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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5일 수요일

권력자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의미와 가치 사이에서의 책임

1. 예술과 정치의 관계 측면에서

무언가가 해석을 통해 부여받는 '의미'와 정당화된 수단으로서 갖는 '가치'는 개념적으로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매우 밀접하게 동반된다. 그 밀접함을 책임있게 짚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다소 인위적일지언정 이 둘을 머리 속에서라도 엄격히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석을 통한 의미 부여가 곧 정당화를 통해 가치를 부여하는 시도로 간주되는 이러한 일반적 경향은, 사유의 교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철학적 오류가 아니며 오히려 외부 현실과 결부된 불가피한 정치적 문제라는 점에서 매우 부조리하다. 세계의 한 단면을 끄집어 내어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하여 전시하는 작업은 사유의 전개에 있어 필수적이나, 그렇게 끄집어내어진 사건들을 소재로 한 사유가 사람들에게 공유되면 그 소재들은 본래 의도와 관계없이 '실제로' 가치를 획득하게 되며 이것은 사상가를 모종의 윤리적 평가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작업은 예컨대 순전한 예술에서라면 매우 일상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본질적이기까지 한 작업이지만, 정치의 영역과 결부된다면 시도되는 그 즉시 온갖 종류의 문제를 야기한다. 예술에 대해서건 정치에 대해서건, 예술적 비평과 정치적 비평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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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시적, 미시적 정치권력 측면에서

  이 글에서는 '의미'와 '가치'를 둘러싼 부조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의미는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존재하지만 가치는 실천을 통해 사회 속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된다. 이처럼 의미와 가치는 그 개념상 별 상관이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가치는 실천적으로는 굉장히 밀접하게 동반된다. 필연적인 개념적 관계가 없는 것들이, (말하자면 우연적인) 사회적으로 조건지워진 바에 따라 서로 관계맺어지면서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부조리이다. 그리고 이 부조리의 원인은 다름아닌 권력이다.

  누군가가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가 어떤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현상이 정당화되고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 구별되기 어렵다. 그가 어떤 현상이 갖는 의미를 머리속에서 생각해내고 그것을 끊임없이 언급한다면, 언론 보도를 통해서, 지지자들의 담론 재생산을 통해서 그 현상에는 실제로 가치가 부여되게 된다. 사람들의 삶의 일정 부분이 그 의미에 결부되어 규정되기 때문이다. 지극히 뇌피셜이지만 나는 이걸 권력의 '정의'처럼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대상들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를 그저 그렇게 머리속의 지적 유희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을 실제로 그렇게 조직해내고 정당하다고 믿어지게 만듦으로서 주변 사람들의 삶과 결부시키고, 따라서 가치로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위에서는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나 적용될 법한 뉘앙스로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일상생활에서의 미시적인 발화권력이나, 온갖 종류의 조그마한 결정권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것은 빠짐없이 적용된다. 또한 신문사에서 무엇에 의미를 부여해서 기사화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들도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예술가나 문예가가 가지고 있는, 작품에 무엇을 어떻게 집어넣을지에 대한 결정권도 여기에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음을 인지하고 이걸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해 성찰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킨 뒤, 자신은 가치를 부여한 게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만큼이나 후자의 경우에도 신경을 쓰고 비판해야 한다. 어째 정확한 예시를 잘 못 들겠는데, '그냥 주관적 생각을 쓴 것뿐이다', '정당화한 게 아니라 그냥 의미가 뭔지 생각해본 것뿐이다' 뭐 이런 식의 해명 말이다.

  가치를 제거하고 의미만 남겨두겠다고 선언할 때, 그 선언은 그의 머리속에서야 효과를 발휘하겠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 그의 권력에 의해 뭔가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이미 결부되어 버린 이상 그 결부를 끊어내는 일이 마법 주문처럼 선언 한 번에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혹은 무책임한 태도일 것이다.

  누군가 한 번 권력을 획득한 이상, '이 의미부여는 지적 유희일 뿐, 가치로 실현시키지는 않겠다'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끊임없이 자기반성적으로 성찰되어야만 한다. 누구든지 자기가 하는 발화의 커버리지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그에 따라 책임있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권력은 그 권력을 가진 자 스스로도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내려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지극히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단순히 '권력에 중독되면 놓기 어렵다' 이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이런 부조리는 무언가를 외부적 가치와 결부시켜서 누군가에게 이롭거나 해롭게 하지 않은 채, 오직 내적으로 자유롭게 의미 부여를 해 가면서 여러 상상을 펼쳐나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슬픈 것이다. 큰 영향력을 갖는 정치인은 더 이상 '도발적 상상'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또한, 인기를 누리던 예술가들이 간혹 영광을 뒤로 하고 은둔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부조리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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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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