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진정한 대중예술이 될 수 있는 장르로 야인시대 합성물을 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그 후보는 하나 더 있다. '영화 예고편'이야말로 독자적인 장르로서, 문화산업의 영역 바깥에서 대중에 의해 창작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사례 중심으로 이 가능성을 검토해 보면서 영화적인 것 전체에 대한 고찰로 확장해 보자(작품(?)별 링크는 하단에).
영화의 예고편은 본편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독자적 문법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고편들은 영화 본편의 흥행이라는 목적에 복무하고 있는 면이 많다. 그런데 그러한 문법을 파악한 대중들은 종종 대응되는 실제의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순전히 독자적인 컨텐츠로서의 '영화 예고편'을 창작해 내곤 한다. 이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그 기원을 생각하면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으로, 대부분 기존 유명 영화 예고편의 주된 요소(주로 OST)를 그대로 채용하여 본인이 창작한 다른 장면들을 끼워넣는 방식이지만([1], 주로 중고등학교 UCC에 이러한 방식이 많다), 때때로는 한 예고편을 다른 예고편의 스타일로 변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2],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예고편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겨울왕국>의 가상 예고편을 만든 사례). 심지어 내용을 철저히 삭제하고 형식만을 남김으로써, 블록버스터 영화 예고편의 '공식'을 노골적으로 지적하여 웃음을 주는 영상도 있다[3].
우리는 어떤 영화들이 지나치게 전형적이라고 종종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그런 영화들이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임의의 '영화적인 것'(영화 예고편, 포스터, 플롯, 배역 등)과 결부지을 수 있는 대략적인 얼개만을 지닌 어떤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바로 그 얼개에 대응되는 전형적인 영화 한 편 혹은 그 일부를 마음 속에서 구성해 낸 듯한 느낌을 받고, 그 영화를 실제로 재생하여 감상한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으면서 '영화 한 편 다 봤다'고 말하곤 한다. 인터넷에서는 종종 이러한 심적인 경향을 구체화하여 직접 표현하기도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예시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을 주제로 한 가상의 영화 '제 78수'의 포스터[4], 그리고 그것과 동일한 주제로 쓰인, 황정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상의 플롯[5]이다. 이러한 컨텐츠들은 대중적 화제가 되고 있는 특정한 이벤트를 영화라는 우수한 형식의 일면 속에 배치하여 특유한 효과를 노리지만, 한편으로는 영화의 정형화된 형식에 대한 조롱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한편 우리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화 같다', 혹은 '영화보다 더하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런 표현에는 사건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관조한다는 데서 오는 윤리적 문제성이 있으나 일단은 차치하고, 이런 표현을 할 때에 우리가 어떤 가상의 영화를 연상해내어 해학적으로 향유하면서 집단적으로 위로받는 경향을 갖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물론 심각한 사건일수록 이러한 문학적 연상작용은 당장은 심리적으로 거부될 것이다). 2016년에 최순실 게이트가 거대한 논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모종의 '영화적인 것'을 차용한 패러디물이 다수 생산되곤 했다. 김경진 의원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압박하는 장면에 음악을 깔아 느와르 영화처럼 편집한 작품[6]도 기억에 남고, 논란이 생겼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너의 이름은>의 예고편을 패러디한 '동무의 이름은'[7], '너의 실세는'[8] 등의 가상 예고편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아니지만 또 하나 특이한 것으로는, 당시 시국을 드라마로 만든다고 가정할 때의 '가상 캐스팅'[9]도 있다. 이러한 컨텐츠들은 경건하다기보다는 해학적으로 다가오는데, 이것은 순수 창작이 아닌 재구성이라는 방식이 갖는 유머러스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는 실제 영화에 비해서 훨씬 적은 자본만 가지고도 전형적인 영화가 주는 감동을 어느 정도 내적으로 모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익명의 제작자의 실감나는 표현에 대해 감탄함과 동시에, 정형화된 감동을 이끌어내는 영화들에 대한 모방으로서의 - 우리 스스로가 마음속에 만들어낸 - 가상의 영화를 감상하면서 웃음을 맛본다.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 이러한 모방은 영화라는 형식에 대한 경의이자 적극적인 활용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형식의 정형화를 지적하는 풍자일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방향이던간에 그러한 컨텐츠들은 산업의 영역 바깥에서 오로지 대중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된다는 점에서 대중문화를 기층에서 추동하는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사실 영화적인 것이 가진 힘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결국 그러한 대중문화는 영화산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에서 영화가 갖는 이러한 성격은 마치 '자연'이 가지는 성격과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는 대중예술을 표방하여 만들어졌고 대중에 의해 향유되고 있으나 대중에 의해 생산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포스터, 예고편, 심지어 캐스팅 등 어느 정도 독자적인 미학적 성격을 갖는 주변적 산물들을 동반한다. 현대의 대중은 이렇게 문화자본에 의해 생산되어 종합적으로 다가오는 '영화적인 것'에 대해 매우 익숙하며 직관적으로 상당히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주변적 산물들을 모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모종의 영화적인 것을 생산해 내곤 한다. 초기 인류가 자연이라는 절대적 형식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몸짓으로 표현하거나 바위 위에 그리면서 향유하였듯이, 현대인들은 영화라는 인공적인 형식에 대한 미메시스를 통해 영화적인 것을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고 재현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1] 유튜브 '영화 예고편 패러디' 검색 결과: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영화+예고편+패러디
[2] '엔드게임 제작진이 《겨울왕국》을 만들면 벌어지는일': https://www.youtube.com/watch?v=pT2Oawi330I
[3] 'How to Make A Blockbuster Movie Trailer': https://www.youtube.com/watch?v=KAOdjqyG37A
[4] '[이세돌-알파고] 이세돌 첫 승리에 가상영화 등장?… "영화제목은 제 78수"':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0140&fbclid=IwAR3qMMTkHVIdOuw-xTfu1D0LHm06kUy26PyRTSfrQx-s1LZ1ONBFsdnsEbY
[5] 'CJ에서 황정민 데려다가 알파고 vs 이세돌 영화를 만들면ㅋㅋㅋ.jpg': https://www.instiz.net/pt/3655327
[6] '청문회 스릴러 (출연: 우병우 / 김경진 의원 / 김성태 의원)': https://www.youtube.com/watch?v=KPA24azHn3U
[7] '동무의 이름은': https://www.youtube.com/watch?v=jVQeuf6F5d0
[8] '[너의 이름은 패러디] 너의 실세는。메인 예고편 (박근혜, 최순실 주연 / 君の名は parody)': https://www.youtube.com/watch?v=X-h16VakV1g
[9] '최순실게이트 가상캐스팅':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327149&fbclid=IwAR1l7yswePW0xmjBrgB0-fqoYiS7Q-Ccns-Qp61bfXuIk_E0yGeb1Dikp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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