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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6일 월요일

『서사의 위기』(한병철) 서평

이번 자율독서모임에 가져가서 읽은 책은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이다. 저자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로, 20년쯤 전에 <피로사회>로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책을 작년에 훈련소에 갔을 때 진중문고 서가에서 처음 보고는 한병철의 이름과 <서사의 위기>라는 제목만 보고 기억을 해 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눈에 띄길래 구입했다. 많은 철학사상들이 인용되어서 다소 어렵긴 하지만, 어떤 의도로 그러한 철학들을 인용하는지 잘 설명해 주는데다 책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생각보다 금방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만 보고는 사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농도짙게 가져가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적되고 전승되어 온 고맥락 리터러시가 무너지고, 즉물적인 것에 의해 지배되며 '재미'라는 가치가 과대대표되는 밈 컬쳐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때의 유해성이라는 주제에 내가 최근에 관심을 갖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책의 내용은 현대 미디어가 인간의 세계 지각과 행동 양식을 바꾸어놓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내용이었다.

서사, 즉 내러티브는 누적된 경험들이 생략과 증폭을 거쳐 서로 잇따라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서사가 붕괴되고 밈, 쇼츠가 유행하고있다. 나도 밈을 굉장히 즐기기는 하지만, 밈의 특징은 ‘의미 없는 재미’에 있다. 만약에 내가 즐긴 밈을 보고 남이 ‘어 그거 아닌데’, ‘어 그거 틀렸는데’라며 훼방을 놓는다면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 들 것이고 이는 불쾌감으로 이어진다. 만약에 정치적인 의도 하에 편집된 밈이라면 이러한 불쾌감은 상대 진영을 향한 적대감으로 이어지며 이를 응집력 삼아서 사람들을 조직해낼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정치에서의 이러한 밈적 사고를 경계하는 편이다.

실제 책 내용 역시 밈, 쇼츠, 커뮤니티 등과 깊은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었던 매스미디어 시대의 정치학보다는 인식론에 더 가깝다. 서사에서 경험된 것들의 생략과 증폭을 통해 얻어지는 일종의 신비로움, '생각할 틈'을 철학자들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대 미디어에서는 모든 것이 지극히 선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록되며 무한히 복제되고 편집된다. 매스미디어에서 정보는 그렇게 누적되고 전승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여기서 아우라는 파괴된다.

책 표지에 있는 ‘스토리 중독 사회’라는 말에서 스토리란 언뜻 보면 서사와 똑같은 말 같다. 그러나 사실 반대로, 여기에서의 스토리란 인스타그램에 있는 바로 그 스토리 시스템에서 따온 말로,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사라지는, 맥락이 제거된 정보의 향유를 말한다. 여기에 더해서, 저자는 인간학적 의미가 없는 마케팅 기술로서의 '스토리텔링', 그리고 정보화사회에서 매분 매초 트럭 단위로 쏟아지는 뉴스들도 저자는 ‘스토리’와 같은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나마 뉴스는 일방적이라면, 스토리의 경우는 소비자들이 직접 편집하고 게시하고 소비하며 밀도높은 양방향적 소통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화사회의 특징을 억압적이고 명시적인 지배를 대신하는 기술기반의 스마트한 지배라는 뜻에서 ‘신 지배형식’이라고 부른다. 끊임없이 정보를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옮겨가며 적응하기를 강요하는 디지털매체 특유의 시간성은 우리의 일상에 매우 밀착되게 개입하면서 우리를 ‘압도한다’.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그대신 자유를 최대한으로 밀어붙여서 자유를 exploit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할 틈을 더 효과적으로 지워버린다.

<24시간 시대의 탄생>(김창선)이라는 책에서도 시간의 정밀한 통제와 밀도높은 사용에 대해 다룬다. 그 책이 일터(하버마스적으로 말하면 ‘체계’이려나)와 공적 공간에서 시간이 세분화되는 것의 정치성을 다루었다면, 이 책에서는 생활적인 영역(생활세계)에서 우리가 세계와 지나치게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감각이 서사를 약화시킴을 지적한다 (물론 두 책이 속해 있는 지적 배경은 상당히 다르다). 저자는 서사야말로 과거로부터 누적된 전승이고, 우리를 생각하게 해 주고, 과거를 반성하며 미래를 기대하고 희망을 갖게 해 준다고 말한다. 반면 즉각적 정보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근대성이라는 얇디얇으면서도 매우 논쟁적이고 중요한 계기를 저자가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다소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근대의 야심찬 계몽적 기획이 후기근대 소비사회의 안온함, 즉물성 등으로 귀결되면서 실패한 셈인데, 서사의 시대와 후기근대 소비사회의 사이에 있어야 할, 근대적 이성의 이중적 면모가 이 책에서는 다소 overlook된다.

내가 생각하는 근대의 실패는 소위 말하는 '팩트'의 이중적 면모와도 맞닿아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의적으로 탈락되고 재구성되는 서사의 불완전함을, 국소적이면서도 치밀하고 보편적인 근대적 지식들이 대체하면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대가 도래하고 보니 오히려 팩트는 개별자들을 치밀하게 보편성으로 엮어내는 힘이 부족하며 국소성이라는 계기만을 너무 크게 가지므로, 오히려 훨씬 더 자의적, 즉물적, 일회적으로 소비되고 만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인류 지성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성을 딱 하나만 고르라면 이걸 꼽겠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의) 과학적 탈신비화와 (현대 소비사회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를 병치하며 다음과 같이 대비할 뿐이다. “세계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는 기존 막스 베버가 과학을 통한 이성화로 일으킨 과학적 탈신비화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투명성이 오늘날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식이다.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함으로써 탈신비화한다.” 이러한 두 탈신비화를 근대의 양면성을 바탕으로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아쉽다.

저자가 서사를 긍정하는 것은 그것이 비약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이야기를 제공해주고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서사로서의 기억은 단순한 시공간적인 연속체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적 선택에 기반한다. 사진과 달리 기억은 자의적이고 불완전하게 선택된다. 또한 기억은 시간적 간격을 늘리거나 줄인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을 건너뛰기도 한다.” 이렇게 망각과 선택을 통해 구성된 이야기야말로 우리의 삶을 우연성의 무한 연쇄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희구할 수 있게 해준다. 나도 이러한 자의적으로 구성된 서사로부터 종종 개인적인 동기부여를 얻고 사회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곤 하므로 이러한 지적은 꽤 와닿기는 한다.

