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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0일 월요일

역사의 종말: 보편의 실현인가 혹은 보편적 착각인가

아서 단토는 그의 예술 종말론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에센스를 무엇으로 규정하고 어떻게 모방/재현하느냐에 따라 그 패러다임을 달리하면서 발전되어 온 20세기 이전까지의 미술경향을 '바사리 서사'로 부른다. 이데아와 합치하는 최고도의 인간성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건강하고 활력 있는 신체를 조각한 고대 그리스와, 그림 그 자체로 담아낼 수 없는 기독교적 신성을 암시하기 위해 상징 효과를 활용한 중세를 단토는 미술 이전 시대로 분류한다.

미술가들의 관심 대상이 이러한 예지계/상징계에서 물질계로 점점 내려오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단토가 이야기한 바사리 서사가 시작된다.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바사리에 의해 자기인식된 르네상스 미술부터, 작가의 시점, 시간대 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흐물흐물한 빛 덩어리야말로 회화로 표현할 수 있는 에센스라고 생각한 인상주의, 반대로 그러한 변화를 모두 걷어낸 것이 본질이라는 입체주의, 한편으로는 삶과 사회상을 표현하는 사실주의 등 대략 20세기 이전까지의 여러 미술 사조들이 이러한 바사리 서사에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술작품은 '원본'에 해당하는 외부 대상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며,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로 정당화된다.

위 문단에서 예고되는 것은, 개별 예술창작이 특정한 철학적 신념 위에 올라간다는 것이다. 바사리 서사에서 그 신념이란 미술에서 모방해야 할, 대상들의 에센스에 대한 철학적 규정이었다. 이는 20세기 들어 특정한 외부 대상의 모방물이 아닌, 독립되고 자기완결적인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추상미술('이게 뭐야?'라고 질문할 때 '뭔가를 그린 거야'가 아니라 '미술 작품이야'라고만 답할 수 있다는 의미로)이 등장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파괴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본격화된다(왜냐하면 입체주의, 인상주의 등 바사리 서사 후반부의 미술과 그 이후에 등장한 추상미술의 사이의 관계를 단절로 파악할 수도 있는 반면, 연속으로 파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부 대상들의 본질이 아닌, 예술 자체에 대한 철학적 규정으로 질문의 축이 옮겨간 것이다. 이렇게 예술가가 가진 예술에 대한 규정을 작품이 스스로 실현하도록 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경향을 단토는 그린버그 서사로 규정한다. 다소 순환적일 수도 있지만, 예술철학이 예술생산을 추동하며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1960년에 발표된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일상 속의 공산품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작품이다(실제로는 종이박스를 그대로 갖다 놓은 것이 아니라 나무 판자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기는 한다).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강령, 강령이란 없다는 마지막 강령이 선언되고, 이것은 '예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단토가 보기에 이 시점 이후의 동시대 미술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특정한 철학적 강령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개별적이다. 종말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의 어구와는 달리 이 시점 이후의 미술 창작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고 찬란해진다. 개별 미술작품들은 더 이상 외부 대상과의 관계에도, 예술규정에 대한 철학적 사조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가치를 획득한다. 예술이 마침내 오직 스스로 정당화되기에 데 이른 것은, 미술사 속의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보편적인 종착점이며 따라서 예술의 발전사는 종결된 것이다.

한편, 직접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역사의 종언'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더 이상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공산권이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시대정신을 점유하게 된 당시의 상황은 역사 속의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는, 역사 발전의 보편적인 종착점이라는 것이 후쿠야마의 인식이다. 단토와 후쿠야마 모두에서 보이는 것은 바로 헤겔주의적 면모가 아닐까 한다. 자연에 잠재하던 이념이 서로 다른 모멘트들의 대립을 통해 발전하면서 스스로를 세상 속에서 점점 구체적으로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역사를 이해한 헤겔의 역사철학이, 미술분야와 정치분야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와 단토 모두, 자본주의 체제 하의 미국만을 보편으로 상정한 좁은 고찰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처럼, 대립되는 계기들의 투쟁에 의한 역사의 발전이 언젠가 근본적으로 완결되어, 역사의 종착점에 해당하는 무시대성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며 동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라는 관념은 꽤 곳곳에서 보인다. 특히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20세기 중후반부터의 시기가, 시대적 격동기를 벗어난 제1세계 주류의 사람들에게 그런 관념을 만들어내기에 특별히 용이한 느낌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러한 관념을 접한 뒤 비교적 자연스레 이해하면서도, 매력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낀 이유는 이것이 내가 어릴 적 (신화를 포함한) '옛날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음 속에 오랫동안 품게 되었던 관념과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 여러 인프라와 노동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완벽히 단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던 시기여서인지, 옛날 이야기라는 것이 실제로 구전되어 전해지던 시기와, 그것들이 인쇄/출판되어 나오는 현대 사이에는 완전하고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옛날은 뭔가 웃기거나 무서운, 부조리한 일이 많이 일어난 시기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문화재인 것과, 문화재가 아닌 것기 칼같이 구분되는 것 같았던 인식도 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현대에도 어찌 보면 '옛날 이야기'의 구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산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이야기를 만들게끔 하는 기이하고 불가해한 것들도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옛날-동시대 이분법은 유아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꾸준히 남아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진정 보편적인 것은, 관념 속의 보편이 일시적, 국소적으로 달성되었을 때 그것을 역사의 종말로 판단하려는 인간의 경향밖에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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