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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대리자로서 한국 정부가 일본 측에 진정성 있는 사과, 법적 책임 인정, 배상 등을 요구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여기서 진정성 있는 반성이란, 자국 정부가 과거에 행한 전체주의적 폭력을 적극적으로 밝혀내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교육을 자국민들에게 시킬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단순히 두 정부 간의 외교적 갈등이라고 인식하면 절대 안 된다. 그러나, 합의 내용에 대한 홍보를 보면, '금번 합의를 통해 앞으로 갈등을 안 겪을 수 있어서 잘 된 일'이라는 식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합의 내용을 보면, 진정성 있는 반성과 법적 책임 이행은 일본 측에 요구되지 않았고, 일본 총리가 짧게 사과하는 것(그 날도, 총리의 부인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다)과,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질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재단에 일본 측에서 자금을 출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이건 엄밀히 말해서, 사과를 받고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문제로 인한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문제를 천으로 덮어 버린 것에 불과하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는 국제무대 등에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합의는 옳냐 그르냐를 떠나서, 본질적으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다. 후대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냥 제기하는 것이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선언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은 일본에 영원한 면죄부를 주고, 향후 문제 제기에도 철면피로 일관할 수 있게 하므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이다.
이 합의 과정에서, 주체인 피해 국민들은 완벽히 배제되어 있었다. 국민들의 대리자로서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할 정부가, 독단적으로 매듭을 지어 버렸다. 갈등을 해소했다기보단, 갈등이 보이지 않도록 땅 속에 묻어 버린 것에 가깝다.

과연 누구를 위한 합의였나. 대승적 관점에서 이해를 바란다고 하는데, 그 대승적이란 거 아무래도 '사사로운 이익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는 식의 전체주의적 발상을 돌려 말한 것 아닌가.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대리자 아닌가.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말로 매듭을 지어 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통탄할 노릇이다.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6.25 및 베트남전 당시에 국군에 의해서 유사한 일들이 이뤄졌다는 것도 더 이상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덮어 버리지 않고 적극적인 논의를 통해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진정으로 과거 잔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간, 민족간의 문제라는 추상적인 워딩으로 왜곡하지 말고, 현현히 실존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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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일 목요일

정치적 발화를 둘러싼 어떤 부조리에 대하여

[ 처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의 요즘 집회 비판 - 함께하고 싶은 집회를 위하여 (by 박현우, Nov 30. 2015) ]

  말해져야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해져야 하기에, 오히려 말해지기 힘든 주제들이 있다.

  어떤 것에 찬성하면서도, '이런 단점이 있긴 하다'고 지적하면서 개선을 권유함으로써 보다 나은 찬성의견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반대하면서도, '이런 장점도 있긴 하다'고 하면서 맹목적인 반대가 아님을 천명함으로써 보다 나은 반대의견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들은 점차 다면화되는 반면에, 우리가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오히려 심도있는 비판이 사라지고, 일차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되고, 진영논리로 고착되고, 단편적인 인상들만이 흥행하고 있다. 그에 따라,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장들을 하려면 마치 사상검증 하듯이 '내가 물론 전체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내가 물론 전체적으로 반대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구절절하게 밝혀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든다. 그래서 말을 하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찬성논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논리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일(따라서 실제로 반대논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존재하고
역으로,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반대논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찬성논리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일(따라서 실제로 찬성논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집회도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링크한 글과 같이 더 나은 집회를 위한 코멘트로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군을 동원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집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페이스북 페이지 '국민의힘'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더 나은 집회를 위해 '집회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집회 자체를 부정하는 측에 힘을 실어 주는 효과를 내는 것을 배격하려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비생산적인 양비론 역시 경계하려면 또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너무 어렵다.

  비단 이 주제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어떤 주제에 대해 의견을 말하려다가 포기한 일은 대부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다룰 주제 자체는 너무나 다양한 맥락,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는 복합적인 주제인 반면에, 그 주제에 대한 어떠한 의견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어떻게 나눠졌는지도 알 수 없는 일차원적 대결 구도의 양쪽 편 중 한 쪽을 추켜세우고 한 쪽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그렇지 않을 거면 차라리 존재하기 말기를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대결 구도 없이도 의견이 사실상 '거의' 양분되어 있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대결 구도 없이 모두가 각자의 맥락 속에서만 주장한다면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상술한 사회적 강요 속에서 양분적인 대결 구도 자체에 매몰되는 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하는 현상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 더 좋은 말, 더 좋은 글을 생산한다면 그러한 현상을 피해갈 수 있을까? 그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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