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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5일 토요일

보수우익의 이상한 불만: 민주화세력의 도덕적 우위를 끝내려면 제대로 인정부터 하라

윤석열 옹호 전사로 순식간에 떠오른 전한길 강사가 광주에서 진행된 탄핵 반대 집회에서 '이게 진정한 5.18 정신 계승'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

이 사람만 이러는 게 아니다. 전한길이 뜨기 전부터도 탄핵 반대 집회 영상을 보면, 사람들이 그냥 지금 상황에 맞는 자신들의 주장을 해도 될 텐데, 그러지 않고 20세기 민주화운동을 엄청나게 의식해서 발언한다. 우리도 4.19 한번 해보자, 우리가 진정한 5.18 정신 아니냐는 식이다.

전한길 강사의 발언 장면. 동의해서 가져왔다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대각선을 그었다.


나는 보수 여당 지지자들이 나타내는 이런 현상이, 20세기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끝나가고 보수 여당도 함부로 폄하 못하는 헌법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 내지는 불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 세력에 대한 호오를 떠나 군사쿠데타로 수립된, 혹은 군사쿠데타가 기도된 당시의 여당은 늘 한쪽이었고 (3당합당 및 전향 등으로 복잡해지긴 했지만 대충), 그에 대항해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어쨌거나 그 반대세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대체 뭐가 불만이고 뭘 더 어떡하라는 것인가?

그 불만을 뜯어봐도 정작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 없다는 게 정말 이상한 점이다. 5.18이 민주화운동인걸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계속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이 의심할 자유를 달라고 주장해온 청년극우들과 굉장히 닮았다.

더불어민주당이 자꾸 민주화운동 가치를 독점하고 관성적으로 정치를 하려는 것 같아서 불만이면, 이렇게 우리도 우리 손으로 우리세력의 민주화운동을 만들자고 억지를 부릴 게 아니라, 보수세력 자신들 내에서 기존의 민주화운동들을 괜히 불편하게 여기고 딴 소리 하는 분위기부터 먼저 해결을 해서 보편 가치로의 추인에 협조하면 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민주당이 민주화운동 지지만으로 기본적인 도덕적 우위를 깔고 가는 상황이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민주당 지지자들이 자꾸 자유라는 가치를 보수적 구호로 생각하고 불편해하고 배제하려는 걸 보고 이건 정말 상대 프레임에 말리고 스스로 기반을 좁히는 일(링크, 2021.07.01.)이라고 여러 번 지적했었는데... 보수도 민주화운동 가지고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극히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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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6일 목요일

임명묵 작가 기고문을 읽고: 극우의 세대화합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임명묵 작가와는 학부를 다닌 시기가 거의 겹치고, 스터디도 한두 차례 같이 하기는 했었다. 이미 20대의 나이에 책도 수 권 쓰고 여러 지면에 기고도 하며 이름을 알려서 내가 상당히 부러워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지만, 아마 그 분은 내 존재 정도만 아실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고된 탄핵 반대 집회 체험기(링크)는 평소보다 큰 논쟁을 촉발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한 마디씩 이야기를 얹을 수 있게 여러 가지 사유의 결을 풍부하게 깔아 놓았다는 점에서 그 글은 무척 성공적이다. 그러나 현상에 동조하는 게 아니라 진단할 뿐이라는, 우호적 독해에 근거한 팬들의 옹호가 어쨌거나 필요해졌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글이다. 글의 의도를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독해가 대립하는 셈인데,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났는가? 한 가지 이유는 언론 기고문이라는 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논쟁을 촉발한 글의 내용과 행간을 찬찬히 보면, 동조보다 진단에 더 가까운 면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언론기고의 경우 내용 및 행간뿐만 아니라 글이 게재되는 매체, 글이 소비될것으로 기대되는 방식, 글이 주로 소구하는 대상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독해되어야 하고 글쓴이도 이를 고려해야 한다.


관련된 또 다른 요인은 스펙타클에 근거한 글쓰기다. 내가 임 작가의 글에 대해 예전부터 느낀 인상은, 국내 및 국제 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정치적 평가를 다소간에 비우는 대신에, 그 대신 거기서 연출되는 상징적 장면들 자체를 위주로 심미적(?)으로 접근해서 어떤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고자 하는 특유의 스타일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대신에 한발 물러나서 그 스펙타클 자체를 감상하며 관조하듯이 평하게 되고, 자연히 서로 다른 여러 독해가 생겨날 공간이 늘어나게된다.