여러 책들에서, '인류 마음의 심원한 곳에는 늘 종교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없을 리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나는 다소 심술이 나곤 한다.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무리 면밀히 봐도 종교성에 해당하는 심리적 계기를 딱히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서사’를 대하는 관점도 약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술이 나기도 했다. '인간은 결국은 서사 없이는 안돼! 그래야만 해!' 밑에서 쓰겠지만 나는 서사가 인간에게 갖는 강력한 힘을 인식하되, 결국은 그 강력함 때문에 오히려 서사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라서 저자와 입장이 다르다. 이를 ‘서사의 위기’가 아니라 ‘서사라는 오래된 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철학적 사유를 걷어내고 이 책의 메시지만 보자면, 약간 기성세대가 어린이들이 TV 많이 보면서 바보가 된다고 걱정하던 느낌이라서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런데 이제 그런 기성세대들도 유튜브, 쇼츠 중독에 빠지곤 한다. 현대인들이 이것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철학적으로도 벤야민의 매체미학,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 빌렘 플루서의 디지털 매체이론 등을 포함한, 어디에선가 한번쯤 봤을 이야기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막 공부하면서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각자의 문제의식과 연결지어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해보인다.

그러나 뻔하지 않은 예시들도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서 (1) 심박수, 혈압, 등 우리가 상시 착용하고 있는 센서들이 제공하는 숫자를 활용해서 헬스케어를 하는 것, (2) 인공지능 기반의 추천 (유튜브 알고리즘이나 광고 등)이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의 선호를 잘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보를 ‘떠먹여 주면서’ 우리를 압도하며 은밀하게 시스템에 복무시키는 현상은 확실히 좀 참신한 예시이고, 주의깊게 생각해볼 만하다.

그리고 위에서 몇 번 언급한, 서사에서 자의적인 (그러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보의 생략과 증폭이 중요하다는 지적 또한 꽤나 흥미롭다. 인류 문명에서 전승되는 지혜도 이처럼 생략을 통해 아우라를 획득하고 보편적 지혜의 지위를 얻는다. 그리고 현대인의 개인 생활에서도 모든 것이 빠짐없이 수치화되어 기록되면 "먼 것과 가까운 것의 차이가 지워져서", 서사 성립에 필요한 인간적인 '기억'이란 것이 없게 된다.

저자는 더 나아가서 공동체 또한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서사를 바탕으로만 조직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서사가 위기에 처하면 공동체도 붕괴되며, 여기에서 저자의 테제가 정치사회 이슈와 연결될 계기가 발생한다. 공유와 소통이 (과도할 정도로) 늘어나는데 오히려 서사가 사라지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관찰이기는 하다. 인간적으로는 점점 고립되지만 정보의 바다에는 상시 접속되어 있으면서 그 정보들에 압도되는, 말하자면 풍요 속의 빈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서사의 부재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서사가 사라진 공간에서 무엇이 새롭게 등장하는지에 더 구체적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팩트와 재미라는 두 개 바퀴의 역설적 결합을 통해 질주하는 즉물적인 밈 컬쳐가, 시시각각 형성되었다가 해체되는 무책임한 매스미디어적 정치성을 어떻게 은밀하게 조직해내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과 상충되는 이야기는 아니긴 하다.

서사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훨씬 더 많다. 사실 2018년 경에 ‘서사를 경계하라’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글을 쓰다가 만 적이 있다 (개인 드라이브에만 저장되어 있다).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것들 중에서도 사실은 서사성을 가지는 것이 많다. 증언으로서의 서사는 보편성을 확장시켜주고 더 따뜻하고 포용적인 보편성을 추구하게 해주지만, 강요되는 규범으로서의 서사는 허위의 보편성으로서 폭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이 서평의 범위를 넘는다. 나중에 더 풀어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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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6일 금요일

독서모임 소개 및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서평

독서모임 소개

나는 늘 독서를 좋아한다고 말은 하고 다니지만 정작 시간 활용을 정말 못 하고, 다른 자잘하고 다양한 일들에 늘 압도되다 보니, 책을 실제로 펼쳐서 읽는 것은 쉽지가 않다 (결국은 하는 일의 가짓수를 좀 줄이고 본업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그런데 올해 3월경부터 들어가게 된 독서모임을 통해 책 읽는 시간을 꽤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크게 자율독서모임과 지정독서모임으로 나눠지는데, 먼저 자율독서모임에서는 각자 책을 가져와서 간단하게 소개만 한 뒤에 자율적으로 읽는다. 자연스레 약간의 수다는 떨어도 되지만 서로의 신상은커녕 이름조차 모르고, 정말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지정독서모임은 두 달에 한 번씩만 있는데, 이때는 책 내용을 두고 1시간 반 정도 토론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궁극의 독서모임은 2018년에 몇 번 나가 봤던 서울대학교 고전연구회다. 거기서는 서로에 대한 과도한 관심 없이 오직 문학책의 내용과 거기서 드러나는 인간관 및 세계관을 둘러싼 toxic한 발제와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견주어보며 교류한다. 조용하게 책 좋아하는 문학소녀, 문학소년들이 사실은 제일가는 광인들이라는 격언을 확인할 수 있는, 이상하지만 편안한 자리랄까.

그런데 이 독서모임은, 꼭 소설이나 인문학 책만 읽는 게 아니고 주식투자, 종교, 자기계발 등등 가벼운 실용서적 읽는 분들도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고전연구회처럼 독서인들끼리의 편안한 분위기가 났다. 적당한 갓반인(?) 분들이 부담없을 정도의 친화력으로 챙겨주시고, 가벼운 수다도 떨면서 각자의 페이스로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책을 가져가서 일주일에 한두시간쯤 집중해서 읽기에 아주 좋은, 부담없는 자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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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전 배경 조사

이렇게 자율독서모임만 참석하다가, 처음으로 가보게 된 5월의 지정독서모임에서는 지정도서로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선정되었다.

지정 말고 자율독서 시간에는 사람들이 각자 가져온 재테크 책이나 종교책, 자기계발서 같은것도 딱히 읽는 데 제한이 없는데다, 기본적으로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한 논쟁은 피하는 분위기의 모임이다보니,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2020년대에 재호출된 이 책이 선정된 것은 조금 의외였다 (관리자님도 분란이 생길까봐 걱정이 많았다고 하셨다). 예컨대 4월 지정도서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는데, 이 책도 이야깃거리는 많지만 현실 문제에 대해 논쟁이 발생할 지점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쯤부터 양귀자의 모순이 여러 곳에서 제목이 언급되고 꽤 인기를 끄는데도 그 명확한 계기를 알기 어려워서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아래의 논문(조하린, 연남경, "'양귀자 현상'을 둘러싼 페미니스트 독자 행위성 연구," 이화어문논집 64 (2024).)을 보니, 모순』과 『나는 소망한다~』가 트위터에서 플로우를 타면서 인기를 얻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더 선행하는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논문 외에도 최근의 이러한 '양귀자 현상'을 다룬 논문이 몇 건 더 있었는데, 책을 읽기 전에 영향을 받을까봐 논문들을 자세하게 읽지는 않았다.


