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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4일 화요일

강남역 살인사건

  5월 17일자에 강남역 인근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살인사건은 그 사건성 자체와 함께 많은 사회적 논의를 동반하며 거대한 의미를 획득해 버렸다. 매우 큰 담론이기에 다소 조심스럽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표적이 되어 목숨을 잃은 여성을 추모하면서, 최근 며칠간 느낀 바를 간단히 적어 보려 한다. 읽어주시는 페북 친구 여러분들과 보충이든, 반론이든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이 사건이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인지,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인지에 대한 논쟁이 많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둘 중 어느 하나가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울신경정신과 서천석 원장이 언급했듯이, 정신질환에 따른 망상도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혐오의 피라미드’라고 알려진 도식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혐오(misogyny의 번역어)는 남성혐오와는 달리 단순한 혐오감정뿐만이 아닌 고용 등에 있어 차별적인 사회적 구조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객체화하는 문화적 풍조를 포함한다(그렇기에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점은 글 최하단에 언급할 것이며, 그 전까지는 우선 여성혐오라는 어휘를 사용하겠다). 이것은 왜냐하면 실제로 남성에게와는 달리 여성에게는 그런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뇌 속에 형성된 망상에는 그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사회의 모습들이 분명히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풍조가 아니었다면 가해자가 ‘하필 그런’ 망상에 휩싸여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를 살해하는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또한, 굳이 망상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현재 성희롱, 성폭행, 데이트폭력 등 왜곡된 성 관념에 의한 범죄 피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서 현저하게 높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남성혐오적 망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은 여성혐오의 경우에 비해 낮게 관측된다는 점도 고려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젠더적인 담론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한 것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정신질환에 의한 여성혐오적 망상을 가진 가해자가 원한관계가 없는 여성 피해자를 살해한 사건’이며,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정신보건의 실패>와 <여성혐오>의 두 축에서 종합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전자의 측면과 관련된 논의도 보다 활발해지면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소셜 미디어나 언론사 보도 등을 보면 현재의 논쟁은 이러한 종합적인 시각에 도달하려는 생산적인 논의보다는 이분법 구도에서의 싸움(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생산적일 수도 있다)으로 격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국민성이 미개하기 때문도 아니며, 남혐 사이트가 이 사건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이다’ 또는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이다’라는, 얼핏 보면 사실관계의 진술로만 보이는 말들 속에 사실은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무엇을 상대적으로 무시할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혼재되어 있고, 그것을 말하는 의도에 역시 그러한 가치판단이 함의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접적 원인으로는 사회적 공론장이 마비된 한국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자비의 원칙에 입각한 토론보다는 서로 증오하면서 비난을 일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있다.

  이에 대해 모두 논의하자면 지나치게 길어지고 논점도 벗어나므로 이 글에서는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젠더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해야 할 부분은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이다’라는 주장은 사실 ‘여성혐오가 아닌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이다’라는 뉘앙스를 갖고, 젠더 문제가 이야기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주체에 의해 발화되는 가치판단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화가 존재하는 한, 남녀끼리 갈등을 하지 말고 연대하자는 말은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앞서 이야기한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사건 이외에도 남성과 여성에게서 비대칭적으로 발생하는 범죄는 아주 많다. 성희롱, 성폭력, 데이트 폭력 등은 물론이고, 강도와 같은 젠더와는 직접적으로 무관한 강력범죄도 평균적인 완력의 차이 등을 이유로 여성을 표적으로 자행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남성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범죄 위협은 이성 이전의 문제이다.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 대우받을 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일상 속에서 대부분의 여성이 대부분의 남성에 비해 일상에서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위협을 많이 느끼면서 살아가는 기막힌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일각에서 터져 나오는 기계적 중립에의 요구, 일반화하지 말라는 요구는 실제로는 그들이 거부감을 갖는 소위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큰 폭력이 되며, 자칫 평화주의적인 요구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기만이 된다. 마치 군사독재가 종식된 이후 보수 언론에서 ‘과거는 잊고 희망찬 미래로 함께 나아가자’는 기사를 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사건 자체와 함께 사건에 대한 반응 역시 충격적이었다. 네이버 댓글 등지에서는 '솔직히 늦게까지 논 여성도 잘못은 있는 것 아니냐'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었다. 이런 정도의 전근대적 발상이 실재하며,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성혐오라는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앞서 말한 극단적인 주장들을 보고 잘 성찰해 본다면 여성혐오가 분명히 실제로 공고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혐 아닌 대부분의 남자한테까지 일반화하지 말라'는 자칫 평화주의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반응도 있다. 그런데 말 그대로 ‘김치녀’와 같은 여성혐오부터 여성의 객체화와 성적 대상화, 호의적 성차별 등은 일부 남성만의 문제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우 만연해 있는 왜곡된 성 관념이며, 심지어 미디어와 문화권력에 의해 조장되고 있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 속에서 남성들에게는 그저 '여혐에 동참하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니라, 성 평등 의식과 공감 능력, 소위 ‘젠더감수성’을 기르고, 여성혐오를 목격할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지적하면서 고쳐나갈 수 있도록 하여, 성 평등 사회를 이루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젠더문제는 여성들의 삶에 매우 밀접한 문제이다. 또한 여성혐오는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풍조의 문제와 함께, 그 영향을 받은 각 개인 심리의 문제로 다층적인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젠더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들의 일상을 투쟁화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많이 부족하지만 기꺼이 동참하고자 한다.

