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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31일 화요일

서태지 8집 발매 10주년을 기념하여

  어제는 서태지 8집이 나온 지 정확히 10년 째 되는 날이었다. 정확히는 정규 8집이 나오기 전에 미스터리 컨셉의 프로모션이 진행된 뒤 <Moai>, <Human Dream>, <T'ikT'ak> 등이 수록된 첫 번째 싱글이 2008년 7월 29일에 발매되었고, 나머지 곡들은 그 이후에 2회에 걸쳐 공개되었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일부러 찾아서 들어 본 노래가 서태지 8집이고, 이것을 계기로 서태지를 통하여 록의 다양한 장르를 접하기 시작한 만큼 내겐 2018년 7월 29일이라는 어제의 날짜가 괜히 감회가 새로웠다. 이하에서는 서태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과 함께 좋아하는 곡들을 추천해 보기로 한다.

  이 10년이라는 숫자는 이 글을 쓰면서 내게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숫자이기도 하다. 메탈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 출신인 서태지가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으로 넘사벽급 커리어를 쌓고 은퇴하였을 때가 서태지가 불과 25세일 때로, 그가 악기를 처음 잡은 지 약 10년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저런 걸 이뤄낼 수 있는 기간인데 나는 10년간 무엇을 했는가? 서태지가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엄청난 인기를 바탕으로 기존 음악산업의 관례를 무시한 채 마이웨이를 걸으면서 개인적 성공과 함께 사회에도 많은 화두를 던진 것을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만화적 인물'이라는 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4집을 끝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을 정리하고 은퇴했던 서태지는 귀국하지 않고 앨범만을 발매한 솔로 1집(통칭 5집)을 거쳐, 새빨간 레게머리를 하고 뉴 메탈 장르의 곡들을 들고 나온 6집 활동을 통해 음악적으로도, 외모적으로도 완연한 로커의 모습으로 컴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커로 컴백한 솔로 커리어 이후로도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아이돌'적인 면모를 독특한 방식으로 계속 가지고 간다. 한국의 록을 이야기할 때 서태지의 위치가 아주 미묘해지곤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데, 이것은 첫째로는 그가 록 밴드의 성향과 랩댄스 아이돌의 성향을 결합한 음악적 토양을 가지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는데, 후대의 대중음악 판도에는 주로 후자의 면모만이 부각되어 계승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그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선보였던 랩댄스 음악을 솔로 활동에서는 주로 록으로 편곡하여 선보이면서도, 방탄소년단과 함께한 25주년 기념공연 등 특별한 경우에는 랩댄스 스타일의 원곡을 최대한 살려서 선보이기도 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로커 출신이지만 랩댄스 위주로 대중음악이 재편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나서 은퇴한 뒤, 다시 로커로 회귀하여 컴백한 서태지는 과거의 랩댄스 아이돌이자 현재의 로커로서 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서태지가 로커로 컴백했음에도 아이돌적인 면모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위와 같은 점 외에도, 그의 솔로 커리어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서태지의 솔로 커리어의 매 앨범은 같은 아티스트의 앨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상이한 장르를 보여준다. 6집에서는 공격적인 기타 리프와 차가운 래핑 위주의 뉴 메탈을 표방하였으며, 7집에서는 몰아치는 기타 연주에 마치 다채로운 색깔이 느껴지는 듯한 장조의 선율을 덧붙이는 작법을 구사하였고, 8집에서는 지극히 복잡한 리듬 위에서 록과 일렉트로니카의 화학적 결합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9집에서는 기타의 비중을 축소시키고 통통 튀는 신스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러한 디스코그래피 운영은 넓은 폭의 장르를 수용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서태지의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일관되지 못한 커리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개별 음반들이 꽤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디스코그래피로 인하여 록 중에서도 특정한 장르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 정통적 록 팬들보다는, 서태지라는 인물과 서태지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 위주로 팬덤이 축소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 팬덤은 록 밴드의 팬덤이라기보다는 아이돌 그룹의 팬덤과 닮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태지의 의중과 관계없이 상당히 많은 록 마니아들에게 서태지와 그의 팬덤이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지고, 때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그러나 펜타포트에서는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위와 연결되기도 하는 이야기인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설 등 돌이켜 볼 때 웃음만이 나오는 것들을 제외하면, 서태지에게 가장 크게, 또 오래 씌워진 혐의는 아마 '록적 저항 정신의 상업화'일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상술한 솔로 2집(6집) 활동에서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게는 헤드뱅잉 등의 록적 액션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된 안무를 하듯이 구사한다는 비판부터, 크게는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저항의 이미지만을 상업적으로 활용할 뿐 실질적인 저항이 부재하다는 비판까지 수많은 비판이 쏟아졌으며, 이러한 비판은 기성 보수 언론에서부터 진보적 인디씬까지 넓은 스펙트럼에서 터져나왔다.