이 책은 장르론적으로는 추리, 범죄소설에 가까운 점이 있는데다 출판 직후(1992년)에는 오히려 페미니즘의 탈을 쓴 반페미니즘적 통속 소설이라고 평가되는 경우도 많았다는데, 최근에 페미니즘 서적으로 재호출되고 해석이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이 흥미로운 듯하다. 읽으며 이 지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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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서평




이 단락에서는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작성한 두서없는 소감을, 독서모임 사람들의 토론을 마친 뒤 조금 보강해서 써본다.

일단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원래 나는 소설책을 논픽션에 비해서도 특히 잘 못 읽는다. 일단 작가가 밀도높게 직조해놓은 인물과 세계에 dive in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내용이 100% 파악되지 않으면 페이지를 잘 못 넘기고 계속 앞으로 돌아가는 강박이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이 책은 생각해볼 점이 많으면서도 아주 잘 읽혔다.

나는 주인공인 강민주가 세상에 자신의 메시지를 무리하게 발신하려는 과정에서 파국이 일어날것으로 예상했는데, 정작 그 과정은 매우 스무스했고 세상 사람들도 여기에 호응해서 열광한 점이 일단 의외였다. 강민주의 이러한 메시지 발신과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딱히 자세히 묘사되지조차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다소 평면적인, 소설의 탈을 쓴 페미니즘 교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오히려 주요 인물들 위주의 군상극으로 진행된다.

파국이 일어나는 것은, 강민주가 뜻밖에도 인간적인 매력과 연민, 개인적 관계에 물들고 그의 계획이 실패해서이다. 그런 후반부는 어찌보면 다소간에 전형적인 흥미 위주의 추리소설 내지는 범죄소설, 혹은 결말에서 등장인물의 죽음이라는 (자극적이지만 그런만큼 전형적인) 장치를 통해 긴장을 폭발시키곤 하는 하나의 잘 짜여진 연극을 보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저자 또한 희곡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후반부의 주요 소재 또한 연극이다. 그래서 소설의 볼륨이 후반부로 갈수록 확 좁혀지는 기분이다.

강민주는 매우 강한 자기확신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똑똑하고 돈도 많아서 그러한 자기확신에 근거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강민주의 특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 또한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비범함'일 것이다. 이 인물의 성장 배경과 사고방식에 대해 알게 되는 앞부분이 독서 과정에서 사실 제일 재미있었다. 강민주는 세상에 대해 완전히 냉소적이지만은 않다. 뛰어난 취향과 안목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 있는 것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은 즐길 줄 아는 강인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바깥의 것들은 가차없이 깔보는 면이 있다.

강민주에 대한 내 '비범함'이라는 해석은 독서모임에서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다. 나는 나 자신 및 나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마치 강민주처럼 자기가 똑똑하고 자기의 안목을 신뢰할 만하다는 확신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경우(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은)를 많이 봐 와서, 이런 캐릭터성이 다소 과장되었을지언정 충분히 내적 모순 없이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독자들은 강민주의 이런 태도를 매우 생소하고 비현실적이며,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강민주에게도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본연의 어떤 모습이 억압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이 백승하를 통해서 회복되는 과정이 소설의 주요 줄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강민주의 비범함이 아버지의 심각한 가정폭력을 겪으며 어머니에게 강하게 키워진 결과임을 감안할 때 이 또한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비범함'이라는 내 해석을 조금 더 끌고 가 보자면, 강민주가 백승하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발휘(아들을 만나게 하면서 단서를 남기는 것)하거나, 김인수를 끊어내지 못하고 전화에 응하는 장면 등은 독자에게는 백승하와의 관계에 물들게 되면서 일어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강민주 스스로에게는 이것조차 비범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비범함 덕분에 정당화된다.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고 실패할리가 없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해도 돼. 그러나 독자가 볼 때 그러한 행위들이 결국에는 강민주가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데 구체적으로 기여하고있다.

이는 후반부에서 강민주의 동의 하에 ‘연극 속에서’ 백승하와 강민주의 권력관계가 역전되는 것과 겹쳐 보인다. 그리고 연극 속 권력관계 역전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결국 연극 바깥의 강민주가 실제 바깥 상황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발생하는 파국과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해석에 차이가 나는 부분은, 강민주의 계획이 (심지어 대중의 호응과 관심을 얻었음에도)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와 관련해서이다. 계획이 실패한 이유가 그저 그의 비범함이 어떤 억압의 결과로 형성된 허위의 것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회적 형식에 따른 권력관계 때문일까?

이는 소설이 출간 당시에 페미니즘의 외양만을 취한 상업소설이라고 비판받았던 이유와 결정적으로 관련된다. 결국 전통적인 남녀관계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흥미, 통속 위주의 스토리로 마무리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급진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비판은 일리있다. 그러나 앞부분에서 화자인 강민주를 통해 세밀하게 묘사되는 여성주의 담론(작가의 문제의식 없이는 불가능한)을 보았을 때 페미니즘적 재해석의 가능성은 많아 보인다. 최근에 재조명받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강민주가 개인적 관계에 물들고 감정의 변화가 묘사되면서 통속소설과 같은 전개로 끝나는 것이, 당대에는 '폭력적, 혁명적인 해결방식은 결국 끝이 안 좋다', 혹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대로) 감정에 물드는 것이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이며 그걸 계속 거부하기는 어렵다' 식의 다소간에 기만적인 평화주의나 전통주의로 해석되어 첫 출판 당시에 반페미니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래에서 자세히 쓰겠지만, 실제로 이번 독서모임의 토론자들 중에 꽤 많은 수가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이 책의 결말이 찝찝하지 않고 해피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은 평화주의적 독해의 가능성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이, 현대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재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면도 있어 보인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얽히면서도, 조건지워진 사회적 형식을 급진적으로 극복하고 자기 신념을 관철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최근에 재조명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한다.

심지어 강민주는 자신의 비범함을 바탕으로 백승하를 설득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꽤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 백승하는 자신이 선망받는 남자배우로서 인기를 얻어온 바로 그 방식,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분야인 '연기'를 하자고 요구함으로써, 그토록 비범하고 자신감에 차 있던 강민주를 굴복시키고 본인이 상황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상술했듯이, 이것이 ‘감정에 의해 흔들리는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단순히 재현하면서 이 작품을 통속소설에 그치게 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당대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점도 이러한 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현을 통해 젠더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방식의 재해석도 가능해보인다.

내가 느끼기엔 백승하의 부드러움은 강민주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물리적인 폭력과 반대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남성의 젠더권력을 동원하는 또다른 방식일 수 있다. 백승하는 힘든 시간을 겪지만 결국은 하나도 잃은 게 없이 끝난다. 이것도, 전통적인 마초적 남성상과는 다른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인간적 연민에 호소해서 상황을 장악하는 능력,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너무나도 모범적인(?) 내용의 인터뷰를 함으로써 또 인기 남배우로서 박수를 받게되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도 남성의 부드러움과 스윗함 역시 간접적인 형태의 젠더권력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켜주었다.

