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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9일 일요일

안 해도 될 말들에 대하여: 공적 잠재력을 스스로 저해하지 말자

 한전공대를 비판하는 어떤 글을 보았다. 한전공대 설치를 비판할 거라면 한전공대만 까면 되는데, 꼭 '그 지역' 운운하면서 안 붙여도 될 말을 붙이니까 다른 근거들이 있더라도 편을 들어 주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그런 글들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닌데, 읽다가 그런 대목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글이 한 두 건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높으신 분들이 뭔가 새로운 걸 유치하거나 혹은 결사반대해서 민심을 얻고 싶어하고, 그것 때문에 큰 방향성을 거스르게 되거나 거시적 이익 측면에서 일이 꼬이기도 하는 게 하루이틀인가? (한전공대가 이에 해당하는지를 굳이 묻는다면 예라고 하겠지만 그 여부와 근거가 이 글의 논지와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호남에 괜찮은 땅이 많은 데 비해 개발은 덜 되어 있다 보니 뭔가 명분도 서고, 그런 사업들이 유치될 여지가 많아서 눈에 띄는 것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 그리고 인터넷 우파담론에 익숙한 사람들 중 일부는 전라도 하면 괜히 더 킥킥대는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기억에 남기다 보니 더 그럴 것이고 말이다.

또 전라도냐며, 특정지역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기어이 비하하고야 마는 그 정서와 일부러라도 거리를 둘 때에만이 호남지역에 대한 분석(?)은 정당한 의견으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도 단위의 특정지역을 그렇게 뿔달린 도깨비처럼 취급하는 건 타자화에 다름 아니고,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거리를 두어야 한다. 세상은 딱히 합리적으로 돌아가지 않지만, 그 비합리들의 양상에 대한 커먼센스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으며, 그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설명은 보편성을 잃어, 어떤 읽는이에겐 소구력을 갖는 반면 다른 읽는이는 멈칫하고 동의를 유예하게끔 한다. 요컨대 세상이 기대받는 합리성의 정도보다는 텍스트가 기대받는 합리성의 정도가 높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보편적 전달가능성을 스스로 저해하는 글이,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하여 더 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형식의 유사성에 국한한 얘기이긴 하지만, 이와 같이 안 해도 될 말이 얹어져 있어서 동의를 유예하게끔 한다는 점에서는 최근에 논란이 된 윤지선 교수 논문에 대한 여러 비판들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다. 그 논문이 논문으로서 형식적 요건이 부족한 것도 맞지만, 그것이 큰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분야를 불문하고 찾아보면 한 트럭이므로 해당 논문에 대해 콕 집어 말하고 싶은 바는 아니다. 유독 어그로를 끈 원인이 된, 보겸에 대한 각주와 남성혐오 논란도 여기서 말하고 싶은 바는 아니다.

그 논문은 곤충뿐만 아니라 물리학을 포함한 수많은 분야의 과학용어들을 수사적, 비유적으로 빌려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도들이 보기에 뭔가 한마디씩 얹어서 반박하고 싶게 만드는 실로 놀라운 기능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쓰인 반박들도 많았다. 그러나 잘 보면 그 논문은 올바른 과학개념들과 그 사용을 제시하는 방식으로는 애초에 반박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런 논문들도 사실은 한트럭이며, 특정 분야에서 글쓰기 스타일로 아예 자리잡은 듯하다)

그런 반박의 시도는 애석하게도 의도와 무관하게 과학지식 자랑으로만 간주될 가능성이 높으며, 어떤 과학지식을 가지고 와서 제시하더라도 그것은 구조를 갖춘 체계적 반박으로 기능하기보다는 되려 비유와 수사의 수프 속에 또다른 재료로서 동일화되어 녹아 버릴 것이다. 수용될 만한 비판을 하려면 데란다, 나아가 들뢰즈까지 (설령 그들의 저작 전체가 어떤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잘 숙지한 채로 해야 하는데, 단기간에 그걸 할 수도, 할 의향도 없다 보니 결국은 무리한 주장을 하고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혹은 인문학에 대해 지나치게 넓은 낙인찍기를 하면서 과학주의적 인식을 드러내게 된다. 이런 것에 대한 비판적 기획의 원조인 소칼 역시 그랬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과학도들이 느끼는 답답함의 정도는 다른 어느 웬만한 집단보다 클 것임에도, 정작 과학지식과 과학도로서의 자의식을 바탕으로 뭔가 말을 얹을수록 더 함정에 빠져 버리는 셈이다. 이는 과학용어를 빌려 사용하면서 원관념과의 구분을 흐려놓아 부수적 권위를 획득해온 일군의 철학자와 비평가들이 그 내용을 떠나 메타적으로 깔아놓은, 요즘 말로 얄미운 가불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의욕적인 비판보다 의욕 잃은 냉소가 차라리 기대이익이 높으니 말이다.

요는, 공적인 공간에 올라갈수 있도록 언어를 단련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며, 남이 보는 글, 특히 아무나 쓸 수 없는 곳에 쓰는 논설문은 주장하는 이와 그가 속한 커뮤니티의 자기만족뿐만 아니라, 보편적 독자, 나아가 반대 진영의 독자에게까지 어느 정도의 소구력을 가지도록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쓰고 나니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는데, 이 글만 해도 한 쪽 예시에는 동의하지만 다른 쪽 예시에는 동의하지 않아서 지지를 유예하는 분들이 많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쪽 예시 속에서도 특정 대목 때문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도 가능하다. 결국 완전무결한 글을 기대할 순 없는데, 그렇다면 예시나 레토릭에 관한 서로 다른 미감을 갖춘 집단들끼리 싸울뿐인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특정 이슈에 대한 글을 읽다가 턱 걸리는 지점이 있다면 해당 이슈에 대해 인식의 차이가 크다고 판단되어 읽기가 힘들어지고, 오류부터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기는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그렇게 지적된 오류가 만약 보편적으로 비판받을 만한 것이라면(그 보편성은 누가 정하는지의 문제가 중대하게 남아있지만 일단은 널리 인정되는 여러 원칙들로 해두자), 그만큼 전반적인 신뢰성도 떨어지게 되는 것 같다. 여기서 단순 미감의 문제냐 그 이상이냐가 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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