문화적 코드에 집중해서 '스펙타클한 장면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정치, 시사 등에 관심이 있는 페이스북 유저들에게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상당히 익숙한 글쓰기 방식이고, 나도 종종 즐기는 편이다 (특히, 웅장한 대륙적 아우라를 자랑하는 장면들을 다룰 때에는 유독 더 그러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쓰인 글은 언론 지면에 바로 나가기에는 좀 적절하지가 않을 수 있다.

스펙타클에 대한 관조적 향유와 동조적 열광은 언론 지면에서 구별되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스펙타클의 힘이고 언론지면의 힘이다. 그래서 '미적'으로 쓰인 글이더라도 정치 고관심층들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독해하게 된다. 그 결과는 덧글창에서 드러난다.


동조가 아닌 진단일 뿐이라고 하면, 그 진단이 과연 적절한지도 물을 차례다.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 이번 글에서는 진단 자체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현장에서 노년층과 청년층의 세대간 화합이 발생하는 장면은 기독교 보수 세력의 역할을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는 그 얘기가 아예 없어서 의아했다. 현장에 갔을 때 정말로 기독교적 코드가 느껴지지 않았는지는 나야 알 수 없지만... 각종 매체 보도와 뉴미디어 중계를 보면, 기독교 기반의 집회참가자들이 2030도 탄핵반대로 돌아섰다면서, 청년들을 기특해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언급해 줘야 한다고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정서에 편승하여, 청년구독자 위주 채널인 배인규는 가급적 선남선녀들(아마 외모 얘기일 것이다)을 발언대에 올려보내야 해서 고생했다고 하기도 했다. 내가 거의 6-7년 전부터 강조하며 우려했던, 국가주의 기독보수와 안티페미 청년보수의 접합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셈이다 (링크, 2018.11.26).

그런 강박에도 불구하고, 집회 안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 화합과, 그 안에서 청년을 챙겨 주어야 한다는 분위기 자체는 상당부분 '진짜'로 인간적인 화합일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화합이 꼭 정치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갈등과 불화를 금기시하고 인간미있는 연대의 힘으로 눙치며 외부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일을 화합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화합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반대하겠다. 상대방이 일으키는 불화에 대해서는 뿔달린 도깨비 취급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사회에 더한 불화를 일으키고 있지 않나. 증오와 음모론에 근거한 화합은 동료시민을 적대시하게 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면 나도 산업화 세대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세대화합 및 전통적 가족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뿔달린 좌파가 되나?

지금 국면에서 내가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계엄 사태의 중대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제대로 선긋기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게, 순순히 정권을 헌납하라는 뜻이 아니다. '탈윤'을 확실히 하고 철저하게 절치부심만 한다면 보수가 재집권해도 원칙적으로 아무 상관 없다 (계엄 사태에 대해 확실히 선긋기를 해준다는 전제 하에, 어디까지나 계엄에 대한 책임 여부에 한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당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계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많이들 이야기는 하는데, 그게 정말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한 인식과 표현, 불법적으로 행사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경계심이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면서 계엄 할 만 했다는 식의 얘기가 계속 섞여들어가고 있다. 여당 주요 정치인들의 행보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중진의원들도 계속 대통령 접견을 하고, 당협위원장들은 단체로 가서 구치소 앞에서 아예 공개적으로 설 세배 인사까지 했다. 대통령 측이 자기가 다 안고 가겠다는 식으로 하지 않고 계엄을 옹호하는 세력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여당의 이러한 행보 하나하나가 그러한 극렬 지지층에게 힘을 실어준다는걸 어떻게 모른 체 할 수가 있겠나.

