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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7일 토요일

착각이 부르는 오만과 원망: 과거의 성과는 현재의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큰 투표에서 정치인들이 외치는 구호가 흔히들 과도하게 거창해서 오히려 공허한 것과 달리, 10년 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때는 상당히 피부에 와닿으면서도 근본적으로 중요한 논점들이 많이 오갔고 생동감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급식 대상자인 중학생이었어서, 그리고 인물 선거가 아닌 정책 주민투표여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순 있겠다.


무상급식 자체에 대한 시민사회의 구체적인 토론, 그리고 시민들을 설득하고 정치적 결과로 이끌어내기 위한 야당 쪽의 전략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시민의 의지(?)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구체적으로 이끌어내서 정치적 성과로까지 이행시킨, 당이라는 정치집단이 돋보였던 좋은 사례로 기억하고있다. 오세훈 시장 본인이 직을 던진 게 결정적이긴 했겠지만서도, 그 이후로도 무상급식 드라이브가 쭉 원활히 걸린데에는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의사를 확인한 당시 야당의 활동에 충분히 크레딧을 줄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 무상급식 하는쪽으로 싸워줬는데 20대들은 왜 지지 안해주냐는 식의 시혜적인 언사들은 내가 기회가 될때마다 지적하는, 정치가 잘 안풀릴 때 기어코 시민들의 '탓'을 하고야 마는 바로 그 좋지 않은 습관일테다. 애초에 그 당시에 성과를 만들었더라도 지금 지지해야 하는 어떠한 논리적 이유가 없을뿐더러 (인간적, 가족적인 감사와 정치적 지지를 혼동하지 않아야한다), 심지어 생색내는 순간 깬다는 기초 원리는 정치에서도 어느 정도는 성립할텐데.... 정치인들이 그런 발상을 하지 않고,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입단속을 하는 분위기가 조기에 주류에 형성되면 좋았을 텐데 싶다. 그런 발언들을 통해 20대는 포기하고 40대의 지지를 결집시키는 전략이 아니냐고 하기도 하는데 글쎄, 20대를 욕해서 40대의 지지가 결집되는, 즉 투표장에서 민주당을 찍을지 고민하던 사람도 찍게끔 하는 메커니즘이 도대체 무엇일지는 의문이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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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4일 수요일

세련된 권위가 구현되는 교육현장을 바란다

학창시절 과도한 민족주의 내지는 친북적 교육이 있었다는 게 (그것이 공식 교육과정이건 교사의 독단이건) 진보에 대한 실망감의 근거로 많이 지적되고 때때로는 청년우파의 탄생설화의 주요 줄기로 인용되기도 한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그런 쪽으로는 직접 겪은 나쁜 기억은 없다.


많이들 있었다고 회고하니까 정말 많이들 그랬구나 하긴 하는데, 알아서 걸러들어서 기억에서조차 지워 버린 건지, 아니면 그런 선생님들을 안 만나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아예 내가 편향적인 사람이어서 편향이라고 안 느꼈던 건지. 여튼 내가 몰랐던 그런 사례들을 보면서 경험을 간접적으로 확대하고 그러면 되는 것이겠지.

심지어 최근에도 어떤 선을 넘는 편향적 교육의 사례는 잊을 만 하면 보이기는 한다. 예를 들어 공식 학습자료 같은 건 아니고 일선 현장에서 만든 학습지 같긴 한데, 북한의 체제 선전적, 착취적 시설물들을 소개하면서 비판적인 인식은커녕 묘하게 친근감까지 의도했다고 느껴질 수 있는 사례가 있었다. 학부모들이 보면 경악할 만했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특정 아젠다에 포커스가 맞춰진 도서를 아예 교육청에서 교과서로 제작해서 배포하기도 했었다. NGO들과의 협력으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헌법에 탈핵이 있는게 아닌 한 그런 건 교육당국이 할 일은 아니고 공공성이라는 가치와 거꾸로 가는 일이라고 생각.

또 생각나서 예시를 추가하자면 인헌고에서 반일 관련 피켓같은걸 학생들에게 들게끔 했다는 것도 있었음. 이걸 공론화한 사람들이 그 성평화 동아리 하던 사람들이라는 건 차치하고 저게 사실이라면 분명히 잘못된 것인 듯.

