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묵 작가와는 학부를 다닌 시기가 거의 겹치고, 스터디도 한두 차례 같이 하기는 했었다. 이미 20대의 나이에 책도 수 권 쓰고 여러 지면에 기고도 하며 이름을 알려서 내가 상당히 부러워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지만, 아마 그 분은 내 존재 정도만 아실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고된 탄핵 반대 집회 체험기(링크)는 평소보다 큰 논쟁을 촉발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한 마디씩 이야기를 얹을 수 있게 여러 가지 사유의 결을 풍부하게 깔아 놓았다는 점에서 그 글은 무척 성공적이다. 그러나 현상에 동조하는 게 아니라 진단할 뿐이라는, 우호적 독해에 근거한 팬들의 옹호가 어쨌거나 필요해졌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글이다. 글의 의도를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독해가 대립하는 셈인데,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났는가? 한 가지 이유는 언론 기고문이라는 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논쟁을 촉발한 글의 내용과 행간을 찬찬히 보면, 동조보다 진단에 더 가까운 면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언론기고의 경우 내용 및 행간뿐만 아니라 글이 게재되는 매체, 글이 소비될것으로 기대되는 방식, 글이 주로 소구하는 대상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독해되어야 하고 글쓴이도 이를 고려해야 한다.
관련된 또 다른 요인은 스펙타클에 근거한 글쓰기다. 내가 임 작가의 글에 대해 예전부터 느낀 인상은, 국내 및 국제 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정치적 평가를 다소간에 비우는 대신에, 그 대신 거기서 연출되는 상징적 장면들 자체를 위주로 심미적(?)으로 접근해서 어떤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고자 하는 특유의 스타일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대신에 한발 물러나서 그 스펙타클 자체를 감상하며 관조하듯이 평하게 되고, 자연히 서로 다른 여러 독해가 생겨날 공간이 늘어나게된다.
문화적 코드에 집중해서 '스펙타클한 장면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정치, 시사 등에 관심이 있는 페이스북 유저들에게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상당히 익숙한 글쓰기 방식이고, 나도 종종 즐기는 편이다 (특히, 웅장한 대륙적 아우라를 자랑하는 장면들을 다룰 때에는 유독 더 그러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쓰인 글은 언론 지면에 바로 나가기에는 좀 적절하지가 않을 수 있다.
스펙타클에 대한 관조적 향유와 동조적 열광은 언론 지면에서 구별되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스펙타클의 힘이고 언론지면의 힘이다. 그래서 '미적'으로 쓰인 글이더라도 정치 고관심층들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독해하게 된다. 그 결과는 덧글창에서 드러난다.
동조가 아닌 진단일 뿐이라고 하면, 그 진단이 과연 적절한지도 물을 차례다.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 이번 글에서는 진단 자체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현장에서 노년층과 청년층의 세대간 화합이 발생하는 장면은 기독교 보수 세력의 역할을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는 그 얘기가 아예 없어서 의아했다. 현장에 갔을 때 정말로 기독교적 코드가 느껴지지 않았는지는 나야 알 수 없지만... 각종 매체 보도와 뉴미디어 중계를 보면, 기독교 기반의 집회참가자들이 2030도 탄핵반대로 돌아섰다면서, 청년들을 기특해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언급해 줘야 한다고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정서에 편승하여, 청년구독자 위주 채널인 배인규는 가급적 선남선녀들(아마 외모 얘기일 것이다)을 발언대에 올려보내야 해서 고생했다고 하기도 했다. 내가 거의 6-7년 전부터 강조하며 우려했던, 국가주의 기독보수와 안티페미 청년보수의 접합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셈이다 (링크, 2018.11.26).
그런 강박에도 불구하고, 집회 안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 화합과, 그 안에서 청년을 챙겨 주어야 한다는 분위기 자체는 상당부분 '진짜'로 인간적인 화합일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화합이 꼭 정치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갈등과 불화를 금기시하고 인간미있는 연대의 힘으로 눙치며 외부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일을 화합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화합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반대하겠다. 상대방이 일으키는 불화에 대해서는 뿔달린 도깨비 취급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사회에 더한 불화를 일으키고 있지 않나. 증오와 음모론에 근거한 화합은 동료시민을 적대시하게 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면 나도 산업화 세대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세대화합 및 전통적 가족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뿔달린 좌파가 되나?
지금 국면에서 내가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계엄 사태의 중대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제대로 선긋기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게, 순순히 정권을 헌납하라는 뜻이 아니다. '탈윤'을 확실히 하고 철저하게 절치부심만 한다면 보수가 재집권해도 원칙적으로 아무 상관 없다 (계엄 사태에 대해 확실히 선긋기를 해준다는 전제 하에, 어디까지나 계엄에 대한 책임 여부에 한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당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계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많이들 이야기는 하는데, 그게 정말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한 인식과 표현, 불법적으로 행사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경계심이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면서 계엄 할 만 했다는 식의 얘기가 계속 섞여들어가고 있다. 여당 주요 정치인들의 행보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중진의원들도 계속 대통령 접견을 하고, 당협위원장들은 단체로 가서 구치소 앞에서 아예 공개적으로 설 세배 인사까지 했다. 대통령 측이 자기가 다 안고 가겠다는 식으로 하지 않고 계엄을 옹호하는 세력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여당의 이러한 행보 하나하나가 그러한 극렬 지지층에게 힘을 실어준다는걸 어떻게 모른 체 할 수가 있겠나.
