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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31일 월요일

내가 좋아하는 스파이더맨 3 (2007)의 장면

스파이더맨 3 (2007)에서 '뉴 고블린'으로 재탄생한 해리 오스본이 오토바이를 타던 피터 파커를 공격하는 전투신은 내가 단지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에서뿐만 아니라 히어로영화 전체를 통틀어 최고로 좋아하는 전투신중 하나이다. 액션 자체의 박진감, 각 액션이 캐릭터성 및 영화 내용과 맞물리는 지점들, 전작들을 떠올리며 반가워하게 하는 대사 등이 무척 조화롭고, 시대 차이가 나는 어지간한 MCU보다도 훨씬 잘 뽑았다고 생각한다. 본작의 감독인 샘레이미가 맡게 된 닥터스트레인지 2를 무척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히어로영화의 스펙타클은 액션에서 느껴지는 속도와 힘의 감각(?)을 통해서, 긴장의 관계와 주목할 메시지를 한번에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역사를 논할 때 늘 인용되는, 열차가 들어오는 장면과 그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으로부터 예고된 바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의 액션신들은 이런 관점에서 언제 어디를 봐도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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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2일 토요일

과학 및 과학문화에서의 '문제 아닌 문제'들에 대하여

어릴 때는 강한 확신과 취향에 의해 뭔가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자라면서 차츰 이해하게 된 것들이 상당히 많다. 아마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로, 어릴 때는 책이나 매체를 접하면서 뭔가가 이상하게 느껴져도 '내가 아직 이해 못하는 뭔가가 있나보다' 하고 넘겼다가, 나중에 와서야 아 그런것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였구나 (꼭 틀렸다는건 아니고) 싶은 것들도 꽤 있다. 그 중 하나를 공유해 본다.

물론 아래에 소개하는 방식은 대개 현재의 내 견해에 맞춰서 윤색, 발전되고 정리된 면이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런 의구심을 단편적으로나마 여러차례 분명히 가지긴 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의구심이 들게 하는 매체상의 표현이 그만큼 많았다는 점을 발화점 삼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져 온 생각의 경향성을 정리나 해 보자는 느낌으로 써본다.

이상하다고 느꼈던 게 뭔고 하니, 소위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 인간만이 가졌다고 알려진 특별한 능력들,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게 된 구도 등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특별함이 마치 그 연원에 대한 설명과 납득이 필요한 '문제적' 성격을 갖는 것처럼 여기는 사고 및 서술의 방식이다.

인간의 여러 정신적 능력에 대한 경탄, 인간이 자연과 불화하면서 자연을 이용한다는 도식 등을 나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건 인간이라는 집단이 가진 특징을 묶어서 단순히 편의상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결국 파고들어가면 인간성도 자연과의 동질성, 연속성 속에 있다는 관점을 기본적으로 갖게 되는 듯하다. 말하자면 인간도 결국 자연과 하나라는 것인데, 다소 클리셰적인 표현이라서 오해될 수 있겠으나 그런 클리셰가 주로 가리키는 신념들과는 그 동기가 다르다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다.