결국 백승하는 실제로 강민주를 만나서 생각이 바뀌기까지 했음에도 결국은 원래 인기를 얻은 그 방식으로 살아갈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작중에서 뭇 여성들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강민주의 설파에 생각보다 긍정적이고 열광적인 반응들이 있었고, 백승하 본인도 생각이 바뀐 부분이 많다는 점은 재미있는 상상의 여지들을 남긴다). 여성 입장에서 태도를 급진적으로 관철하는게 쉽지 않은 것만큼, 남성 입장에서도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권력관계의 극복을 실천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점들을 들어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상당히 씁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서모임에서 이야기 나눈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이 소설은 비록 강민주가 범죄를 저질렀으니 좋게 끝나기는 애초에 어려웠지만, 본질적으로 강민주와 백승하가 서로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우게 된 해피엔딩이고, 남녀 갈등을 다루는 것 같지만 사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갈등을 조율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작가의 말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긴 하다고 한다). 물론 내가 백승하의 스윗한 카리스마와 연극 연습 제안이 젠더권력을 동원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한 것에 동의를 표해 준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두 가지 독해가 정말 다르면서도 화해의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 이게 바로 90년대와 2020년대의 서로 다른 독해와도 겹쳐 있는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독서모임 관리자님이 제시한 공통 질문지를 공유해 본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질문지]
오늘 독서모임에서 함께 나누면 좋을 것 같은 질문 간단하게 작성해 보았어요. *이 질문지가 필수는 아니기 때문에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1.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제목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이나 생각은?

2. 주인공(들)이 품고 있는 '금지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 인물의 욕망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었나, 아니면 거부감이 들었나?

3. 작품 속 인물들은 왜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억누를 수밖에 없었을지? 현실의 우리 사회와 비교했을 때, 작품 속 사회 구조는 어떤 점에서 비슷하거나 다르다고 느꼈는지?

4. 양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5. 나에게도 ‘금지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외부의 시선, 두려움 등)

6. 인상깊었던 문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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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4일 금요일

윤석열 파면 이후: 헌정질서 복원, 정치문화 복원 그리고 사회체질 개혁

위헌 위법적 비상계엄을 일으킨 대통령의 임기가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에 따라 조기에 종료되게 되었다. 다행스럽긴 해도, 기쁘기는커녕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비상계엄선포와 그 이후의 행보가 사회에 남긴 상처와 분열이 너무 크다.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위헌 사항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아서, 탄핵소추와 파면에 이르는 상황 자체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 이상 오늘의 선고내용과 결과는 상당히 늦어지기는 했지만 순리와 상식에 부합하며 다행스럽다고 하겠다.


이러한 오늘이 있을 수 있도록 12월 3일 그날 밤 빠르게 국회에 나가서 비상계엄 해제에 일조한 국민과 국회의원 및 보좌진들에게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느낀다. 위헌 위법적 조치에 대한 국방장관과 일부 군 수뇌부의 동조에도 불구하고, 40여년 전 광주와 달리 더욱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르지 않게 한 군경들의 민주의식도 분명히 평가되어야 한다.


그 이후의 정치적 상황 또한 대체로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 내에서 진행되어 사회의 민주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혼란상 속에서 헌정질서를 정면으로 해치는 일도 몇 사람이 마음먹으면 그냥 일어날 수 있구나, 그런 발언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구나 하는 국민들의 집단경험은 대의제 권력기구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켰다. 이러한 부정적 집단경험이, 추가적인 혼란보다는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지에 대한 지혜로 연결되었으면 한다.


먼저 확실한 책임의 추궁을 통해 헌정질서를 복원하고, 그 다음으로는 여야 할것없이 정치문화를 복원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인구감소와 성장동력 상실 등으로 예정된 어두운 미래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며 사회체질을 개혁해야 할테다.


파면 결정 후 찾아간 겐로쿠우동 홍대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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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6일 수요일

플로우(2024) 감상평

애니메이션 영화 플로우(2024)를 보러 강남역 CGV에 갔다.



귀여운 까만 고양이와, 내가 인터넷에서 알게 된 우아한 조류인 뱀잡이수리가 등장한다고 해서 기대하면서 봤다. 대사가 없는 영화인데, 하필 전날 세네 시간밖에 못 자는 바람에 틀림없이 보다가 졸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대사가 아예 없는데도 꽤나 박진감 있어서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냉혹하고 강대한 자연의 현실적인 느낌과, 뭐라 설명하기 힘든 환상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두 가지 느낌 모두 이 영화에 아주 조리있는 줄거리나, 배경이나 사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없다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터전을 제공하지만 이유없는 파괴를 일으키기도 하는, 소중하고도 두려운 존재이다. 설령 인간의 직간접적 개입을 비롯한 어떤 메커니즘이 제시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자연화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바로 내게 그런 일이 그런 순서와 규모로 일어나야만 하는 합리적 이유는 없다.

이처럼 작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흐름들 또한, 어떠한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농도짙게 디자인되었다기보다는 실제 자연이 행동하는 방식처럼 다소 두서없이 일어난다.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배경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거의 대부분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만, 그 규모가 장대하게 표현이 되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더한다.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조금씩 의도를 견주어 보며 상황에 따라 협력하고, 그렇지만 때로는 미련없이 헤어지거나 냉정하게 공격하기도 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하는 동물들 특유의 관계맺음 방식도 무척 인상깊었다. 대사가 없어서 이런 점이 더욱 잘 표현된 것 같다. 유튜브에 뜨는 동물 영상들이나, 대사가 전혀 없는 일부 실험적인 공연예술에서도 짧지만 이러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이 영화에 기묘한 포근함을 부여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너무 피곤하게 서로 지지고 볶는 것보다는 이와 같은 담백한 관계가 좋아 보이기는 하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또한 인간으로서의 해석일 테니까 말이다.

이런 점들과 어울리게도,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동물들의 행동 역시, 어떤 상징성을 아주 농도짙게 가져가거나 고정된 메시지를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신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사건들에 대응하면서 뭉치고 흩어지는 귀여운 동물들의 모험을 보며, 삶과 존재에 대해 각자 열린 생각을 가지고 서로 나눌 뿐이다.

아트워크도 무척 아름답고 분위기도 몰입감 있어서 하루가 넘게 지났는데도 인상에 퍽 오래 남는다. 주변에 많이 추천해서 함께 소감을 나누고 싶은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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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4일 월요일

상황적 우연에 따른 언어이해의 오류는 인간, 언어, 세계 사이의 다채로운 상호작용이다

'황망하다'는 말은 슬프다기보다는 정신없다는 뜻인데, 장례식을 치르는 상주들이 보통 '혜량해 달라'라는 말과 함께 주로 이 황망하다는 말로 소식을 전하다 보니, 슬프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서 종종 그렇게 쓰이는 것 같다.