언론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 조선일보는 계엄사태에 대해 선긋기를 철저하게 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를 강조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보도들을 쏟아내면서 사법 불신을 과도하게 조장하고있다. 지금은 아직 조기대선 국면이 아니고 파면이 되냐 마냐의 국면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라면 정치적인 주제, 그중에서도 탄핵반대 집회를 주제로 하는 글은 이 시점에서는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서로 의견이 다를지라도 공통점을 넓혀나가는 대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는 군을 불법적으로 동원한 계엄사태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비판적인 인식을 유지한 채로, '계몽령' 따위의 언설에 대해서는 확실히 선긋기가 이뤄진 판 안에서 이뤄져야한다. 많은 우파 스피커들이 명시적으로는 계엄에 확고히 반대한다고 얘기하며 아마 실제 생각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부수적, 지엽적 논거들이 계엄 옹호와 탄핵반대 움직임에 실질적으로 연료를 공급해주고 있는 점도 보아야 한다.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공수처의 입법결함 지적, 야당의 패악질이 계엄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 등의 모든 부수적인 것들은 탄핵 인용 이후의 얘기다. 여기서 이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일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윤석열이라는 개인의 아주 복잡하고 특이한 성정에 남들보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추적해 온 입장에서,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이번 사태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면 역시 있다. 다양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고 요리 해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권위적인 보스 행세를 하며 아랫사람들에게 조인트를 그렇게 심하게 깔수 있는가. 이는 의대증원, 수능킬러문제, R&D삭감, 홍범도 흉상 등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윤석열 정부 특유의 뜬금없고 자폭적인 졸속정책추진의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링크, 2023.08.30). 또한 노무현을 좋아하고 김기춘이 부끄럽다는 사람이 어떻게 야당이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극우인사들을 기관장에 임명해서 대립을 격화하고 기관을 망쳐놓는 행위를 반복할수가 있는가.
윤석열은 자신의 직을 걸면서까지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다소 무리해서라도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관철하는,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특유의 방식으로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이를 통해 인지도를 쌓았다 (링크, 2021.03.05). 이러한 태도가 대부분은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에게 한번씩은) 원칙주의적 면모로 드러났지만, 때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절제되지 않은 행보로 나타났으며, 비상계엄 사태에서는 후자의 면모가 정점을 찍었다. 책임있는 민주정치를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는 이러한 도박적 태도가 얼마나 안맞았는가.
이번 비상계엄 사태는 거시적인 정치 여건 그 자체보다도 대통령 개인의 아주 이례적인 성정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일어난 사건으로, 국민들이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윤석열의 인간적 면모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역시, 그가 12월 3일에 저지른 비상계엄사태,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도 극우개신교에 소구하며 헌정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것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물은 이후의 얘기다. 여기서도 이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일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10년 안에 한국이 기독교극우 국가가 될 위험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세속의 논리와 별개로 돌아가는 신념체계를 신봉하면서도 그 논리가 세속에 관철되기를 바라는 소수의 음모론자들을 굳이 언급해서 키워줄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겠지만, 나는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본다. 2020년경 황교안대표 체제의 미래통합당 시기를 거치면서 보수정당 적극 지지층의 질이 너무 안좋아졌다. 극우목사 유튜브들의 수익모델이 확립되면서 세력이 커졌고, 급기야는 엄청난 발화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그의 변호인단이 그런 음모론적 생각들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아 반헌법적 계엄사태를 일으켜 버렸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까지 재생산하면서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면에 이를 견제해야 할 사람들은 거대야당의 지리멸렬한 일극체제 하에서 대체로 무기력하거나 분열되어있고, 이를 타겟한 양비론의 힘도 너무 크다.
요즘 보면 어이없게도 제일 끈끈한 공동체가 바로 극우교회다. 마음을 기댈 공동체가 없는 사람들이 갈수록 분열하는 것과 대조된다. 보수교회에 위임된 복지 및 커뮤니티기능을 재정확장을 통해 국가와 지자체가 회수해서 집행해야한다. 그리고 극우목사는 처벌하고 돈줄을 끊어야한다. 퍼블릭한 성격을 갖는 공동체를 복원해서 극단주의에 대응할 역량을 키워야한다.
단지 일부 소외된 노년층만의 일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들의 지분이 크다). 위에서 말했듯이 대통령 및 변호인단과 보수교회가 논거를 공유하며 서로 지지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형 보수교회들은 심지어 미인가 대안학교까지 다수 운영하면서 성전을 치를 전사들을 양성하고 후속세대를 재생산하고있다. 이걸 쉬쉬하고 무시할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하고 적극적으로 경계해야한다. 이쪽에서 나오는 발언들이 언뜻 볼때 종교적 색채가 지워진 채로 유통되더라도, 그 생산기제 및 행간으로부터 종교적 동기를 읽어내어서 적확하게 추적, 비판할줄 아는 적극적 세속주의자들의 실천과 표명이 필요하다.
2030 청년이 기특하다는 말은 많은데 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청년에서는 중국에 선동당한 청년, 탄핵에 반대하는 청년, 계엄을 통한 윤대통령의 뜻을 깨닫지 못한 청년들 등이 배제되어있다. 이런 종류의 기특함에 의거한 화합은 공동체를 복원하고 세상을 구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이걸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 걱정이 너무나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