  그러한 비판들 중 일부는 뼈아픈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서태지가 저항을 상업화시켜 퇴색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각종 문제들에 대한 개인 차원에서의 저항을 실질적으로 성공시켜서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서태지는 아이들 시절부터 솔로 시절까지 끊임없이 기획사의 횡포, 음반 사전심의제도, 방송 검열 등 충분한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애를 썼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춤출 수 없으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 서태지의 이런 행보가 인기를 바탕으로 한 대담한 마이웨이에 따른 통쾌한 성공이며 그 과정에서 꽤 많은 사회문화적 변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가 주로 대중음악인의 권리 증진에 집중되었고, 진보적 인디 씬에서 서태지에게 의심 섞인 눈초리로 기대하던 혁명적 사회 변화와 인디 음악의 부흥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으므로 비판의 소지가 제공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는 스스로 끊임없이 혁명가, 문화 대통령이라는 언론의 칭호에 대한 부담감을 표해 왔으며 자신이 자처하지 않은 어떤 사회적 역할이 기대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자주 난처함을 표했다. 말하자면 서태지에게 과도한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 것도 서태지 및 팬덤이 아닌 외부의 호사가들이었고, 그 역할이 수행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서태지를 비판한 것도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태지는 솔로 커리어 초기에 서태지컴퍼니를 통하여 인디 씬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넬, 피아 등의 밴드를 지원하고 록 페스티벌 ETPFEST를 수 회에 걸쳐 주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서태지에 대한 '록적 저항 정신의 상업화'라는 비판은 대체로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서태지 솔로 커리어의 가장 큰 특징은, 사운드, 가사 등 모든 면에서 솔직하고 강렬한 표현보다는 거의 집착적인 수준으로 세밀하게 정제된 음악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서태지의 곡을 감상할 때 가슴이 뛰는 것과 별개로 그 곡들이 창작된 작법은 디오니소스적이라기보다는 아폴론적이고, 뜨겁고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차갑고 계산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약간의 '센스' 내지는 '재치'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많으나, '유머', '인간미'라고 불릴 만한 요소는 0에 가깝다는 점도 특징이다. 아마도 충분히 조탁되지 못한 인간미가 작품에 혼입되는 것을 서태지가 체질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서태지를 둘러싼 '신비주의'라는 유명한 칭호의 본래 정체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것은 서태지뿐만 아니라 대중적이지 않은 록 음악에서 어느 정도 빈번하게 관찰되는 특성이지만, 서태지는 한때 대중성의 정점에 오른 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향을 추구하다 보니 마치 이게 서태지만의 특징인 것처럼 세간에 회자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서태지가 이들 중에서도 유달리 이러한 성향이 강한 것 같기도 하고.

  이러한 특성은 가사뿐만 아니라 사운드적인 면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기타 리프를 raw하게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여러 겹의 소리들로 감싸서 조심스럽게 배치한다(6집 리레코딩은 예외이겠다). 이런 성향은 6, 7집부터 조짐을 강하게 보이다가 8집에서 폭발적으로 발현되었는데 몇몇 평론가들은 이러한 성향을 두고 '자폐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어제로서 딱 10년 된 서태지 8집은 그의 이러한 세밀함이 가장 잘 드러난 앨범이기도 하고, 서태지가 제일 잘 하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 앨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8집을 서태지 솔로 커리어의 마스터피스라고 생각한다. 곡 하나하나의 밀도가 상당하여 여러 번 반복해서 듣더라도 인지적으로 '재밌게' 들을 수 있는 앨범이라는 점도 있고. 그런데 뭐 이러한 서술도 9집에서 인간미를 많이 드러내면서 옛날 얘기가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특유의 세밀함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으므로 뭐라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겠다. 아무튼 기대하면서 지켜볼 일이다.

(2) 'Bermuda[Triangle]' (8집 'Seotaiji 8th Atomos', 2008) : https://www.youtube.com/watch?v=km1fuG7svPY
(3) '로보트' (7집 'Seotaiji 7th Issue', 2004) : https://www.youtube.com/watch?v=ToeTsQWSSqI
(4) '울트라맨이야' (6집 'Tai Ji', 2000) : https://www.youtube.com/watch?v=8jtKmWXdh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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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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