  나는 대학 생활 중에 학과 내에서의 동료 여학우들에 대한 성적 대상화, ‘개념녀네’와 같은 호의적 성차별을 비판하는 데 전투적으로 임해 왔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되, 이번 사건으로 촉발된 사회적 논쟁을 통해 여성혐오적 풍조가 일반에 생각보다 훨씬 더 만연하다는 것을 알게 된 만큼 문제의식을 더 확장해 보고자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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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여성혐오’라는 어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어휘는 misogyny의 번역어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어휘는 대단히 강력하고 포괄적이다. 젠더문제는 일상에서의 성차별적 언행 하나부터 넓은 평등하지 못한 사회 구조, 그리고 성폭력이나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그런데 글 초반부에 언급하였듯이 이 모든 것이 '여성혐오적' 이라고 불리어진다. 현재 여성혐오라고 묶여서 일컬어지는 이러한 사회적 징후에는 사회구조적 측면과, (결국은 사회풍조의 영향을 받아 구성되었을) 개인의 심리적 측면이 있을 것이고, 왜곡된 인식, 차별적 대우, 성적대상화 등 다양한 면모가 있는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그것들을 잘 대표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특히 자기 딴에는 ‘여성이 싫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사실은 차별적 인식을 담고 있는 소위 '호의적 성차별'이 매우 심각하다고 보는 입장에서('개념녀네', '여자답다' 등등),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저런 현상들의 총체에 대한 대표성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엥, 난 여혐 안 하는데?’ 라며 제대로 사유해 볼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젠더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 왔던 사람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데에는 보다 직관적인 어휘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페이스북 상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떤 분에 따르면 ‘여성혐오’와 ‘이분법적 성 고정관념’이 교집합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몇몇 어휘들을 함께 제시하여 misogyny라는 현상의 총체에 도달하도록 보완할 순 있겠지만, 한 단어로 된 대체제가 생각이 나지 않는 관계로 본 글에서는 일단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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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9일 목요일

5월 18일을 맞으며: 헌정 민주주의를 사유하기

  군사정권에서 투입한 계엄군에 의해 통신과 교통이 차단당한 채로 광주시민들이 학살당했던 일, 실존을 위협하는 시스템의 폭력 아래서 총까지 들어 가며 시민군으로서 계엄군과 대적을 하게 되었던 비극, 불과 36년 전 오늘, 1980년 5월 18일부터 수 주에 걸쳐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실상은 꽤나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다거나, 순수하지 않은 목적의 폭동이었다는 주장이 아직까지도 자주 보인다. 언론인들은 용기가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라. 나는 그들이 후대에라도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

