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자에 강남역 인근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살인사건은 그 사건성 자체와 함께 많은 사회적 논의를 동반하며 거대한 의미를 획득해 버렸다. 매우 큰 담론이기에 다소 조심스럽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표적이 되어 목숨을 잃은 여성을 추모하면서, 최근 며칠간 느낀 바를 간단히 적어 보려 한다. 읽어주시는 페북 친구 여러분들과 보충이든, 반론이든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이 사건이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인지,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인지에 대한 논쟁이 많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둘 중 어느 하나가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울신경정신과 서천석 원장이 언급했듯이, 정신질환에 따른 망상도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혐오의 피라미드’라고 알려진 도식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혐오(misogyny의 번역어)는 남성혐오와는 달리 단순한 혐오감정뿐만이 아닌 고용 등에 있어 차별적인 사회적 구조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객체화하는 문화적 풍조를 포함한다(그렇기에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점은 글 최하단에 언급할 것이며, 그 전까지는 우선 여성혐오라는 어휘를 사용하겠다). 이것은 왜냐하면 실제로 남성에게와는 달리 여성에게는 그런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뇌 속에 형성된 망상에는 그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사회의 모습들이 분명히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풍조가 아니었다면 가해자가 ‘하필 그런’ 망상에 휩싸여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를 살해하는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또한, 굳이 망상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현재 성희롱, 성폭행, 데이트폭력 등 왜곡된 성 관념에 의한 범죄 피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서 현저하게 높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남성혐오적 망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은 여성혐오의 경우에 비해 낮게 관측된다는 점도 고려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젠더적인 담론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한 것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정신질환에 의한 여성혐오적 망상을 가진 가해자가 원한관계가 없는 여성 피해자를 살해한 사건’이며,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정신보건의 실패>와 <여성혐오>의 두 축에서 종합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전자의 측면과 관련된 논의도 보다 활발해지면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소셜 미디어나 언론사 보도 등을 보면 현재의 논쟁은 이러한 종합적인 시각에 도달하려는 생산적인 논의보다는 이분법 구도에서의 싸움(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생산적일 수도 있다)으로 격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국민성이 미개하기 때문도 아니며, 남혐 사이트가 이 사건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이다’ 또는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이다’라는, 얼핏 보면 사실관계의 진술로만 보이는 말들 속에 사실은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무엇을 상대적으로 무시할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혼재되어 있고, 그것을 말하는 의도에 역시 그러한 가치판단이 함의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접적 원인으로는 사회적 공론장이 마비된 한국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자비의 원칙에 입각한 토론보다는 서로 증오하면서 비난을 일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있다.
이에 대해 모두 논의하자면 지나치게 길어지고 논점도 벗어나므로 이 글에서는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젠더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해야 할 부분은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이다’라는 주장은 사실 ‘여성혐오가 아닌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이다’라는 뉘앙스를 갖고, 젠더 문제가 이야기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주체에 의해 발화되는 가치판단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화가 존재하는 한, 남녀끼리 갈등을 하지 말고 연대하자는 말은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앞서 이야기한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사건 이외에도 남성과 여성에게서 비대칭적으로 발생하는 범죄는 아주 많다. 성희롱, 성폭력, 데이트 폭력 등은 물론이고, 강도와 같은 젠더와는 직접적으로 무관한 강력범죄도 평균적인 완력의 차이 등을 이유로 여성을 표적으로 자행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남성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범죄 위협은 이성 이전의 문제이다.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 대우받을 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일상 속에서 대부분의 여성이 대부분의 남성에 비해 일상에서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위협을 많이 느끼면서 살아가는 기막힌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일각에서 터져 나오는 기계적 중립에의 요구, 일반화하지 말라는 요구는 실제로는 그들이 거부감을 갖는 소위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큰 폭력이 되며, 자칫 평화주의적인 요구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기만이 된다. 마치 군사독재가 종식된 이후 보수 언론에서 ‘과거는 잊고 희망찬 미래로 함께 나아가자’는 기사를 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사건 자체와 함께 사건에 대한 반응 역시 충격적이었다. 네이버 댓글 등지에서는 '솔직히 늦게까지 논 여성도 잘못은 있는 것 아니냐'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었다. 이런 정도의 전근대적 발상이 실재하며,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성혐오라는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앞서 말한 극단적인 주장들을 보고 잘 성찰해 본다면 여성혐오가 분명히 실제로 공고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혐 아닌 대부분의 남자한테까지 일반화하지 말라'는 자칫 평화주의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반응도 있다. 그런데 말 그대로 ‘김치녀’와 같은 여성혐오부터 여성의 객체화와 성적 대상화, 호의적 성차별 등은 일부 남성만의 문제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우 만연해 있는 왜곡된 성 관념이며, 심지어 미디어와 문화권력에 의해 조장되고 있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 속에서 남성들에게는 그저 '여혐에 동참하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니라, 성 평등 의식과 공감 능력, 소위 ‘젠더감수성’을 기르고, 여성혐오를 목격할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지적하면서 고쳐나갈 수 있도록 하여, 성 평등 사회를 이루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젠더문제는 여성들의 삶에 매우 밀접한 문제이다. 또한 여성혐오는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풍조의 문제와 함께, 그 영향을 받은 각 개인 심리의 문제로 다층적인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젠더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들의 일상을 투쟁화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많이 부족하지만 기꺼이 동참하고자 한다.
나는 대학 생활 중에 학과 내에서의 동료 여학우들에 대한 성적 대상화, ‘개념녀네’와 같은 호의적 성차별을 비판하는 데 전투적으로 임해 왔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되, 이번 사건으로 촉발된 사회적 논쟁을 통해 여성혐오적 풍조가 일반에 생각보다 훨씬 더 만연하다는 것을 알게 된 만큼 문제의식을 더 확장해 보고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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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여성혐오’라는 어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어휘는 misogyny의 번역어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어휘는 대단히 강력하고 포괄적이다. 젠더문제는 일상에서의 성차별적 언행 하나부터 넓은 평등하지 못한 사회 구조, 그리고 성폭력이나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그런데 글 초반부에 언급하였듯이 이 모든 것이 '여성혐오적' 이라고 불리어진다. 현재 여성혐오라고 묶여서 일컬어지는 이러한 사회적 징후에는 사회구조적 측면과, (결국은 사회풍조의 영향을 받아 구성되었을) 개인의 심리적 측면이 있을 것이고, 왜곡된 인식, 차별적 대우, 성적대상화 등 다양한 면모가 있는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그것들을 잘 대표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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