이 얘기를 함께 나누던 다른 분의 보충적 의견에 따르면, '허망하다' 등의 단어와 발음이 유사하다 보니 여기에 이끌려서 더 그런 점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단순한 어감, 몇 가지 상황적 우연, 다른 단어 및 형태소들과의 유사성 등이 겹쳐서 단어의 뜻이 사전적인 것과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곤 하는 것이 나는 굉장히 흥미로운 현상 같다(나는 이런 것을 '이끌린다'라고 표현하게 되는데, 이런 언어 현상들 관련해서 위키 등에서 많이 본 표현이라서 그런 듯). 의미와 기표는 서로 별개의 층위인데, 실제로 언어가 구사될 때는 언어들간의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나, 세계의 필연적 구조의 영향 하에 그 층위를 활발하게 넘나들면서 다채로운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연과 혼동에 의해 쓰임이 변화하더라도 언어정책은 어휘들의 사전적 의미와 정확한 어법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등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현상들은 세계와 인간의 지극히 다채로운 상호작용이므로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황망하다'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얘기했던 또다른 예시로는 '억하심정'이 있다. 사전적으로 보면 억하심정은 사람의 마음 중에서 꾹 눌러 놓고 겉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속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 중에서는 부정적이고 억울한 마음이 아무래도 많게 되어 있다 보니, 억울하고 한이 맺혔다는 뜻으로 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사용하는 듯하다. 물론 사전적인 뜻대로, 꼭 한이 맺힌 느낌이 아니라도 뭔가 음침한 속마음을 갖고 행동하는 것 같은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은 것 같기는 하다.

또한, 답답하고 북받친다는 의미의 '억하다'라는 단어가 존재하므로 '억한 심정'이라는 표현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런 표현과도 상호작용하는 것 같다. 다만 '억하다'라는 말이 '억한 심정' 외에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억하심정' 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덕분에 그 영향을 받아서 (예컨대 억하심정이라는 말이 머리속에 떠오르긴 했는데 그게 알맞지 않은 쓰임새임을 인지하고 있어서 바로 수정할 때) '억한 심정'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위 내용과 약간 관련될 수도 있는, 2017년경 별다른 목적 없이 간단히 작성해 본 글을 하나 첨부한다 (아래에 임베드). 여기에서는 언어로부터 우연하게 유발되는 감각인상(편의상 '언감 현상'이라고 칭함)이,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님에도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인식 구조상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언감 현상은 감각과 의미가 직접 맞닿아 상호작용하므로 아주 세련된 예술적 계기까지는 아니지만 주관적 보편성을 가지므로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위키위키 류 사이트 이용자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떡밥 중에 하나인 Bouba-Kiki 효과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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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1일 금요일

미술과 음악에서 균일성에 대한 왜곡된 인지와 이를 보정하는 표현법

디자인 분야에서 정사각형과 원의 폭이 같으면 원이 더 작아 보이기 때문에, 원의 크기를 일부러 더 키워 주어야 두 도형의 크기가 똑같아 보인다거나 하는 여러 노하우들이 있다 (여기서 크기가 같다는 것은 면적이나 길이 등 정량적인 기준이 아니라, 사람이 딱 보기에 같은 크기라고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사진 출처: medium 포스트 (링크))


그런데, 음악에도 비슷한 게 있는 것 같다. 한 마디 내에서 앞쪽이나 뒤쪽에 가사 음절들이 쏠려 있거나, 멜로디의 상승감 및 하강감이 두드러지면, 분명 박자가 정확히 맞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저는 것처럼 들릴 때가 많다.

그런 효과가 덜 느껴지도록 송라이팅 자체를 잘 하거나, 아니면 가창을 할 때 살짝 밀거나 끌어서 부르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이런 것들이 음악 프로듀싱 하는 업계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이슈가 아닐까 싶다.

왜 이 생각을 갑자기 했냐면,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aespa의 Whiplash 음원 레코딩이 어느 정도 후자처럼 디렉팅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음방 영상을 처음으로 봤는데, 박자가 잘 맞는데도 음원과 차이가 좀 난다.

보컬이나 악기를 녹음할 때 박자 퀀타이즈를 너무 칼같이 하지 않는 게 낫다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컨텍스트도 있을 것 같다. 단순히 박자가 나갔을수도 있지만, 감각이 뛰어나고 숙련된 연주자는 이런 것을 잘 고려해서 표현하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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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0일 목요일

국제질서 급변과 인구 급감을 앞두고... '평범한' 과학 커리어란 가능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수장이 추진하는 일들의 귀결은, 지금까지 빚과 지출을 늘리며 대내, 대외적으로 확장되어온 미 연방을 어떤 의미에서 한 번 청산하는 것과, 더욱 노골적인 부자들만의 나라를 만드는 것인 듯하다. 큰 정부를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어떤 평균적 의지(별로 정합적으로 작동가능한것 같지는 않은)가 이런 결과로 드러나고 있는 셈인데, 그 의지를 표명하는 개인들조차 지금의 이런 사태까지 속속들이 예상하거나 의도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경제 및 외교통상 관련 조치뿐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언론, 시민, 외국인들의 비판을 막고, 기후, 다양성 등의 의제를 시민운동과 학술연구 양쪽에서 완전히 죽여놓다시피 하는 걸 보면 순식간에 유럽보다 중·러에 가까운 나라가 된게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다. 이게 회복이 가능할까?

특히 학계조차 컷을 당하고 탄압을 받고 있는걸 보니 참으로 무서운 일인 것 같다. 안그래도 우리나라 기초과학은 일본과 달리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생태계가 돌아갈 만큼의 볼륨은 아직도 안 되는 것 같아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협력이 지극히 중요할 텐데... 이는 한국인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안 좋은 시그널이다.


한국이건 세계이건, 왜 내가 어렸을 때까지는 그런대로 좋다가 하필 내가 커리어를 꾸려나가고 책임있는 사회인으로 살아가야 될 시기부터 이렇게 흉흉하게 되는가를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다. 이것은 어릴 때의 순진함에 의한 착각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세계가 바뀌고 있는 것임이 명백하다. 앞으로 어떻게 삶을 꾸려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데, 앉아서 고민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고, 결국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차라리 한국 내에서 가능한 커리어패스가 충분히 있다면 몸도 편하고 좋을 텐데, 세계를 유랑해야 하는 한국 과학도의 삶이란... 과학도들은 미국유학에 대한 흔한 한국적 관념처럼 '급'을 높이려는 욕심 때문에 해외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기초과학계의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디폴트로 굉장히 국제화되어 있는데다, 한국인 연구자들의 경우 해외 아니면 커리어패스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리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몸이 힘들고 정착이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해외를 돌아다니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를 알아야 한다.