즉 나는 인간성 자체가 어떤 현상일뿐, 각별한 관심에 따라 설명과 납득이 필요한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편의상 그렇게 말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불연속성을 더 강조하며 그 불연속성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뭔가 설명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종교를 얘기하려고 하는 건가 싶을 수도 있는데, 위에서 얘기한 그런 방식은 단지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에 관심있는 쪽에서도 은근히 많이 나타난다. 돌아보면 나는 기억나는 가장 어린 시점부터 과학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소비하고 찬미하는 주류적인 방식도 나는 충분히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따옴표를 붙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과학의 내용을 적법하게 생산하는게 과학이지, 특정 세계관이나 특정 사고방식이 '과학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으로서의 과학이 아닌 사회적 프로그램로서의 과학에 우연찮게 친화적이고, 그러한 과학의 도미넌스를 위해 실제로 육성되기도 하는 어떤 세계관(보다 정확히는 그 향유자들)은 특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과학을 서포트하는, 혹은 스스로 그렇다고 하는 세계관들은 대개 내가 가진 성향과 잘 맞았으나, 그것들 중 위에서 말한 것들은 내 생각과 달랐다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 혹은 인간집단의 능력에 대한 그런 설명과 납득에의 요구를 '문제'라고 부를 수는 있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다 구체적인 다른 질문들을 위한 중요한 동기부여는 될 수 있지만, 그 중요성과는 별개로 직접 답을 얻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문제 아닌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궁금증은 겉보기에 마치 과학적(?) 관심사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런 관심사를 추동할 수 있지만, 사실 '나는 왜 하필 이렇게 태어났는가', '생명체라는 게 어떻게 이렇게 찬란하게 번성했는가'와 비슷한, 목적론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은 질문자 스스로 마음깊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계속되는 성격의 것이다. 납득을 위해 여러 사실관계와 수치 등을 제공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결국은 '신기하다는 선언'에 더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결론은 해당 질문 자체에 대한 논리적 분석 등으로 간단히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내가 그런 질문들을 지금 다루고 있는 이 방식 역시, 결국 어떤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이라기보다는, 동감이 별로 가지 않는다는 '선언'에 불과함은 물론이다.

물론 그런 신기함이 들 때의 가슴뛰는 느낌은 긍정적인 것이고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 게 없었다면 그 어느 분야에서도 재밌는 지적 성과들이 잘 안 나왔지 않겠나. 그리고 칼같이 나눠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문제 아닌 문제'들에 과도하게 천착하는 것, 다른 문제들이 오히려 가짜고 그런 문제들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마음 한켠이 부담스러워지고, 그런 것들이 강조되는 걸 볼 때면 분명히 뭔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걱정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정작 내가 생각하는 '문제인 문제'들을 탐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그러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한 과학 강연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청취자들의 동기가 이런 경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예전에 대중적인 철학 강연이 과도하게 '교훈적'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쓴 바 있는데, 이것과 어느정도 통하는 이야기 같다). 유튜브 등에서도 어떤 과학 컨텐츠가 인간과 관련된 것일 경우 주로 이런 식으로 소비된다.

대중적 수요의 그런 측면이 내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런 수요에 기댄 문화사업들이 프로그램으로서의 과학의 도미넌스로 단기적/장기적으로 연결되는지의 여부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는 것 같다. 꼭 그런 수요만 있는 것도 아니고, 소비의 그런 개인적 동기와는 상관없이, 질좋은 과학의 사회적 도미넌스에 기여하기만 한다면 괜찮은 것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과연 정말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가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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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9일 일요일

안 해도 될 말들에 대하여: 공적 잠재력을 스스로 저해하지 말자

 한전공대를 비판하는 어떤 글을 보았다. 한전공대 설치를 비판할 거라면 한전공대만 까면 되는데, 꼭 '그 지역' 운운하면서 안 붙여도 될 말을 붙이니까 다른 근거들이 있더라도 편을 들어 주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그런 글들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닌데, 읽다가 그런 대목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글이 한 두 건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높으신 분들이 뭔가 새로운 걸 유치하거나 혹은 결사반대해서 민심을 얻고 싶어하고, 그것 때문에 큰 방향성을 거스르게 되거나 거시적 이익 측면에서 일이 꼬이기도 하는 게 하루이틀인가? (한전공대가 이에 해당하는지를 굳이 묻는다면 예라고 하겠지만 그 여부와 근거가 이 글의 논지와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호남에 괜찮은 땅이 많은 데 비해 개발은 덜 되어 있다 보니 뭔가 명분도 서고, 그런 사업들이 유치될 여지가 많아서 눈에 띄는 것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 그리고 인터넷 우파담론에 익숙한 사람들 중 일부는 전라도 하면 괜히 더 킥킥대는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기억에 남기다 보니 더 그럴 것이고 말이다.