다만 청년우파의 서사는 일단 의심해 보는 관성에 따라 한 가지 의구심을 가져보자면, 헌법적인 원리와 기본적인 학술적 개념들에 기초한 당연한 것들을 가르치는데도 학생들이 그걸 좌편향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거부감을 갖는 경우도 있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헌법 얘기가 나와서 첨언하자면 물론 기본적으로는 교과교육이니까 거기서 배워야할 '학술적인' 것들이 있을텐데 그런건 헌법과는 독립적일테고, 헌법도 시민된 입장에서 불가침은 아니니 그것을 넘어서는 사유도 할줄 알아야겠지만 일단 시민교육의 성격을 가진 대목들에선 제일 기본적으로 기댈 곳은 헌법이라고 생각함. 물론 뇌피셜임...)

초등학교 때는 우리 학교가 통일 시범학교였는데 낭만적 대북관, 막연한 통일지향 같은 식이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정확한 자료와 여러 통일론을 소개하는 식이어서 지금 봐도 꽤 잘 배웠던 것 같다. 다만 북한의 문화를 설명할 때 정권에 의한 통제의 산물들이라는 걸 왜 강하게 얘기 안하는지 의문이긴 했었는데... 뭐 모든 문단에 그런 피아식별부호와 비판의식을 삽입해둘 필요는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알아서 납득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퀘스쳔마크가 남는다면, 그런 질문들이 쌓여 편향적 교육이라는 인상을 형성할 수도 있을듯.

중학교 땐 공산주의/사회주의랑 민주주의가 반댓말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화의 반대가 산업화가 아니다 (이게 왜 나오는 얘긴지는 비슷한세대 페친분들이면 아실듯) 이런거 설명해 주신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현실정치적 동기가 어느정도 반영된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쨌든 순전한 개념 상으로는 정확한 것들이었고.... 그런걸 편향적 교육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근데 돌아보면 확고한 우파성향의 학생들이었다면 그 선생님들이 그런 설명들을 하게 된 동기 자체에서 어떤 '정치적' 문제의식을 느껴 거부감을 가질수 있었겠다 싶긴 함. 실제로 그런 학생들로부터 뒤에서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사회 관련과목 선생님이 아니기도 했고....

여하튼 이 문제는 어려운 듯하다. '교사가 문제소지 있는 발언을 해도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능력을 함양하면 된다'는 해법이 이상적이겠지만 여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공교육은 아무것도 전제되지 않은 무질서로부터도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지라, 그 능력을 함양하는 것도 결국 공교육의 역할인거고... 비판적 수용의 가능성을 모두에게 열어두려면 학생들 개인의 상식과 사고력 같은 것도 중요하겠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학교 내의 권력관계 같은거랑 관련이 있지 싶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교사와 마주하는 것뿐 아니라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와 마주할 기회가 더 많아질수록 교실에서의 그런 문제는 완화될것 같고... 이는 이 글에서 말한 소위 정치편향뿐 아니라 인권침해적 발언 등에 대해서도 어느정도는 해당되는 것 같다. 교사가 교실 내 이런저런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통제력과, 공인된 내용을 전달할 충분한 권위는 있되, 교사가 하는 모든 발언이 그런 공인된 내용들에 준하는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것이 인지될 수 있도록 분위기적으로, 시스템적으로 보장하는?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쓰면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일단 여기까지만.

여하간 정론에 대한 불신과 대안적 세계관에의 추종은 권위주의의 필연적인 쌍대인 듯하다. 독재의 권위 하에서 민족주의를 찾게 되었던 교사들도, 그것을 설파한 교사들의 발언을 근거로 스스로를 청년우파로 전신한 학생들도 말이다. 그런 식의 찍어누르는 권위를 타파하고 세련되고 민주적인 권위를 구현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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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9일 금요일

유보로 위장한 확신: 집단적 2차 가해를 중단해야 한다

피해호소인과 가해지목인이라는 단어는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학생사회나 원외 진보단체 등의 '공동체적 해결'의 과정에서 자주 사용되던 단어이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었는데 박 전 시장 사건에서 전면에 등장했다.