내가 박사 졸업을 할 시점에도 미국의 상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말년 만화에서 유래된 유행어인 '명예로운 죽음'처럼 '명예로운 미국못감(?)'을 하고 유럽, 일본, 심지어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고자 시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다시 군비증강과 전쟁의 시대로 돌입하는 지금의 국제정세로 보면 과연 유럽 혹은 다른 나라라고 해서 안전할지... 그 이전에 한국은 멀쩡할지?


앞으로 인구의 급감으로 인해 대학이랑 연구소의 자리들도 점점 줄어들 텐데, 내 실력을 보니까 나는 개인적인 안정성을 포기한다면 평범하게 자리를 지키는 연구자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늦지 않은 나이에 학계에 정규직으로 정착이 가능할 정도로 좋은 연구 업적을 쌓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인 팔자만 생각한다면, '명예로운 학계포기(?)'와 함께 빠른 취업을 생각하고 과학은 애호가로만 남는 것이 사실 제일 좋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수학, 물리학 하는 학생들 중에 일부 자존심 세고 소명의식 높은 부류는 취업하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난 공과대학 출신이다 보니 이런 면에 있어서는 생각이 유연한 편이기도 해서 그런 생각까지는 없다. 사실 그럴 입장 자체가 못되는 게, 요새 박사 취업도 굉장히 어렵고 (신진 기업들뿐 아니라 전통의 삼성만 봐도... 과거 전기전자/물리학쪽 박사 삼성취업은 과장 많이 섞어서 럭키 티맥스 느낌이었다고 하지만 작년엔 박사 채용이 거의 없었고 특히 하반기 삼전은 박사채용 0명이었다는 말이 있음), 실제 혁신은 인더스트리에서 훨씬 많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후과를 생각하면 사실 이런 글도 올리면 안 되기는 할테다. 과학도로서도, 한 명의 시민으로서도 참 갑갑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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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9일 일요일

기본값의 왜곡, 헌법재판의 개념, 가벼움이라는 착각

결국 원조 내란수괴인 전두환 일가까지 등판해서 윤석열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윤석열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다. 무려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퇴행적, 미래적(?) 극단주의 모두를 적극적으로 띄워 줘 버린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전국민의 관심이 쏠린 최고로 권위 있는 채널에서 공식 발언으로 부적절한 인식이 나가게 되면, 우리 사회의 기본값이 되는 합의의 선 자체를 확 낮춰 버린다. 그러면 음지에서나 머물러야 할 온갖 극단주의적 주장,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져야 하는 군사독재의 그림자가 함께 수면 위로 떠올라서 제도권에 안착하게 된다.

이건 비상계엄 사태 이전에도, 윤석열 정부 내내 역사관을 중심으로 한 이런저런 문제들 관련해서 계속 그래 왔다. 그래서 5.18 부정론을 비롯해서 역사관 관련한 온갖 이상한 주장들이 기세등등해져서 함께 튀어나와서 정상을 참칭하게 된다. 이것이 제때 비판되지 못하고 장기화되면 말 그대로 정상, 흔히 말하는 뉴 노멀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비상 계엄선포 및 탄핵심판에서 윤석열 및 그 대리인단이 온갖 짓을 다 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나는 이를 기본값 조정에 의한 인지 왜곡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치 관련한 기계적 중립 및 양비론으로의 압력이 심한 편인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되면 정치 중도층과 무관심층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어느새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반대로 문제가 아닌 걸 문제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지도자가 뻔뻔할 대로 뻔뻔해지면 이렇게나 악영향이 크다. 정치권력의 책임성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다.

2020년대의 세계를 보면 헌정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합의를 부정하는 극우의 정치세력화가 어느정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통령 본인이 이에 진심으로 심취해서 찬동해 버리는 바람에 그 속도와 규모가 대단히 가속화되어, 순식간에 세계 어느 제대로 된 민주국가보다도 심각하게 제도권에 올라가 버렸다.

거기에다가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국가행정조직 중에서도 굉장히 특수한, 군경이라는 국가폭력의 유일한 합법적 담지자를 위헌적, 불법적으로 동원해서 국민들 앞에 대치까지 시키면서, 폭력적인 헌정 부정세력들을 기세등등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이번에 새로 발표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결함있는 민주주의로 떨어졌던데, 내란 옹호의 세력의 주류화를 조기에 떨쳐내는 데 실패한다면 이는 일시적인 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급기야는 40년 전의 원조 내란수괴도 뻔뻔하게 다시 기어나와서 저러고 있으며, 지난 몇 주 동안 보았듯이 거대 여당 중진들도 광장정치에 고무된 나머지 옹호해서는 안 될 것까지 옹호하고, 찬동해서는 안 될 것까지 찬동해 버리고 있다. 이게 우리나라의 정치에 아주 안 좋은 여파를 장기간에 걸쳐서 남길 것이다.

전재국 씨가 시공사 돈 떨어져서 나오는 거다... 이런식으로 가볍게 치부할 게 아니다. 극우 기독교 광장정치도 돈으로 동원하는 거니까 무시하면 된다고 가볍게 치부하다가 순식간에 이렇게 와버렸지 않은가 (물론 MB랑 박근혜 때 국정원과 청와대가 진짜로 우파 단체에 나랏돈 줘 가면서 집회 동원하고 했던 것은 그것대로 또 추적하고 기억하고 비판해야 함). 마르코스가 기어이 재집권해 버린 사태가 남의 일만은 아니다.

이 상태에서 정말 혹시나 탄핵이 기각되기라도 하면, 헌정체제 파괴를 획책한 내란이 광장정치의 힘까지 더해져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고, 정말 문자 그대로 나라가 망한다. 이미 적당한 정치적 화해로 끝날 수가 없게 갈 데까지 가버린, 야당과 일부 헌법기관을 돌이킬 수 없게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버린 인물이 윤석열이다. 헌법재판소도 외부로부터의 여러 정신적, 물리적 압박이나 정치여건에 좌고우면하지 말고, 헌법 위반사항을 공정하게 따져서 탄핵심판 선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본질적으로 고도의 정치적 판결을 하는 기관이라는 언설도 꽤 많이 보이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에도 동의가 안 된다. 쟁점이 갈릴 만한 통상의 위헌법률심판 등에서는 헌법에서 근거를 찾되 재판관들의 개인 성향, 국민 여론, 사회상규 등이 반영될 수 있고 여기에 정치성이 개입될 수는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말그대로 헌법의 규범력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판정을 내리는 기관이지, 그 외의 다른 개념규정은 부차적이거나 아예 불필요하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사태의 경우 헌법 위반사유가 명확하고 피청구인의 헌법 수호의지가 부재한데다, 위반 사항이 단순히 문언 상의 디테일에 대한 절차적인 부분도 아니고, 헌법정신 그 자체를 정면으로 파괴하려 했던 상황이다. 이럴 때에는 정치나 여론이 아니고 오직 헌법에서 근거를 찾으면 '정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오히려 그 정답이 아닌 외부 여건에 좌고우면해서 판결이 내려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치적 판결일테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체제 파괴를 선동하고 있는 내란범(형사 판결 안 나왔는데 내란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지적은 받지 않겠다)을 다루는데 있어서 절대로 안이해서는 안 된다. 속 편한 소리들 좀 그만 보고 싶다.