또 전라도냐며, 특정지역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기어이 비하하고야 마는 그 정서와 일부러라도 거리를 둘 때에만이 호남지역에 대한 분석(?)은 정당한 의견으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도 단위의 특정지역을 그렇게 뿔달린 도깨비처럼 취급하는 건 타자화에 다름 아니고,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거리를 두어야 한다. 세상은 딱히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지만, 그 비합리들의 양상에 대한 커먼센스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으며, 그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설명은 보편성을 잃어, 어떤 읽는이에겐 소구력을 갖는 반면 다른 읽는이는 멈칫하고 동의를 유예하게끔 한다. 요컨대 세상이 기대받는 합리성의 정도보다는 텍스트가 기대받는 합리성의 정도가 높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보편적 전달가능성을 스스로 저해하는 글이,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하여 더 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형식의 유사성에 국한한 얘기이긴 하지만, 이와 같이 안 해도 될 말이 얹어져 있어서 동의를 유예하게끔 한다는 점에서는 최근에 논란이 된 윤지선 교수 논문에 대한 여러 비판들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다. 그 논문이 논문으로서 형식적 요건이 부족한 것도 맞지만, 그것이 큰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분야를 불문하고 찾아보면 한 트럭이므로 해당 논문에 대해 콕 집어 말하고 싶은 바는 아니다. 유독 어그로를 끈 원인이 된, 보겸에 대한 각주와 남성혐오 논란도 여기서 말하고 싶은 바는 아니다.

그 논문은 곤충뿐만 아니라 물리학을 포함한 수많은 분야의 과학용어들을 수사적, 비유적으로 빌려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도들이 보기에 뭔가 한마디씩 얹어서 반박하고 싶게 만드는 실로 놀라운 기능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쓰인 반박들도 많았다. 그러나 잘 보면 그 논문은 올바른 과학개념들과 그 사용을 제시하는 방식으로는 애초에 반박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런 논문들도 사실은 한트럭이며, 특정 분야에서 글쓰기 스타일로 아예 자리잡은 듯하다)

그런 반박의 시도는 애석하게도 의도와 무관하게 과학지식 자랑으로만 간주될 가능성이 높으며, 어떤 과학지식을 가지고 와서 제시하더라도 그것은 구조를 갖춘 체계적 반박으로 기능하기보다는 되려 비유와 수사의 수프 속에 또다른 재료로서 동일화되어 녹아 버릴 것이다. 수용될 만한 비판을 하려면 데란다, 나아가 들뢰즈까지 (설령 그들의 저작 전체가 어떤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잘 숙지한 채로 해야 하는데, 단기간에 그걸 할 수도, 할 의향도 없다 보니 결국은 무리한 주장을 하고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혹은 인문학에 대해 지나치게 넓은 낙인찍기를 하면서 과학주의적 인식을 드러내게 된다. 이런 것에 대한 비판적 기획의 원조인 소칼 역시 그랬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과학도들이 느끼는 답답함의 정도는 다른 어느 웬만한 집단보다 클 것임에도, 정작 과학지식과 과학도로서의 자의식을 바탕으로 뭔가 말을 얹을수록 더 함정에 빠져 버리는 셈이다. 이는 과학용어를 빌려 사용하면서 원관념과의 구분을 흐려놓아 부수적 권위를 획득해온 일군의 철학자와 비평가들이 그 내용을 떠나 메타적으로 깔아놓은, 요즘 말로 얄미운 가불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의욕적인 비판보다 의욕 잃은 냉소가 차라리 기대이익이 높으니 말이다.

