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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5일 금요일

정체성 판타지 비판

  누군가 그저 자기 기분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가볍게 소비하는 일은 꽤 흔하지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성적 소수자성, 드문 출신 배경, 특정 정신질환 병력 등에 대한 왜곡된 판타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겉보기에 호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것은 차별주의의 또다른 얼굴일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 판타지'와 관련해서 개인의 책임을 규명하는 데에는 다소 난점이 있으나 적어도 미디어와 사회에 대해서는 명백히 비판이 가능해 보인다.

  좀 더 넓혀 보자면 학력, 소속, 전공, 직종 등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많은데, 대면한 상대방에 대한 인간적 존중이 결여된 채 그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발생한 편견)만을 가볍게 소비한다면, 위 문단과 비슷한 이유로 상황에 따라 그를 불쾌하게 할 수 있다.

  이런 부류 중 최악인 것은, 권력 차에 의한 억압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러한 정체성 판타지가 작동하는 경우이다. 수많은 예가 있지만 가장 중대한 예 중 하나는 젠더권력일 것이다. 신체를 다루는 직종들에 대한 유서깊은(...) 성적 대상화도 이러한 맥락에서 조명할 수 있다.

※ 거시적인 정치사회학도 아니고 미시적인 언어생활을 다루는데, 그것을 위해 적용하는 개념들이 본문같은 경우에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물론 개념체계가 언어직관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비추어 보는 것도 학술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것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내기' 위한 거의 유일한 개념체계이며, 더 나아가 일상언어 역시 미시적이긴 하나 분명히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폭로한다는 면에서 꽤 매력적인 개념체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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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4일 금요일

왁싱샵 살인 사건

https://news.joins.com/article/21815022?fbclid=IwAR2rpokbcRc2H5IaXBcfVB8D-a40HaP7-hUnYS-4bpKMp8RLGvM078N53_g
[ "담배 피며 유유히" 왁싱숍 여주인 무참히 살해한 남성 (2017.08.03) ]

최악의 사건이다.

  사후적인 해석이지만, 왁싱이라는 업종과 관련하여 무언가 터질 징조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것을 특징 삼아 인기를 끈 각종 개인방송 채널에서 너도나도 왁싱 샵 체험기를 업로드하였는데, 왁싱샵의 특수성에서 모종의 성적 긴장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남성 중심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으로 부적절하게 왁싱샵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그러한 풍조가 폭로되었다. 해당 방송의 BJ는 법적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 책임은 느낀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사회에서 성적 코드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지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예전부터 간호사, 승무원 등의 일부 직종은 남성들에게 성희롱적 발언이나 요구 등을 많이 받아 왔다. 최근에는 이것이 대중매체를 타고 확산되면서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방식으로 은유적인 성적 코드가 부여되어 소비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 왁싱샵 건도 특정 직종에 대해 성적인 함의를 부여하여 대중적으로 은밀하게 소비하는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터질 게 터졌다는 느낌이다. 참담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기에 더욱더 참담하다.

  더구나 왁싱샵은 아직 많은 이에게 다소 낯선 서비스이면서도 자기관리의 측면에서 꽤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서비스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성적 긴장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비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미디어에 소개되면 문제가 생길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남성중심적 매스미디어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런 건 절대로 ‘거리낌 없고 개방적인’ 게 아니다. 한 성별이 다른 성별에 대해 아무 말이나 막 한다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일본의 대중문화 컨텐츠가 성적으로 개방적이라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으로 소비되는 것이기에 개방적이기는커녕 극도로 보수적인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개방적이라고 하는 건 남성과 동등한 한 인격체로서의 여성의 존재를 지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대중매체, 특히 규제가 없는 개인방송 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잘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일방적으로 성적 긴장감을 형성하려고 하는 부적절한 성적 대상화가 만연한 풍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성인지교육의 혁신적인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세대가 지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한국 성교육이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 실제 성관계하는 법도 제대로 소개해 주지 않고 돌려 말한다고 불만들을 많이 제기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전에 일단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간으로 보는 법이나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을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권의식의 부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과 관련된 주제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비틀린 내면이 유독 특별히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영역이라서 남들과 얘기해 볼 기회가 없으니까, 더구나 이성과는 더욱더 성에 대해 얘기해볼 기회가 없으니까 부적절한 젠더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개선의 기회가 없이 속에서 계속 곪는 게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생각에는, 무턱대고 ‘개방적으로 터놓고 얘기하자!’ 해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성들과 함께 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려면 일단 서로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이것은 젠더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한 선언이 아닌 꾸준한 실천을 통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증명함으로서 달성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젠더권력이란 스스로를 보다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지만, 지극히 설명력이 좋은 개념이기도 하다. 이 문제도 결국은 젠더권력에서 기인한 비인간화와 대상화의 문제로 소급시켜 설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여성혐오 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성혐오는 스스로를 엄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설명해 내는 개념이다(우에노 치즈코의 설명 참조). 비록 이 개념이 스스로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비판될 필요가 있는 개념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통찰을 현재 단계에서 ‘말해내기’ 위해 현 단계에서 활용해 볼 수 있는 가장 유효한 개념이기도 하다.

  작년 5월에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었는가? 사건 당시 나는 여성혐오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확정적인 작업이 아니다. 몇몇 어려운 단계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해야만 여성혐오의 연관성이 조심스레 주장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망상장애의 구체적 내용은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므로 그의 여성혐오적 망상에는 이 사회의 여성혐오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 가해자가 여성을 두려워해서 피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살해한 것은 그의 망상이 다른 망상이 아닌 여성에 대한 망상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왁싱샵 사건의 경우는 여성혐오적 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남성중심적 대중문화 속의 기괴한 면이 그 어느 사건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까지, 여성혐오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작용한 것이 절대 아니라고 애써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대화나 설득을 시도해야 할지 솔직히 지금은 막막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 해외순방 당시에 예쁜 통역사를 구한다고 공고했던 것에 대해 JTBC의 손석희 아나운서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이미 들켜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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