워낙 요즘이 해체주의의 시대, 가벼움의 시대인 만큼, 이게 '옛날의 그' 진짜 계엄령, 진짜 내란, 진짜 군사쿠데타와는 다른, 뭔가 가벼운 것이라고 사람들이 계속 착각하는 경향도 있다. 나는 심지어 윤석열 본인도 어느 정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되기도 한다. 역설적이지만 계엄이 (너무 다행히도) 일찍 해제된 덕분에 사람들이 더 그렇게 느끼는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한국에서 국민들의 기본권이 순식간에 제한되고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훼손될 수 있는 순간이었고, 국민들과 국회의원 및 보좌진들이 그날 밤 용기있게 막아냈다.

그리고 광장에서 내란을 옹호하는 전광훈, 손현보, 전한길이나 그에 영합하는 여당 중진 의원들도, 속으로 계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돈이나 정치 여건 때문에 잠깐 그런다는 식으로 평가절하(?)를 당하곤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심각한 사안 앞에서, 아무리 잠깐의 정치 여건 때문에 파면 전까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 악행의 무게는 그 행위 하나하나로 조목조목 정확하게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계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쉽고 당연한 일이지만, 여당의 분위기 자체가 위처럼 박살나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그런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내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윤석열과 명확히 선긋기를 하는 의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평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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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8일 토요일

윤석열 구속취소를 보며: 직무정지의 실효성, 그리고 대통령 직속기관 개편 제안

다시 힘든 시간을 마주하며...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에 따른 직무 정지 이후로도 대통령실은 작동하고 있으며 회의도 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여도 행정관료 조직을 동원한 통상적인 범위의 '나랏일'을 못 하는 것뿐이지, 훨씬 정무적인 보좌의 성격을 갖는 대통령비서실 고위 인사들이랑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접촉해서 정치적, 비정치적, 법적, 비법적 헛공작을 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직무정지 때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통령비서실의 기능을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음. 이미 비상계엄 선포를 통해 신뢰 배반의 끝을 한번 본 사람이라, 안 되더라도 쓸 것 같긴 하지만). 그 사람들 다 관료적/자기보신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한몸인 사람들이지 않나. 그나마 특활비 삭감 해놔서 좀 제한되려나.

지금의 상황은 대통령이 정상적인 헌정의 틀 내에서 나랏일을 잘 했냐 못 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선을 한참 넘어가서, 아예 다른 헌법기관을 무력으로 건드리면서 직접 헌정위기를 초래한 상황이라는 점을 아무리 반복하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사람이 직무정지든 아니든 석방된 것 자체가 너무 걱정이 된다.

나랏일은 대행한테 맡기고 정국 대응 구상할 시간만 엄청 많은 상태인 거니까 나랏일 안 해도 되는 게 오히려 꿀이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석방돼 있는 사람이니까 사실은 나랏일에도 그의 의중이 작용을 안 할 수가 없을 것이고.

대통령이 최측근 동원해서 주요 라인 장악한 상태에서 선을 넘으려면 거하게 넘을 수 있다는 게 드러나 버리고, 상대진영이나 일부 헌법기관을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적대시하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 직무정지조차 그 실효성에 한계가 크다고 느껴져서 솔직히 절망감이 크다. 나는 대통령제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제대로된 민주국가에 대통령중심제가 은근히 드물다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을 정도다. 지금은 정말 exceptional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보완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폭주했을 때 어떻게 막을 것인지 앞으로 국가적으로 많은 고민과 디테일한 보완이 필요할 것이고, 그 핵심으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통치구조 자체를 바꾸는 큰 일인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 개헌 등을 안 한다면) 대통령 직속기관 개편을 통한 권력의 분산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하는 대통령실과 국가 행정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입장에서의 느슨한 상상일 뿐으로, 불가능하거나 말이 안되는 얘기가 많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지난번에도 썼듯이, 경호처는 정무적 성격을 빼고 철저히 대통령 개인의 물리적 안전을 위해 경호하는 조직으로 다시 축소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경호처장(혹은 경호실장)에 최측근이 임명되고 경호처가 정치화되면서 헌정위기가 생긴 게 이번을 포함해서 벌써 몇번째인가. 이미 김영삼 정부나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이전 정부들에서 몇 번 했던 것처럼, 그야말로 '원래부터 직업이 경호원인' 사람을 공채를 하거나, 경호처에서 내부승진으로 발탁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정착시켜야 될 듯하다.

대통령비서실도 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군사 안보 관련된 기능이 대통령비서실이 아닌 국가안보실, 국정원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일단 다행이지만, 대통령의 개인 품위유지나 일정 관련된 '비서' 기능과 정치/경제/정책현안에 대한 보좌기능은 대통령비서실이라는 조직 아래에 여전히 하나로 합쳐져 있는데, 이것도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지금 정부에서도 대통령비서실 밑에 '대통령비서실장'이랑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둘다 장관급으로 동등하게 이원화되어 있기는 하다. 그럴거면 아예 실을 나눠서 더 확실하게 분리하면 어떻냐는것.

그럼으로써 위에 경호처장에 대해 말한 것처럼, 대통령비서실장도 정무적 최측근의 성격을 제거하고 그야말로 생활, 품위유지, 일정 등과 관련된 비서 역할 위주로만 하게 하는건 어떨까 상상해 본다. 더 나아가서, 홍보, 정무, 민정수석실의 역할도 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정책실은 대통령이 국무회의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일을 할지를 보좌해서, 국무회의를 중심으로 현안관련 국정이 돌아가게 한다던지.

물론 국가원수라는 위치상 개인적인 보좌와 업무 관련 보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이 많을 수밖에 없고, 비서라는 건 그 모든 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자리인지라, 비서실을 위처럼 쪼개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할수도 있다. 동의가 되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너무 강한 권한을 생각하면 불편이 따르더라도 이런 식으로 분산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방송통신위원회는 왜 대통령 직속기관인지도 사실 모르겠다. 윤석열 당선되고 나서 MB 때랑 똑같이 (심지어 이동관은 그 때랑 아예 같은 사람임..) 문제 많은 인사들을 방송 쪽에 등용해서 노골적으로 방송장악을 시도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방송사들을 괴롭히는 꼴을 봤으니... 보다 독립성을 기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할 듯하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현재진행형으로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 돼버린 상황인데, 구속기간에 대한 지극히 이례적인 해석까지 근거로 들면서 구속취소 판결을 한 재판부도 이 점에서는 너무 안이하다고 생각이 든다. 사실 잘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수사권 갈등이나 서부지법 영장청구에 대한 논쟁이 많은데, 이미 다른 재판부에서 문제없다고 판단이 이뤄진 부분들임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권 관련된 게 상급심 등에서 문제가 돼서 사건이 파기환송되거나 재심될 수 있으니 더 정리가 필요하다는 재판부의 입장은 이해가 되는 면도 없지는 않다. 결국 이 부분은 내란죄 수사를 제외해 놓은 이상한 공수처법과, 출범 이후 수사기관 간에 수사권 관련 세부사항의 정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던 상황의 원죄라고밖에... 2년 반 만에 고위공직자의 내란죄 혐의가 생길 줄 어떻게 알았겠냐만 말이다.