사실은 문제가 완벽히 적절하게 다뤄질 수 있는 이상적인 상황에서라면야 피해호소인과 가해지목인이라는 잠정적인 명칭은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사건도 그렇게 이상적이지 못하고, 박 전 서울시장 사건은 특히 더 심했으므로,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가 적절하게 사용되었을 때 딱히 문제가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그걸 당시 사건과 관련해서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현실에선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권침해 사건을 다룰 때는 그러한 침해가 일어났다는 잠정적 사실에 주목하여 사건성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 단어들을 사용한다면 마치 '호소'와 '지목' 자체가 사건성의 핵심을 이루는 것처럼 은연중에 오도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마치 호소와 지목이 안 이뤄졌다면 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건 그래도 그 개념들(이상적으로 활용되었을 때)에 실제로 그런 뉘앙스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고, 어휘가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마치 비직관적인 번역이라고 늘 비판을 받는 '여성혐오'처럼 말이다. 여성혐오는 그런 '의도적 오해(?)'에 대항해서 오히려 더 적극 사용하고 개념의 원의를 알리는 방향으로 돌파를 했고 이제는 조롱하는 쪽에서도 의외로 원의에 꽤 가깝게 쓴다.

그래서 그런 악용과 오해의 가능성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었는데... 피해호소인이 이렇게 악용되는 걸 보니 개념에 이름을 붙일 때 그 어휘 자체에서 오는 악용 가능성이 무척 중요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널리 쓰이다 보면 개념은 옅어지고 그 이름만이 남게 되며, 그 이름이 주는 직관에 따라 활용이 이뤄지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본 바로는 학생사회는 그 누구라도 가해자와 2차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성폭력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을 중요시해 왔다. 말하자면 구성원에 대한 신뢰의 유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오해 가능성을 가진 그 단어가 피해자성을 지우는 데에 적어도 대놓고 악용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모순적인 신뢰가 어느 정도 깔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성원 일반에 대한 신뢰일 수도, 혹은 현재 권한을 쥐고 있는 기구의 능력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겠다).

학교에서만 해도 그러한 모순적인 신뢰가 있어야 정당화되는 것이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인데, (여담이지만 실제 법정에서의 무죄추정의 원칙 같은 것도, 공권력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적용이 되는 것이지,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될 때에는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약간은 있다고 본다) 불특정 다수에게서 설왕설래가 오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단어가 적확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려운 것이다.

박 전 시장 사건에서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게 문제가 많이 된 건, 여당에서 피해자 '대신'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쓰자는 식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단어를 소개하는 양상으로 액션이 나왔고, 지지자들도 피해자성을 지우려는 방향으로 (정확히 위에 말한 그런 방식으로) 해당 단어를 악용하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다들 기존에 알고 있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사용했다면 문제가 되었겠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호소인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소개가 되었고, 여기서 지지자들이 일반적인 지칭과 달리 '굳이'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은 명백히 악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사건을 처리할 때 원칙적으로 필요한 피해사실 인정의 '잠정성'을 소극적으로만 깔고 가면 되는데, 그러지 않고 그 잠정성을 '적극적'으로 부각하는 방향으로, 또한 성폭력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호소'와 '지목'을 사건화하는 방향으로 해당 단어를 사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애초에 인권위 등에 의해 사실관계가 많이 인정된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오직 개념적인 측면에서만 봐도) 그 당시에도 이미 100% 적절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피해자가 불특정 다수로부터 여러가지 비난과 2차가해의 풍랑을 마주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므로 정당 입장에서는 이를 막았어야 하는데, 해당 단어를 둘러싼 논쟁, 그리고 거기서 피해사실의 원론적인 잠정성을 과도하게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러한 2차피해가 집단적으로 생산되었다.

법원 및 인권위에서 여러가지 사실관계가 직간접적으로 인정된 지금에서도 여전히 피해자는 피해자라고 불리지 못하고 많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으며,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는 그것을 상징하게 되어버렸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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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0일 수요일

변형되어 재생산되는 자유의 개념투쟁

뉴라이트 세력이 한국 진보세력한테 그렇게들 인민민주주의라고 비난하고, 자유민주주의인지 인민민주주의인지 택하라는 식으로 말해 온 데에는 나름의 이유는 있는 듯하다. 그들과 그 친구들이 다 군사독재 속에서 나름의 대안을 수립하려는 운동을 해 봤던 분들이라... 그들이 얘기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세력의 반감은 어느정도 실체는 있는 거고 다만 좀 철지난 정세관과 개념적 혼동에 근거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반감과, 그에 대한 비판 모두 말이다.


