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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7일 일요일

한스 오브리스트 "Do It" 전시 관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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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 오브리스트 등이 기획하여 전세계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Do It" 전시를 관람했다. 본 전시의 핵심 아이디어는 예술가의 작업은 오직 뭔가를 시키는 '지시문'을 발표하는 것이며, 그 지시문의 내용이 미리 모집한 일반인 참여단에 의해 해석되고 실현되어 전시된다는 것이다. 한스 오브리스트는 전 세계를 순회하며 진행될 이 전시에서 각 도시의 특성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도 기대한다고 했다. 이번 서울 전시는 광화문역 근처 일민미술관에서 하고 있다.

  '이념의 감각적 현시'로서의 예술 작품을 분석하는 헤겔의 이론적 틀은 바로 내용과 형식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소쉬르와 퍼스 등이 제시한 기의와 기표라는 기호학적 틀을 택해도 된다. 어쨌든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예술가는 예술 작품에 뭔가를 담으려고 할 텐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가 예술에서 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생각을 일일이 풍부하게 표현하기보다는 간결하게 암시하는 것을 선호하는 흐름이 주로 순수미술 쪽에서 많이 나타났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색채, 도형 등의 감각적 형태만으로 완벽히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고 추상화되어, 차라리 '암시'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 때 작품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완성된다.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예술작품,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예술작품 등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에서 암시되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끌어내는 것은 물론 모든 감상자의 작업이지만, 예술제도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예술계에서 공유하는 공통 기반에 대한 숙련을 거친 예술비평가들의 작업이다. 예술비평가들은 예술계에서 공유되는 미의식에 의존하여, 예술가의 작업과 그에 첨부된 컨텍스트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서 구체적으로 '말해낸다'. 이는 현대미술이 어렵다거나 불친절하다고 말해지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불편함이 있다. 과연 나는 맞게 해석했는가? 예술의 해석은 자유라고들 하지만, 감상자와 비평가들은 나의 해석의 수준이 지나치게 낮은 것은 아닐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하고 움츠러들게 된다. 마치 범죄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내는 탐정처럼, 감상자는 조심스러워진다.

  "Do It" 전시에서도 예술가의 작업은 오직 텍스트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그 텍스트가 그냥 텍스트가 아닌 '지시문'이라는 간단한 차이점 때문에 의해 위에서 말한 불편함이 의외의 지점에서 해소되고, 상당한 수준의 공공성이 획득된다. 일반인 참여단이 지시문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전시를 구성하고, 그 다양한 해석 자체가 전시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존중되기 때문이다. 오브리스트의 기획 의도가 완전히 성공한다면, 여기서는 일반인 참여단의 해석의 퀄리티가 낮아서 유발되는 웃음마저도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일 것이다. 여기서 남들보다 좀 더 멋있게 발상해야 할 텐데, 남들보다 좀 더 전위적으로 해야 될 텐데 하고 걱정하게 되면 지는 거다.

  즉, 이 전시의 진짜 관객은 사실 지시문을 최초로 읽고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하는 일반인 참여단이고(예술비평가들은 이 전시를 이 '일차적 관객'들과 같은 입장에서 비평한다), 그 결과로 실현된 개별 작품들은 이차적 산물, 곧 '이런 기획을 했다는 기록'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 전시 자체와 각 지시문들에 대한 평가(이것이 예술비평가들의 작업이 될 것이다)와, 일반인 참여단들에 의해 실현된 작품 개별에 대한 평가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그 이차적 산물로서의 전시를 관람하는 나 같은 사람은 지시문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일차적인 관객과, 해석의 결과물을 보는 이차적인 관객으로 분열된 채 작가와, 또 다른 일차적 관객들과 간접적으로 소통한다. 예술가의 지시문 / 참여단의 실현이라는 이중화된 구조로 인하여 관람 행위에서의 관계맺음이 훨씬 다층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중화된 구조는 관객에게 내적 분열을 유발하여, 현대미술 작품의 관객들이 겪는 본질적 불편함의 해법을 모색한다.

  물론 그러한 이차적 산물들이 결과적으로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전시되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하게 대중문화적이지는 않다. 실제로는 위와 같은 걱정을 하지 않고 쿨하게 임하면서도 정작 높은 퀄리티로 해석을 해 낸 작품이 주목을 받게 되긴 할 것이다(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예술비평가들의 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주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는 미술관 밖에서 일어나는 대중문화와의 강한 연관성을 맺고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아직까진 사람들에게 엄격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여지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그 창문을 보다 넓게 열고 공공 영역과 우호적으로 관계맺음을 하는 데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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