리란 인스타그램에 있는 바로 그 스토리 시스템에서 따온 말로,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사라지는, 맥락이 제거된 정보의 향유를 말한다. 여기에 더해서, 저자는 인간학적 의미가 없는 마케팅 기술로서의 '스토리텔링', 그리고 정보화사회에서 매분 매초 트럭 단위로 쏟아지는 뉴스들도 저자는 ‘스토리’와 같은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나마 뉴스는 일방적이라면, 스토리의 경우는 소비자들이 직접 편집하고 게시하고 소비하며 밀도높은 양방향적 소통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화사회의 특징을 억압적이고 명시적인 지배를 대신하는 기술기반의 스마트한 지배라는 뜻에서 ‘신 지배형식’이라고 부른다. 끊임없이 정보를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옮겨가며 적응하기를 강요하는 디지털매체 특유의 시간성은 우리의 일상에 매우 밀착되게 개입하면서 우리를 ‘압도한다’.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그대신 자유를 최대한으로 밀어붙여서 자유를 exploit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할 틈을 더 효과적으로 지워버린다.
<24시간 시대의 탄생>(김창선)이라는 책에서도 시간의 정밀한 통제와 밀도높은 사용에 대해 다룬다. 그 책이 일터(하버마스적으로 말하면 ‘체계’이려나)와 공적 공간에서 시간이 세분화되는 것의 정치성을 다루었다면, 이 책에서는 생활적인 영역(생활세계)에서 우리가 세계와 지나치게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감각이 서사를 약화시킴을 지적한다 (물론 두 책이 속해 있는 지적 배경은 상당히 다르다). 저자는 서사야말로 과거로부터 누적된 전승이고, 우리를 생각하게 해 주고, 과거를 반성하며 미래를 기대하고 희망을 갖게 해 준다고 말한다. 반면 즉각적 정보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근대성이라는 얇디얇으면서도 매우 논쟁적이고 중요한 계기를 저자가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다소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근대의 야심찬 계몽적 기획이 후기근대 소비사회의 안온함, 즉물성 등으로 귀결되면서 실패한 셈인데, 서사의 시대와 후기근대 소비사회의 사이에 있어야 할, 근대적 이성의 이중적 면모가 이 책에서는 다소 overlook된다.
내가 생각하는 근대의 실패는 소위 말하는 '팩트'의 이중적 면모와도 맞닿아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의적으로 탈락되고 재구성되는 서사의 불완전함을, 국소적이면서도 치밀하고 보편적인 근대적 지식들이 대체하면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대가 도래하고 보니 오히려 팩트는 개별자들을 치밀하게 보편성으로 엮어내는 힘이 부족하며 국소성이라는 계기만을 너무 크게 가지므로, 오히려 훨씬 더 자의적, 즉물적, 일회적으로 소비되고 만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인류 지성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성을 딱 하나만 고르라면 이걸 꼽겠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의) 과학적 탈신비화와 (현대 소비사회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를 병치하며 다음과 같이 대비할 뿐이다. “세계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는 기존 막스 베버가 과학을 통한 이성화로 일으킨 과학적 탈신비화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투명성이 오늘날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식이다.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함으로써 탈신비화한다.” 이러한 두 탈신비화를 근대의 양면성을 바탕으로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아쉽다.
저자가 서사를 긍정하는 것은 그것이 비약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이야기를 제공해주고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서사로서의 기억은 단순한 시공간적인 연속체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적 선택에 기반한다. 사진과 달리 기억은 자의적이고 불완전하게 선택된다. 또한 기억은 시간적 간격을 늘리거나 줄인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을 건너뛰기도 한다.” 이렇게 망각과 선택을 통해 구성된 이야기야말로 우리의 삶을 우연성의 무한 연쇄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희구할 수 있게 해준다. 나도 이러한 자의적으로 구성된 서사로부터 종종 개인적인 동기부여를 얻고 사회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곤 하므로 이러한 지적은 꽤 와닿기는 한다.