요는, 공적인 공간에 올라갈수 있도록 언어를 단련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며, 남이 보는 글, 특히 아무나 쓸 수 없는 곳에 쓰는 논설문은 주장하는 이와 그가 속한 커뮤니티의 자기만족뿐만 아니라, 보편적 독자, 나아가 반대 진영의 독자에게까지 어느 정도의 소구력을 가지도록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쓰고 나니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는데, 이 글만 해도 한 쪽 예시에는 동의하지만 다른 쪽 예시에는 동의하지 않아서 지지를 유예하는 분들이 많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쪽 예시 속에서도 특정 대목 때문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도 가능하다. 결국 완전무결한 글을 기대할 순 없는데, 그렇다면 예시나 레토릭에 관한 서로 다른 미감을 갖춘 집단들끼리 싸울뿐인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특정 이슈에 대한 글을 읽다가 턱 걸리는 지점이 있다면 해당 이슈에 대해 인식의 차이가 크다고 판단되어 읽기가 힘들어지고, 오류부터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기는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그렇게 지적된 오류가 만약 보편적으로 비판받을 만한 것이라면(그 보편성은 누가 정하는지의 문제가 중대하게 남아있지만 일단은 널리 인정되는 여러 원칙들로 해두자), 그만큼 전반적인 신뢰성도 떨어지게 되는 것 같다. 여기서 단순 미감의 문제냐 그 이상이냐가 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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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8일 토요일

군대문제에 필요한 관점: 근시안적 제안이 아닌 실현가능한 거시적 변화로

정부에서 지난 몇 년간 추진한 월급 인상과 휴대폰 허용 등 병사 처우개선은 거의 이론의 여지없이 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따지자면 이는 편견과 관성 때문에 누구도 추진하지 못했을 뿐 '진작 이뤄졌어야 할 일'에 속하며 군대문제의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 성과를 폄하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는 어떠한가? 지난 보궐선거 이후에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첫째로 (특히 코로나 대응에서의 인권침해와 관련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부조리가 폭로된 게 있다. 이 부분은 장관까지 사과하는 등 꽤 잘 되고 있다고 본다. 겁먹고 더욱 은폐하려는 쪽보다 폭로 하려는 쪽이 힘이 세지도록 앞으로도 정치권에서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테다.
그러나, 병역제도 자체와 관련해서 여당에서 내놓는 여러 방안들은 명백히 불충분하고 때로는 반동적이기까지 한 것 같다. 안보, 젠더문제, 복무자 인권 등 다양한 이슈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병역제도에 대한 큰그림을 찾아보기 힘들다. 군가산점 부활은 물론이거니와, 박용진 의원이 제안한 평등복무제 역시 평등복무 그 자체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런데도 딱히 그렇게 평등한지도 모르겠고, 많은 인원에게 실질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에 비해 실질적인 숙련도를 확보하기 어려운 등 국가 입장에서나 개인 입장에서나 낭비만을 일으킬 방안에 가깝다고 본다.
나는 이런 현상이 병역과 관련한 불만을 어떻게 '달랠지' 생각하다 보니, 기계적 공정함에 영합해서 비교적 '쉬운' 근시안적 대책만을 내놓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군대문제 관련해서 해야 할 일의 본질은 불만 달래기 그 자체라기보다는, 군대가 실제로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고,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일테다.
보상에 대한 고민도 이뤄져야겠지만 더 어려운 문제인, 군대 조직을 적당히 들볶으면서 군대문화 자체를 바꿔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도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군대에서 무슨 사건이나 문제제기가 생겼을 때 악명높은 보신주의적 일처리와, 그에 따라 모든 책임과 고통이 피해자한테 돌아가는 그 뿌리깊은 구조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
일단 사건을 덮어서 얻는 이득보다 그 은폐의 시도가 폭로되었을 때 얻는 손해가 더 크다면 어떻게든 움직이긴 할거라는 점에서, 휴대폰 허용에 따라 그런 폭로가 보다 수월해진 점은 일단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건 군대문화의 말단에서 코너에 몰린 당사자가 택할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서 어떤 시작점일 뿐이다.
결국은 간부가 병사를, 선임병이 후임병들을 사람 취급할수 있게 하고,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을 귀찮은 골칫거리로 인식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인식 변화를 위한 교육만으로 된다고 하면 순진한 소리일 거고, 징계 등과 관련한 상급자의 손익 판단이 하급자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방향으로 덜 가게 하는 장치들을 생각해볼수 있을 것이다. 박용진 의원이 남녀평등복무제로 시도했던 것과 같은, 병역제도에 대한 보다 큰 그림들도, 군대문화를 상식적인 수준으로 돌려놓는 모멘텀이 확실히 보일 때에야 더 성숙한 형태로 다시금 따라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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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1일 토요일