좀 답답하더라. 자유민주주의는 우파적인 것이니까 반감은 드는데, 그 티를 내자니 엥 그러면 인민민주주의겠네, 공산주의네 하는 프레이밍은 계속 당하고... 그런 낙인에 애써 코웃음치는 사이에 또 하필 인민이라는 단어도 들어가 있으니 어느새 그 프레임은 우파 대중들에게 무척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정신차려야 한다. 자유 너무 싫어하다가 그 단어를 (나아가, 적어도 인식상으론 그 가치지향까지 어느 정도는) 보수세력한테 뺏긴 게 현실이라고 본다. 수십년간 싸우면서 공헌한게 결국 자유민주주의를 일궈낸 거고 민주화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자유 증진에 기여한 부분이 많은데 억울하지도 않나 싶다.

한편 요새 보다 젊은 쪽에서 나오는, 자유주의가 유해하다는 얘기는 출발점이 좀 다른 것 같다. 자유가 침해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것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자유 증진을 막는 효과가 있고, 잘못된 도식에 근거한 극우담론인 경우가 경험상 많다 보니 그걸 경계하는 것이다. 다만 기성 거대담론에서의 자유와도 밀접하게 연결이 돼서 위에서 말한 구도를 재생산하는 면이 있는 듯하다. 확실히 자유라는 가치가 드높이 이야기되는 시대는 아닌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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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9일 화요일

극우 역사관의 두 메커니즘: 불편한 진실과 탈진실

극우적 담론에서 예전부터 있는 레파토리가 그 반대세력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을 추앙하면서 불편한 진실을 가린다는 건데.... 난 원래 역사 속에서 그런 불편한 진실이 늘 있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걸 모르지 않고, 그걸 직시하는 게 사건의 가치를 퇴색시키지 않는다는 식으로 내적 반박(?)을 해 왔었다. 지금도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근데 요새 보니까 그렇게 불편한 진실이라고 그 판에서 얘기되는 것들 중 아예 근거 없는 소설인 경우도 많은 모양이더라. 램지어 어쩌고 시끄러워서 찾아보다가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들.... 내가 부끄럽게도 팩트체크에 약하고 사변만 많다 보니 세상을 너무 선해하고 있던 게 아닌가 한다. 아예 없는 얘기였다면, 그것에 한해서는 저런 생각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거나 혹은 오히려 띄워주는 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와 별개로 권력에 의해 어떤 사건이 추앙되다 보면 오히려 퇴색될 위험이 있는 것도 맞는 듯하다. 나도 헌법 전문 같은거 엄청 중요시하고, 오직 상징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우며 무척 합리적인 방식으로 힘을 발휘하는 말들이라고 여기기는 하는데, 국가가 가진 권위의 양면을 생각하면 약간 미묘해지는 부분.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그런 사건들을 포함하고자 할 때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고... 몇 년 전에 히트쳤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로 삼자는 주장도 그래서 조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듯 상징으로 삼는 문제는 이래저래 조심스럽지만, 현대사의 의미 있는 순간들을 그대로 남겨두지 않으며 공식적으로 추인하고 그에 대한 국가의 입장이 변화하는 건 어쨌든 필요하지 싶음.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성의 언어로 끝까지 파헤치는 움직임들이 분명히 많이 있는데, 그걸 모르니 극우 판에서는 자신들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듯.