  이후에도 제5공화국 내내 많은 민주진영 인사들과 대학생들이 탄압당했고, 고문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대학생과 직장인 등 다수의 국민들이 참여한 1987년 6월 항쟁 이후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약속되었다.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퇴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정경유착을 하며 정권에 돈을 주었던 기업들은 서서히 발을 뺐고, 책임자들은 청문회에서 불성실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군사정권의 잔재 청산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고, 어쨌든 세상의 우려와 달리 88 올림픽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30년쯤 시간이 흘렀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와 생명을 탄압했던 군사정권 수뇌부의 정점에 있던 전두환은 2016년, 예우를 해 준다면 광주를 찾아갈 수 있다며, 생생히 살아 있는 광주시민들의 기억을 기만한다. 군사 독재는 끝났지만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에는 군사 독재를 주도하거나 찬동한 인사들도 포함되었고, 이들은 지금까지도 정치계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회는 해체되었지만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여전히 퇴역장성 단체에 소속되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등 정치의 배후에서 개입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5월 18일 새벽, 짧게나마 알고 있는 역사를 되짚어 보며, 2013년 이래로 외우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곱씹어 보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과연 자연스레 주어진 안정적인 것인가, 혹은 섬세하고 예민하게 쌓아올려진 것인가? 과연 그것은 영속적인 것이고 신뢰할 만한 것인가? 과연 우리의 민주적 기본질서가 위협받을 때, 우리 옆의 사람들이 실존을 위협당할 때, 우리는 다시금 문제를 인식하고, 용기내어 문제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헌법에 명시된 우리의 자유와 권리, 책임과 의무에 대해 어떻게,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그것들은 잘 지켜지고 있는가? 그것들이 위협받는 것을 목도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헌정 민주주의의 원리에 기반한 시민들의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 노력과 투쟁, 토론과 합의가 필요하다. 소중한 헌법적 가치, 민주주의적 가치의 존속과 발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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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8일 수요일

전문연구요원 폐지 폭탄선언에 대해

  전문연구요원 폐지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어제 뉴스 링크([단독] "이공계 병역특례 2023년까지 폐지")를 공유하면서 썼던 글에 더하여 몇 가지 쟁점에 대해 보다 자세히 짚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낀다.

  이번 발표에서 첫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유예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것이다.이미 전문연을 염두에 두고 학부생활 도중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이공계열 선배들이 상당히 많을 텐데, 이렇게 될 경우 학부를 졸업하고 입대하거나 대학원 과정을 중단하고 입대하는 등 사회인으로서의, 이공학도로서의 커리어에 문제를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교육과정이랑 군대정책은 최소 10년은 유예기간을 두어야 한다. 시행 중인 제도의 폐지에 이런 식으로 유예기간을 안 둠으로서, 그 제도를 상정하고 계획을 세워 놓은 수많은 이공학도들의 인생계획을 꼬이게 만드는 것은 배려가 없는 걸 넘어 폭력적인 처사이다.

  또한 연구 지망 이공학도들의 개인적 불편함 외에 국가적, 사회적 측면에서도 전문연을 폐지할 경우 국내 이공계 학문 연구에 차질이 발생하고 우수 연구인력이 대량으로 해외 유출되어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이 하락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결과이다. 국내와 해외의 과학기술자 대우 및 연구환경의 차이와 함께, 이런 식으로 연구인력을 기만하는 정부의 태도로 인해 많은 이공학도들이 실망하며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가 병사 수천 명 더 확보하려고 전문연을 폐지함으로써 국내 이공계 전체가 타격을 입는 것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조치인 것이다. 과학기술을 중시한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이러한 조치를 철회하는 것이 합당하다.

  2020년까지 달 탐사를 하겠다고 하는데(유인탐사 얘기는 아니겠지만), 미국이 달에 사람 보내는 데 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약 200조 원이었다. 한국형 알파고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알파고의 개발 배경에는 구글이라는 거대 IT 기업이 전세계의 좋은 스타트업들을 거액에 인수 합병하면서 연구 개발해 온 수많은 기술들이 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화려하게 선언 하고 테이프 끊는 것으로는 어떤 혁신도 기대할 수 없다. 과학기술 연구 환경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국내 대학원생 대우가 열악한 편인데 이런 문제까지 더해지면 많은 학도들과 지망생들이 실망하고, 국내 이공계 연구원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로 넘어가 보자면, 전문연구요원과 관련해서 문제제기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부분은 타 특수병과 및 현역 일반병과의 형평성에 대한 것일 것이다. 이공계 연구인력만 소중하고 다른 직종 희망자는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대략 두 가지 측면에서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흔히 전문직이라고 이야기되는 의사, 법조인, 연구원 중에서 앞의 두 직종은 군의관, 군법무관이라는 잘 정착된 특수병과를 통해 병역문제를 해결해 왔으나, 연구원의 경우 전문연이라는 고학력 이공계에 제한된 좁은 문을 통해 보충역으로 병역문제를 해결해 왔고, 결국 그마저도 없어지면서 본인의 전문성을 살려 병역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게 되어 버렸다. 이는 전문직 종사자 개인 입장에서도 차별적인 대우가 될 수 있을 뿐더러, 군대 입장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한 기계화, 현대화된 선진강군 건설이라는 최근의 추세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조치가 될 수 있다.