언론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 조선일보는 계엄사태에 대해 선긋기를 철저하게 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를 강조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보도들을 쏟아내면서 사법 불신을 과도하게 조장하고있다. 지금은 아직 조기대선 국면이 아니고 파면이 되냐 마냐의 국면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라면 정치적인 주제, 그중에서도 탄핵반대 집회를 주제로 하는 글은 이 시점에서는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서로 의견이 다를지라도 공통점을 넓혀나가는 대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는 군을 불법적으로 동원한 계엄사태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비판적인 인식을 유지한 채로, '계몽령' 따위의 언설에 대해서는 확실히 선긋기가 이뤄진 판 안에서 이뤄져야한다. 많은 우파 스피커들이 명시적으로는 계엄에 확고히 반대한다고 얘기하며 아마 실제 생각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부수적, 지엽적 논거들이 계엄 옹호와 탄핵반대 움직임에 실질적으로 연료를 공급해주고 있는 점도 보아야 한다.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공수처의 입법결함 지적, 야당의 패악질이 계엄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 등의 모든 부수적인 것들은 탄핵 인용 이후의 얘기다. 여기서 이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일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윤석열이라는 개인의 아주 복잡하고 특이한 성정에 남들보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추적해 온 입장에서,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이번 사태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면 역시 있다. 다양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고 요리 해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권위적인 보스 행세를 하며 아랫사람들에게 조인트를 그렇게 심하게 깔수 있는가. 이는 의대증원, 수능킬러문제, R&D삭감, 홍범도 흉상 등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윤석열 정부 특유의 뜬금없고 자폭적인 졸속정책추진의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링크, 2023.08.30). 또한 노무현을 좋아하고 김기춘이 부끄럽다는 사람이 어떻게 야당이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극우인사들을 기관장에 임명해서 대립을 격화하고 기관을 망쳐놓는 행위를 반복할수가 있는가.

윤석열은 자신의 직을 걸면서까지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다소 무리해서라도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관철하는,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특유의 방식으로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이를 통해 인지도를 쌓았다 (링크, 2021.03.05). 이러한 태도가 대부분은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에게 한번씩은) 원칙주의적 면모로 드러났지만, 때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절제되지 않은 행보로 나타났으며, 비상계엄 사태에서는 후자의 면모가 정점을 찍었다. 책임있는 민주정치를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는 이러한 도박적 태도가 얼마나 안맞았는가.

이번 비상계엄 사태는 거시적인 정치 여건 그 자체보다도 대통령 개인의 아주 이례적인 성정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일어난 사건으로, 국민들이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윤석열의 인간적 면모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역시, 그가 12월 3일에 저지른 비상계엄사태,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도 극우개신교에 소구하며 헌정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것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물은 이후의 얘기다. 여기서도 이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일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10년 안에 한국이 기독교극우 국가가 될 위험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세속의 논리와 별개로 돌아가는 신념체계를 신봉하면서도 그 논리가 세속에 관철되기를 바라는 소수의 음모론자들을 굳이 언급해서 키워줄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겠지만, 나는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본다. 2020년경 황교안대표 체제의 미래통합당 시기를 거치면서 보수정당 적극 지지층의 질이 너무 안좋아졌다. 극우목사 유튜브들의 수익모델이 확립되면서 세력이 커졌고, 급기야는 엄청난 발화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그의 변호인단이 그런 음모론적 생각들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아 반헌법적 계엄사태를 일으켜 버렸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까지 재생산하면서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면에 이를 견제해야 할 사람들은 거대야당의 지리멸렬한 일극체제 하에서 대체로 무기력하거나 분열되어있고, 이를 타겟한 양비론의 힘도 너무 크다.

요즘 보면 어이없게도 제일 끈끈한 공동체가 바로 극우교회다. 마음을 기댈 공동체가 없는 사람들이 갈수록 분열하는 것과 대조된다. 보수교회에 위임된 복지 및 커뮤니티기능을 재정확장을 통해 국가와 지자체가 회수해서 집행해야한다. 그리고 극우목사는 처벌하고 돈줄을 끊어야한다. 퍼블릭한 성격을 갖는 공동체를 복원해서 극단주의에 대응할 역량을 키워야한다.

단지 일부 소외된 노년층만의 일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들의 지분이 크다). 위에서 말했듯이 대통령 및 변호인단과 보수교회가 논거를 공유하며 서로 지지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형 보수교회들은 심지어 미인가 대안학교까지 다수 운영하면서 성전을 치를 전사들을 양성하고 후속세대를 재생산하고있다. 이걸 쉬쉬하고 무시할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하고 적극적으로 경계해야한다. 이쪽에서 나오는 발언들이 언뜻 볼때 종교적 색채가 지워진 채로 유통되더라도, 그 생산기제 및 행간으로부터 종교적 동기를 읽어내어서 적확하게 추적, 비판할줄 아는 적극적 세속주의자들의 실천과 표명이 필요하다.

