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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4일 일요일

귀염론

<귀여움을 다루는 방식: 불화의 가능성을 전제한 일회적 사태로서>

귀여움이라는 미적 범주는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매체에서도 점점 더 빈번하게 언급되며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귀여움은 흔히 아기나 반려동물이 갖는 특성, 혹은 그러한 대상들이 촉발하는 감정으로 대표하여 묘사된다. 이와 관련하여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에 필요한 감정이라는 등으로 진화적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많다. 

어떤 포착되는 순간들은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우리로 하여금 무해함과 그 영속성을 상정하게 한다.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BFNekjEgvuk , Thumbnail image, 2023.03.18.)


특히 오리들이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인식하고 따라다닌다는 각인(imprinting) 효과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 (Konrad Lorenz)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생물학적 연원, 목적론적 설명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귀여워함이라고 불리는 어떤 심정상태가 명백히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그것이 사회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을 위주로 다뤄본다.

귀여움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의 상태라기보다는 주관이 대상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다. 즉 엄밀히 말해 우리가 일관성 있게 개념화하여 주목할 수 있는 사태는 '귀여움'보다는 '귀여워함'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촉발하기에 대체로 용이한 어떤 상태나 속성들의 범주가 있기는 한 것 같고, 이를 귀여움이라고 실용적으로 부를 수 있겠다.

이처럼 귀여워함은 주관의 내부에 촉발되는 것이지만 상호주관성의 계기를 적극적으로 지향한다. 즉 귀여워함은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 실제로는 성립되지 않고 있는 상호주관성을 가상적으로 형성하기까지 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갖게끔 한다.

단적인 예로, 사물의 외형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귀여움을 느낄 수 있으며 이 때 사람들은 그 사물에 가상적으로 인격을 부여하여 그것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자동 챗봇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이 입력에 대해 어떤 의인화하기에 용이한 반응을 보였을 때에, 그것은 때때로 귀여운데 여기서 우리는 은연중에 그 반응을 인격에 유비한다. 또한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자동차의 앞모습을 사람의 얼굴 표정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러한 표정은 차종에 따라 귀엽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체에 등장하는 연예인 등에게서 귀여움을 발견한다면 그를 실제로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인상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해당 인물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외형, 혹은 특정한 언행 및 장면으로부터 유발되곤 한다. 가상적인 상호주관성과 그에 따른 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귀여움은 주로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귀여워하는 감정은 순전한 존중의 태도와는 꽤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귀여워하는 감정이 일으키는 가상적인 상호주관성은 '나를 해치지 않는 인격을 대할 때의 상호주관성'에 가깝고, 적절히 관리되지 않는다면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결국 귀여움이라는 미적 범주는 나보다 미숙한 인격체에 대한 보호, 한편으로는 통제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양면성에 의거하면 귀여워함의 감정은 주관으로 하여금 비인격적 대상도 소중하게 대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인간과 같이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복잡한 대상을, 오로지 무력하고 저항하지 않는 대상으로 평면화하여 조심스럽지 못하게 대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예컨대 사물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생명체를 대하듯이 소중하게 대할 수 있다. 반면 인간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면 은연중에 무해함에의 잘못된 기대를 하게 될 수 있다. 인격에 대한 순전한 존중심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던 두려운 행동을 볼 때에도 그 행동이 정당할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며, 그 후에도 반드시 사라지지는 않는다. 반면, 귀여워하는 감정은 대상이 우리의 기대를 위반하면서 불화의 가능성을 인식시켜 줄 때에 실망을 안기면서 비교적 쉽게 사라지므로 순전한 존중과 다르다.

따라서, 귀여움의 감정만을 관계 형성의 동기로 삼는 것은 일방적이며 아슬아슬하다. 그러한 관계에서 기대가 위반되었을 때 발생하는 실망의 감정이 일차적으로는 상대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일방적으로 가졌던 기대 때문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귀여움에 대한 기대가 위반되며 불화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상황은 그러한 점검의 계기가 된다. 물론 기대를 위반한 상대방의 행동 자체가 적절치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며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으나, 상술한 점검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귀여워하는 감정을 꺼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간에 의젓한 태도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일회적으로 수립되는 귀여움은 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며 나도 그것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개입할 틈이 없을 정도로 충만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하고, 양쪽 모두 불만을 갖지 않는 귀여움은 인간관계의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빈번할 수는 있을지언정) 본질상 일회적인 것이므로 나중에 돌아볼 때 오글거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하겠다.

만약 귀여움 또한 미학의 대상으로서 미적 범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이러한 일회성은 사실 꽤 자연스럽다. 무언가가 귀엽다는 판단은 취미판단의 범주로서, 여러 상황과 조건에 따라 우리의 인지적 도식이 잠깐 동안 특별히 조화롭게 작동하면서 산출하는 것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 객관적 진실이 도출되는 과정과는 다르다. 이것이 혼동된다면 상술한 것처럼 잘못된 기대로 이어진다.

또한 전형성에서 벗어난 전복적인 귀여워함은 문화적 변혁력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귀여움의 대상이 되지 않던 것에서 귀여움 촉발의 가능성이 문화적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변화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그것을 재확인하는 효과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귀여움의 특성은 귀여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귀여운 대상의 행동을 (혹은 일반적으로 귀엽다고 여겨지는 행동의 범주들을) 종종 모방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위에서 밝힌 가상적으로 형성된 상호주관성 하에서 수행되는 일종의 역할극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역할극은 귀여움 상황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제3자를 의아하게 하거나, 드물게는 제3자까지 그 상황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러한 귀여움의 역할극만으로 고도의, 또한 여러 단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얻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결론을 짓자면, 귀여움 너머에 있는 온갖 불화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그 위에서 발생하는 일회적인 귀여움을 조심스레 애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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