  현역 일반병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연 제도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상황에서 현역 일반병과의 형평성 문제가 전문연 폐지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현역 일반병에 대해서도 군기강과 상관없는 폭력을 최대한 막고, 밥이랑 월급 수준 개선하고, 장비 제대로 지급하고, 외출을 자주 가능하게 하고, 자기계발 시간을 어느정도 이상 확보하도록 하여, 전문연뿐만이 아닌 전체적인 병역수행의 환경을 상향평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군대라는 조직 자체의 특수성으로 인해 전문연과 같은 수준의 자유화는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겠지만, 앞서 나열한 것들 정도는 현역일반병에게도 못 해 줄 이유가 전혀 없는 조처들이다. 혜택이 아닌 당연한 권리들이다.

  대한민국 징병제 하의 군인들의 복무환경과 그 대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나쁜 수준이고, 한국이라는 국가의 전반적인 사회 수준에 비추어 보면 아연실색할 정도이다. 전문 연구인력에 대한 특별대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일반병사의 복무환경 자체도 정상적인 수준으로 확 끌어올려질 필요성이 있다.

  안그래도 시민사회와 유리된 한국 군대의 폐쇄성과 전근대성이 조만간 매우 큰 사회 문제가 될 것이며, 우리가 군대에 대해 문제를 문제라고 똑바로 인식하고 목소리를 더 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번 전문연 폐지 조처를 통해 군대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목소리도 나오고 하면서 전반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 전문연구요원 폐지 조치에 대해 전면 재검토 착수하고,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면밀히 조사하여 수정 조치하여야 한다.
- 임금 개선, 식사 개선, 자기계발 시간 및 휴가 확보 등, 수십 년간 방치되어 오다시피 한 군인들의 복무 환경 정상화 문제를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설정하고 대대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 사회구성원 개인들의 삶의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주는 교육, 입시, 군대 등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최소 10년의 유예기간을 두도록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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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7일 토요일

대담

A: 감동적인 영화 한 편 본 것 같은 2분이야.

[미야자키 하야오 다큐멘터리 중, 그의 은퇴 기자회견 직전의 2분 정도를 담은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평생 아름다운 상상력을 간직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살아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이 집약된 2분이다.
(https://youtu.be/oJhTQvyG0CI?t=1h51m49s)]

B: 헛웃음만 나와....... 나, IT 서비스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살았잖아? 근데 역량 있는 핵심 엔지니어를 찾지 못해서 넉 다운 당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봤어.

A: 어떤 생각을?

B: 솔직히 아날로그와 미학적 아우라를 중요시하는 나 같은 인간이 왜 IT 서비스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려고 하는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것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이 확실한 내가 또 IT 서비스를 만들려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문자답해보니 지금, 16년 중순, 이 순간에 당당한 답을 할 수가 없더라. 왜 만들려고 했을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원해서야. 근데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절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나은 세상이란 건 말이야. 결국 나의 주관적 판단이 그려낸 이상이고, 내가 완벽하다고 믿는 시스템은 그 자체로 모순을 지니게 되는 거지. 그리고 고민을 했어. 그럼 난 무엇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B: 나는 이 세계가 싫었어. 그래서 이 세계를 바꾸고 싶었지. 허나 그 것은 나의 아집, 바꾼다고 해도 나는 바꿈과 동시에 스테레오타입이 되는 거야.

A: 프로젝트란 그렇지. 시스템의 밖에서 지적을 하는 역할에서 출발하나, 또 다른 시스템이 되어서 맹목화된다면 또 다시 문제가 생기겠지. 그러니 B씨는, 그리고 인류는 끊임없이 반성적 사고를 해야 되는 겁니다. 라는 거지.

B: 정확히 이해했어.

B: 근데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르더라. 언젠가 내 조카가 디즈니랜드에 가서 줄을 서는 걸 보는데, 조카는 그 긴 줄을 서면서도 웃으면서 삼촌한테 온갖 장난을 치면서 웃는 얼굴로 기다리더라.

A: 어린아이에겐 모든 것이 놀이.......