여러 책들에서, '인류 마음의 심원한 곳에는 늘 종교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없을 리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나는 다소 심술이 나곤 한다.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무리 면밀히 봐도 종교성에 해당하는 심리적 계기를 딱히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서사’를 대하는 관점도 약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술이 나기도 했다. '인간은 결국은 서사 없이는 안돼! 그래야만 해!' 밑에서 쓰겠지만 나는 서사가 인간에게 갖는 강력한 힘을 인식하되, 결국은 그 강력함 때문에 오히려 서사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라서 저자와 입장이 다르다. 이를 ‘서사의 위기’가 아니라 ‘서사라는 오래된 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철학적 사유를 걷어내고 이 책의 메시지만 보자면, 약간 기성세대가 어린이들이 TV 많이 보면서 바보가 된다고 걱정하던 느낌이라서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런데 이제 그런 기성세대들도 유튜브, 쇼츠 중독에 빠지곤 한다. 현대인들이 이것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철학적으로도 벤야민의 매체미학,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 빌렘 플루서의 디지털 매체이론 등을 포함한, 어디에선가 한번쯤 봤을 이야기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막 공부하면서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각자의 문제의식과 연결지어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해보인다.
그러나 뻔하지 않은 예시들도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서 (1) 심박수, 혈압, 등 우리가 상시 착용하고 있는 센서들이 제공하는 숫자를 활용해서 헬스케어를 하는 것, (2) 인공지능 기반의 추천 (유튜브 알고리즘이나 광고 등)이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의 선호를 잘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보를 ‘떠먹여 주면서’ 우리를 압도하며 은밀하게 시스템에 복무시키는 현상은 확실히 좀 참신한 예시이고, 주의깊게 생각해볼 만하다.
그리고 위에서 몇 번 언급한, 서사에서 자의적인 (그러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보의 생략과 증폭이 중요하다는 지적 또한 꽤나 흥미롭다. 인류 문명에서 전승되는 지혜도 이처럼 생략을 통해 아우라를 획득하고 보편적 지혜의 지위를 얻는다. 그리고 현대인의 개인 생활에서도 모든 것이 빠짐없이 수치화되어 기록되면 "먼 것과 가까운 것의 차이가 지워져서", 서사 성립에 필요한 인간적인 '기억'이란 것이 없게 된다.
저자는 더 나아가서 공동체 또한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서사를 바탕으로만 조직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서사가 위기에 처하면 공동체도 붕괴되며, 여기에서 저자의 테제가 정치사회 이슈와 연결될 계기가 발생한다. 공유와 소통이 (과도할 정도로) 늘어나는데 오히려 서사가 사라지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관찰이기는 하다. 인간적으로는 점점 고립되지만 정보의 바다에는 상시 접속되어 있으면서 그 정보들에 압도되는, 말하자면 풍요 속의 빈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서사의 부재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서사가 사라진 공간에서 무엇이 새롭게 등장하는지에 더 구체적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팩트와 재미라는 두 개 바퀴의 역설적 결합을 통해 질주하는 즉물적인 밈 컬쳐가, 시시각각 형성되었다가 해체되는 무책임한 매스미디어적 정치성을 어떻게 은밀하게 조직해내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과 상충되는 이야기는 아니긴 하다.
서사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훨씬 더 많다. 사실 2018년 경에 ‘서사를 경계하라’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글을 쓰다가 만 적이 있다 (개인 드라이브에만 저장되어 있다).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것들 중에서도 사실은 서사성을 가지는 것이 많다. 증언으로서의 서사는 보편성을 확장시켜주고 더 따뜻하고 포용적인 보편성을 추구하게 해주지만, 강요되는 규범으로서의 서사는 허위의 보편성으로서 폭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이 서평의 범위를 넘는다. 나중에 더 풀어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