아무튼 또 다시 너무 힘든 시간일듯하다. 국민 앞에 군을 동원해서 대치시킨 반헌법적 계엄을 목도한 것 자체가 충격인데, 집권여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광장정치에 고무돼서 기세등등한 바람에, 적당히(?)하지를 못하고 옹호해선 안 될 것까지 옹호해 버리고 있다. 현실적 정치여건 상 정당해산심판까지는 아마 하기 어렵겠지만, 일부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정당해산이 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지금 상황이 그냥 고위직들끼리 싸움 좀 붙은 정치 갈등이나 흔한 비리 정도가 아닌, 헌정 위기 상황이며 대통령이 초 중대 범죄혐의자라는 점을 다들 잊지 않아야 하겠다.

여론 봐 가면서 광장정치에 영합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데 여당 정치인들이 자기 발언의 무게를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대통령이 석방까지 돼서 활동이 자유로워졌으니, 탄핵심판에서 설령 파면 선고가 되더라도 장기적으로 너무너무 안 좋은 영향이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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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일 월요일

메탈 및 메탈근처 앨범 10선

지하철에서 Spotify를 켰다가 심심해서 꼽아 보는 메탈 및 메탈근처 앨범 10선.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들은 일단 빼고, 폭넓게 알지는 못하다보니 상징성, 대표성보다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 지금 현 시점에 끌리는 앨범들 위주로 골랐다. 전반적으로 연주가 복잡다단하면서도 어느정도 직선적인 야마가 분명하게 잡혀서 비교적 쉽게 이해가능한 곡들, 그리고 어두움의 틈에서 서정성이 스며나오는 곡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1. Nine Inch Nails - The Downward Spiral (1994)

시기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아래 다른 앨범들과는 꽤 이질적이지만 개인적으로 대중음악 전체에서 딱 한 개 음반만 꼽자면 이것임. 악보에 표기하기 곤란한 전자음과 효과음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소리의 텍스쳐가 대단히 강조되면서, 그 결과물도 실험적인 가치를 넘어 악곡 그 자체로도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음반으로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나와서 선구자 역할을 한 듯. 2010년대에 한창 일렉트로닉 유행하던 시절에 어두운 전자음악이 뭐가 있나 많이 찾아봤었는데 내 마음에 충분히 드는 건 없었고 오로지 NIN이 오래 전에 매우 탁월하게 선취했다고 생각함




2. Have Heart - Songs to Scream at the Sun (2008)
하드코어펑크 중에서도 straight edge라고 해서 술이나 약물 같은 쾌락에 젖는 대신 올바르고 깨끗한 삶을 추구하는 펑크 무브먼트라고 하던데 그건 잘 모르겠고 곡들이 굉장히 좋다. 앨범커버가 좀 깜놀계다.



3. Decrepit Birth - Polarity (2010)
테크니컬 데스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멜로디가 강화된 앨범. 둔탁하면서도 빠른 박자와 맞물리는, 쉴새없이 찌르는 하이프렛의 기타를 듣고 있으면 모든 세포를 기계장치로 대체한 새가 지저귀는 느낌이 든다. 곡들이 그리 길지 않아서, 귀가 피곤해질 때쯤 다음 곡으로 전환된다. 수록곡 중에서 조금 조용한 편인 Sea of Memories가 제일 마음에 듦.




4. Revocation - Chaos of Forms (2011)
다양한 장르를 적당히 결합시키면서도 메탈이라는 구심점을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여낸 놀라운 테크니컬 스래쉬. 듣다보면 언뜻 당황스럽지만 이내 적응하고 즐기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 레코딩도 굉장히 선명하게 이뤄져 있다.




5. Periphery - Periphery II: This Time It's Personal (2012)
날카롭게 깎인 미국스러운 젠트 앨범. Make Total Destroy로 처음 접하고 풀앨범은 나중에 다 들어봤는데 특히 Scarlet은 딱 들어도 이해할수 있는 정도의 대중성까지 확보한 희대의 명곡인 것 같음. 앨범의 프로듀싱은 중후하다기보다는 날카롭게 이루어졌고, 이와 어울리게도 컨셉과 가사가 미묘하게 유치한 덕분에 (페리페리 전반적인 특징이긴 함) 오히려 너무 무게잡는 느낌이 안들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는 점도 평가할만한 부분.




6. Native Construct - Quiet World (2015)
심포닉블랙스러운 블라스트비트부터 디즈니 뮤지컬(?!)스러운 파트까지 섞인 굉장히 특이한 트랙 Mute가 있음. 다른 곡들도 Mute만큼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꽤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별도의 포스트로 소개한 바 있다.




7. Plini - Handmade Cities (2016)
섬세한 프록메탈/재즈퓨전의 대표주자. Electric Sunrise로 대표되는 이 앨범은 송라이팅도 프로듀싱도 꽤 부드럽게 된 편이라 (연주 순수체급을 바탕으로;) 재즈 듣는 사람들한테 들려줘도 좋아함.




8. Vektor - Terminal Redux (2016)
한국 메탈팬덤에서도 엄청 화제가 됐던 앨범. 다양한 스타일의 영향이 묻어나지만 그게 일관된 색깔 안에 잘 통합되어있고, 송라이팅과 구성이 너무 좋다보니 언급이 덜 되지만 보컬의 사용도 탁월하고 유니크하다.




9. Between the Buried and Me - Colors II (2021)
Colors I에 이어서 십수년만에 나온 정신적 후속작. 맘에 드는 부분들이 많지만 구린 부분도 많고 정리가 좀 덜된 느낌이 들어서 넣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전반적으로 즐겁게 들었기 때문에 선정함. 앨범 커버 때문일수도 있는데 이 앨범을 듣다보면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카메라가 가지각색의 연회장을 빠르게 훑으며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10. Asunojokei - Island (2022)
Blackgaze 장르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앨범. 극도의 서정성이 인상깊다. 짧은 연주곡인 Tidal Lullaby가 기승전결이 확실하면서도 이 앨범의 스타일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별도의 포스트로 소개한 바 있으며 덧글에 링크.




Honourable mention
나를 입문시켜준 양대 앨범인 Arch Enemy의 Burning Bridges와 서태지 6집 울트라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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