여하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다면적인 조명이 위처럼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보다는 나름 건강하게 되어 왔다는 걸 이것저것 찾아보면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런 원론적 의견이 얘기될 여건이 잘 없을 뿐 사람들이 그런 걸 모르지 않는다 (상술했듯 나는 사람들이 남들은 그런 복잡한 걸 '몰라서 안 얘기한다'고 믿는 게 극우화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그리고 정말 심하다면 언제든 건강한 방법으로 반발할 준비가 지금으로서는 돼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런 동력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지금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제도적 추인이 지지부진한 것들도 언젠가 그렇게 할 때가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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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5일 금요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독특한 캐릭터

윤석열 총장은 흔히 강직한 인품 하면 연상되는 클리셰(?)와는 조금 다르게, 사회 각계 명사들과 접촉해서 이야기 듣고 하는 걸 원래 좋아하는 것 같다. 전에 그 언론사 사주 만났다는 논란도 그렇고, 학계 쪽에서도 복수의 곳에서 이야기가 들려 왔다. 고위공직자로서 개인적 면모와 상관없이 원래 많은 사람 만나는 거 아니냐 하면 뭐 할 말은 없는데, 느낌이 그렇다.

그리고 전반적인 행보 역시 겸양하고 자중하는 느낌과는 거리가 있고 잡음을 감수하면서까지 굉장히 거침없게 하는데, 흔히들 말하는 것과 달리 '원칙주의자'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직분과 그에 대한 신념에 근거한 목표 달성을 강하게 추구하는 와중에 일어나는 행보라고 봐야 일관된 듯.
무슨 말이냐면 검찰의 특수수사 역량을 유지해서 중대범죄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과 관련해서, 오직 검사 직분에 충실함으로써 하기보다는 필요하면 좀더 폭넓게 활동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꾸준히 가졌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박근혜정부 때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당시 고초를 겪고 나서 정권에 타격을 주기 위해 유세지원 내지는 출마를 생각했었다는 증언도 있다. 딱 이런 느낌.
그러한 신념과 발언들이 상당히 생생하고 구체적이면서도, 행정 절차적인 것을 비롯한 '전문성'의 언어에 국한되기보다는 '일이 제대로 되게끔 해야한다'는 생각과, 검찰조직의 역할에 대한 어떤 사명감에 가까운 듯하다 (검찰이나 국정원 등 일을 밀어붙여야 하는 수사기관 사람들에게 유독 많은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언론에 많이 보도되기 시작한 2013년부터 늘 그랬다.
한편 언제부턴가 자주 있는 자유민주주의 언급을 포함한 몇몇 발언들에서는 다소 추상적인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기존 검찰총장들에게서 자주 나오는 스타일의 언어는 아닌데다 윤총장 기존 발언들의 색깔과도 차이가 있어서, 의도 하에 던지는 발언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아리까리하긴 했으나 기자들은 정치입문 기정사실화로 보는 모양이다.
아무튼 특이한 캐릭터이고, 보수야당 입장에서는 일단 매력적인 주자가 된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수사를 했다는 것도 보수야당 내부의 반발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옛 보수정권이 실드불가의 상태가 되어버렸으니 중도적인 사람들의 칭찬뿐 아니라 상당히 많은 보수 유권자들까지 지지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만약 직업정치를 한다면 정치관 전반이 상식적인지, 개별 이슈에 대한 입장이 어떤지, 직업정치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관철할 역량이 있는지 등에 대한 검증은 되어있지 않고 이는 상징으로서 받는 막연한 지지에 불과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일반 국민들뿐 아니라 정치인들부터가 무척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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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3일 수요일

식물에서 표상되는 생명력의 양면: 감상적 두려움에서 보편적 애호까지

단순 감상이지만 식물들이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약동하는 생명력의 정점과도 같은 모습, 밀도높고 다채로운 모습이 식물들에서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식물의 일부분을 잘라 심어도 자라난다던가 하는 식으로 동물과는 이질적인 방식의 재생산이 가능함을 접할 때, 농사를 짓기 위한 육종의 시도에 잘 반응하여 눈에 보이는 수준에서 그야말로 전혀 다른 식물처럼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순간순간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며칠 만에 산비탈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그 양이 늘어나는 개체군을 볼 때 등등. 심지어 빛에 반응해서 밤낮에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도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계절에 따라 식물들이 말랐다가도 잎이 다시 나는 것 등, 생명력과 그것이 가져다 주는 주기적 현상들에 대한 애호는 가지고 있고, 조그만 식물들은 무척이나 예뻐하는 편인데 말이다. 게다가, 단일 식물체(?)일지라도 무척이나 화려한 꽃들은 왜인지 위와 같은 감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용이하여, 사진 같은 건 신기해서 찾아보곤 하지만 집에 두거나 하기에는 부담스럽더라.