마땅히 없는 취미에 관하여

난 진득한 취미가 없는 편이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들은 분명 있는데 그 애호하는 마음만 있고, 정작 구체적으로 즐길 줄 알고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는 것들은 예전부터 딱히 없는 거 같다. 내가 존경하는 분들 중 나랑 성격이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분들이 몇 분 있는데, 그분들은 나와 달리 여러 취미영역에서도 상당히 조예가 깊으신거 같아서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그래도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들은 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그 중에서 뭘 어울리게 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알고 추구해 보는 것도 멋있는 거라 생각해서, 이런 것들 중 비교적 간편하면서도 꾸준히 할수 있는걸 찾아봐도 재밌을 거 같다. 이렇게 글로나마 써보면 그런걸 좀 생각해보는 계기라도 되겠지.

성향은 감각적인 쪽보다는 지적인 쪽에 명백히 가까운데, 쓰다보니 어째 해보고 싶은 것들 중엔 전자가 많은듯하다.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거부하고 잘 못하는 것에 선망을 갖는 셈인데(...) 이러니 일이건 취미건 인생이 비효율적으로 되지 싶다. 여하간 감각적인 부분에 대한 자신감을 좀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 어릴 땐 책을 많이 읽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는 책 읽는 취미는 못 붙였다. 애서가 애독가인 가족들과 내가 제일 다른 점 중 하나다. 주로 페북에서 페친 쌤들이 쓰신 책이나 소개하시는 책을 많이 접하는데 꽂혀서 사 놓은 것들도 여럿 있지만 제대로 읽지 못해서, 갖고있으면 공연히 든든한 오브젝트 정도로만 되어있고... 근데 책의 경우는 내용이 머리속에서 재인되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페이지가 좀 비정상적으로 안 넘어가는 거라 그 습관만 어떻게 해결을 하면 의외로 효율적인 취미가 될 듯.

- 좋지 않은 식재료는 판단을 잘하지만, 좋은 식재료들의 서로 다른 풍미는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편이다. 오히려 그러다 보니 특이하고 확 오는 향들에 관심이 많다. 커피나 디저트에 첨가되는 시럽 같은 것들도, 요리에 들어가는 향료들도, 얼마나 좋은 것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 등에서 나름 쉽게 구할 수가 있더라. 그런것들을 사서 써보면서, 주관적이면서도 공유 가능한 표현을 연습하는 작업도 나름의 재미가 될듯.

- 요즘의 밴드음악도 좋지만, 조금씩 잊혀져가는 옛날 밴드음악들에 추억보정 좀 더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노래방 자주 같이 갔던 지인들은 알거다. 명곡이고 당대에 분명히 유명했는데도 유튜브 조회수가 수천 회 정도밖에 안 되는 곡들을 보면 기억에의 의무감을 주제넘게 느끼기도 한다. 여튼 요즘 곡들보다 좀더 만화같고(?) 멜로디가 확실한 느낌의 2010년대 이전 곡들을 부족하게나마 재현해 봐도 의미있을 듯하다. 마침 맥북 살 때 로직도 딸려왔으니.

- 자타공인 몸동작이 자연스럽지 못한 편인데(지인들이 맨날 놀림 ㅠ 뇌피셜이지만 난 이게 사회성과 관련이 많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방송댄스에 관심이 많아서 유튜브에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다. 위에 쓴 밴드음악과 비슷한 느낌으로 케이팝 중에도 색깔이 확실한 곡들을 꽤 좋아하는데, 취미 레슨같은걸 받으면서 그런 곡들을 익혀보면 어떨까 싶다. 좀 다른얘기지만 쓰다보니 생각난 건데 SMP 쪽을 밴드커버로 해보는것도 재밌을거같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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