보수기독교인들은 대한민국 헌법이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제정되었으며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을 자신들끼리 공공연하게 얘기한다 (윤석열 대통령 “성경이 헌법 근간” 주장에 법학자들 “반헌법적 발언” (법보신문 김민아 기자)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044). 이런 날조된 역사가 미래세대의 정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으며, 그게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더 널리 알려져야한다.

2030 청년이 기특하다는 말은 많은데 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청년에서는 중국에 선동당한 청년, 탄핵에 반대하는 청년, 계엄을 통한 윤대통령의 뜻을 깨닫지 못한 청년들 등이 배제되어있다. 이런 종류의 기특함에 의거한 화합은 공동체를 복원하고 세상을 구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이걸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 걱정이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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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일 일요일

초가속하는 세상을 구할 방법은 다정한 생활감각의 실천뿐인가

기술과 자본과 밈컬쳐는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며 주체할 수 없는 규모로 질주하고, 국제사회의 원칙과 질서라고 믿었던 것들이 그 최심부가 해킹되면서 너무나 쉽고 빠르게 형해화되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건짓는 기후와 생태의 비가역적 파괴가 촉진되고있는 2025년의 세상을 일일이 파악하고 이해하려 든다면 제정신을 차리고 살기가 오히려 더 어렵지 않을까.

말하자면 수 세기 동안 쌓아온 코드들이 매 해마다 더 누적된다는 감각보다는, 오히려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감각이 훨씬 많이 느껴지는, 구토감이 들 정도로 가속되는 세상이다. 어떤 건 어이없을 만큼 빠르고 쉽지만 어떤 건 지칠 만큼 느리고 어려운데, 앞의 것이 초가속하면서 뒤의 것을 압도하고 은폐하는 느낌도 있다. 기존의 약속들이 희화화되면서 그 자리에는 굉장히 가상적이고 희극적인 약속들을 끌어모아서 쌓아올렸지만, 그 무엇보다도 실물과 밀접하고 중대하게 결부되어있는 강력한 벽과 같은 약속들이 파괴적으로 귀환하고있다. 그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

이러한 형국을 보고 있자니 피부에 와닿는 일상에서의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하루하루의 치열함과 다정함을 챙기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지엄한 가치와 약속들이 쉽게 쓸려나갈 수 있다는 게 목격되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보편적이고 소중한 건 오히려 개인 차원에서 어느정도 통제하고 추구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몸과 마음으로 내 자신과 주변의 치열함과 다정함을 유지하려는 책임감뿐인 것 같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에서 가치를 찾게 된다. 그런 생활감각과 따분한 힘들이 모여 결국 세상의 변화를 집합적으로 process해 내고 대응도 하면서 세상의 sanity를 작게라도 유지해나갈 수 있다면 그게 나름대로 세상을 구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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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반드시 단순하지도, 반드시 입체적이지도 않다

'진실은 간단하고 거짓은 복잡하다'는 식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아마도 무언가를 주장할 때 '말이 길어질' 경우, 옹호할 수 없는 걸 옹호하느라 변명이 길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서 나오는 말인 것 같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잘 보면 이와는 정반대로 진실이 복잡다단하고 거짓이 매끄러운 경우도 무척 많은 것 같다. 그냥 경우마다 다르다고 봐야 한다.

꿀떡꿀떡 넘어가는, 모든 걸 설명해주는 '매끄러운' 세계관을 접하게 되면, 이렇게 매끄럽고 간명한데 이게 진실이 아닐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예컨대 요즘 인터넷에 유통되는 유사 젠더·사회·진화 이론(?)들이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방식을 보면 그런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러나 간명하고 단순하다고 해서, 복잡해보이는 걸 쉽게 꿰뚫는다고 해서 그게 꼭 옳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념과 다른 것, 복잡한 것, 불편한 것에만 매료되는 습관도 좋지 않다. 어떤 정설과 통념이 자리잡아 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게 마련이고, 복잡하고 불편한 진실을 결코 모르지 않고 오히려 이미 다 검토했음에도 그 검토의 결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왜 사람들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까 하고 잘못된 의문을 가지면 퇴행적인 담론을 추종하게 된다.

결국은 몇몇 격언이나 사례에 경도되어서 진실은 반드시 간명하다, 혹은 반대로 진실은 무조건 불편하고 복잡하다 라는 자의적인 경험칙(?)을 만들지 말고, 각 사안별로 판단을 올바르게 해야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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