살아있는 것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일 수가 있지만 한편으론 어디로 튈지, 얼만큼 커질지도 알 수가 없고 지양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라... 삶의 이런 측면이 인간의 일상에서는 주로 정제된 형태로 보이는 것과 달리 꾸역꾸역 자라난 식물들의 화려함 속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 그것이 어떤 위화감으로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식물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텐데 말이다. 좀 전혀 다른 얘기지만 에반게리온이나 사도들의 통제불가능하고 제압불가능한 특유의 생명력이 무척 매력적인 소재인 이유와도 비슷할 것 같고. 물론 자연물들을 내 마음대로 상징으로 간주하고 비평적으로 얘기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위에서 예시들을 쓰다 보니 든 생각인데, 어쩌면 식물들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실제로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서 약간 이상한 것뿐인데, 거기에 온갖 감상이 붙은 걸 수도 있겠다. 얼마나 활발하냐에 따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무질서한 자원을 빨아들여서 질서있는 패턴과 구조를 만들어내며 생장한다는 점 자체는 기본적으로 확실히 매력적이고 놀라운 것이기도 하다. 뭐 이건 식물만이 아니라 대다수 생명체가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다채로운 현상들을 예뻐해야만 한다는 것도 좁은 시각일 것이고, 그렇다고 굳이 싫어한다고 픽스해 두거나 조그만 식물들만 좋아한다고 픽스해 두어서 좋을 것도 없는 듯하다. 따라서, 감상적 태도를 완전히 극복하긴 힘들더라도 위에서 말한 보편적인 애호를 바탕으로 직시하고 알아 가는 태도를 가져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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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일 월요일

전기자동차에 대한 간단한 조사

지금대로라면 전기차에 쓸 전기도 결국 상당 부분이 화석연료를 태워서 나올 것이고, 심지어 자동차 엔진에서 직접 태우는 것보다 거치는 단계가 더 많아서, 여러 센스에서의 효율도 더 낫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하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


물론 막연한 짐작이고, 연료 정제, 수송 등에 드는 자원까지 -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 단계에 포함시킨다면 당연히 달라질 수 있다. 사실 딱 발전소만 보는 게 아니라 이런 전체적인 프로세스와 그것들에 대한 숫자를 좀 잘 알면 판단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인데... 시간내서 한번 조사해 봐야겠다 싶다.

여하튼 그래서 결국 전기차가 친환경이라고 하는 이유가 정확히 뭔가? 늘상 궁금했던 건데 이번에 대충만 찾아봤다. 제시되는 근거들이 크게는 다음과 같았다. 이 글도 이 글이지만 더 자세한 내용들과 논쟁거리들은 페이스북 게시물(하단에 링크됨)에서 페친 분들께서 훨씬 많이 말씀해 주셨으니 그 쪽에서 참고해 볼 수 있다.

1. 화석연료를 태우는 장치가 각 차량에 분산되어 있는 경우보다, 화력발전소에 중앙화되어 있을 때에 오염물질과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관리가 그나마 쉬움 (신경쓰고 규제해야 할 단계와 대상의 수가 훨씬 줄어드니까).
또한 대기오염 등 도시 공해 측면에서도, 사람들의 생활공간 곳곳에 분산되어 있는 것보다 발전소에 집중된게 악영향이 덜함.

2. 전력 수급이 화력발전을 덜 쓰는 쪽으로, 혹은 차세대 복합화력 등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쪽으로 바뀐다면 전기차는 내연기관 차보다 탄소를 당연히 훨씬 덜 배출함. 결국 그것을 염두에 두고 전기차를 하는 것.
국내 기준으로 현재 상황에서 화력발전 비중이 줄어든다는 가정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의문이나, 전세계적 컨센서스가 있다보니 어찌저찌 변화가 이뤄진다고 치면 장기적으로는 충분히 의미있어 보임.

3. 설령 100% 화력발전으로 만든 전기를 쓰더라도, 전기차가 탄소배출 총량이 더 적다고함. 다만 엄청 드라마틱하진 않고 70%대~80%대 정도인 모양임. 결국 장기적으로는 2가 핵심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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