B: 나는 오늘 어머니랑 수목원에 갔다 오는데 사람 많고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거든. 근데 얘는 왜 이럴까를 생각해보니 디즈니랜드는 이 아이들에게 있어 다른 세계의 신나고 재미있는 친구들이야. 이상 속의. 내가 어머니랑 수목원 가는 것과는 다르지. 얼마를 기다리든 디즈니랜드에 있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니까. 그래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A: 그렇지. 또 다른 세계. 어린 아이들이 상상 속의 친구, 상상 속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겠지.

B: 응 맞아.

A: 워워, 근데 너무 큰 기획이야 그건.

B: 근데 이것저것 현실세계를 녹여내서 analogy 범벅을 만드는 건 그냥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돌려서 하는 거고, 나는 그냥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졌어. 즐거운 이야기. 신화 같은 이야기. 진짜 새로운 세계. 현실에 결부시키지 않은 이야기. 어중간하게 아이들의 세계에 어른들 이야기 넣지 않고. 그냥 정말.......

A: 신화라는 단어를 꺼낸 게 나와 같은 맥락인지 모르겠는데, 나도 그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B: 응. 더 말이 필요 없겠다. 그거야. 난 이제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지브리라던가 디즈니라던가.

A: 새로운 세계의 창조 그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건데. 인간성을 최대한 발현시키셔야 하겠군요.

B: 응, 이제는 진짜 그냥 내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바치고 싶어. 결국 미래는 아이들이니까. 그렇게 살려고. 이게 나 나름대로의, 2016년의 답이야.

A: 단편적이고 짧은 생각일 뿐이었지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나는 세속주의자이자 인본주의자로서, 신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야말로 인간 고유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거든. 그래서 환상의 세계를 좋아해. 물론 기술복제 시대가 도래하고 매스미디어가 처음 나올 때 많은 이들이 비판했듯이, 그런 것들이 실제 세상에 어중간하게 적용되어서 혼란을 낳을 수 있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결국 인간성을 제대로 발휘한다면 그런 혼란도 극복하고 진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B: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이 세계를 A라고 하자. 근데 나나 너나 B라는 세계에서 어느 정도 위안, 즐거움을 얻으면서 살아가. 이 B는 음악, 만화 등의 현실과는 다른 세계야.

B: 우린 어쨌든 A에서 살아가. 그건 현실이야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이렇게 새벽에 친구와 대화하면서, 따로 파티션을 나누어 얘기할 또 다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완전히 새로운 공간. 물리적인 공간은 아니야. 내용적으로도 A와 일치하지 않아. 하여튼 이렇게 A에서 살면서 B적인 이야기를 해나가며 행복하게, 아니, 행복하지 않을지라도,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런 것이 필요해. 작아져버린 인간으로서 숨 쉴 공간이 필요해.

A: 그런 게 필요하다. 도구적인 필요라기보다는, 이유는 없지만 우리는 그런 시간을 가지고 싶다.

A: 그리고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B: 왠지 서글플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

A : 우리 인간들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거의 같은 유전자를 갖고, 지구라는 거의 같은 곳에서 살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뇌의 회로와 우리가 자라오면서 한 경험들은 각자가 다 다르다고 볼 수도 있어. 따라서 우리들이 얘기하는 B적인 것들이 서로 같은 건지 완전히 검증할 수는 없어.

B: 응.

A: 그러나 우리의 유전자와 경험을 통해 형성된 우리의 뇌 구조는 이렇게 많이 다르면서도 결국 모두 서로 비슷하지. 따라서 우리가 B를 얘기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들은, 많이 다를지라도 결국엔 많은 지점들을 공유할 거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B를 이해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성립하고, 문학이 성립하고, 예술이 성립하지 않을까.

B: 뭐 예상대로랄까. 조금, 아니 조금이 아니라 눈물이 나오네. 모르겠다. 슬픈 건지 뭔지 모르겠는데.......

A: 서글픈 느낌은 아니지 않아?

B: 벅차올라. 서글프기보단.

A: 열광 아니겠습니까....... 열광.

B: 응, 그러네.

B: 결국 우린 B적인 이야기를 해나가는 중에 우는 거고, 아니 어쩌면 나만 우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 어찌 정의할 수 있겠어. 딱 맞아 떨어지는 답이 안 나오는 주제긴 한데,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현실은 언제나 모두에게 달라. 그 70억 개의 다른 현실들 중엔 힘든 현실도 안락한 현실도 있겠지만, 현실들의 개별적인 속성을 막론하고 적어도 내가 만든 세계에 다이빙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지길 바래. 아름다운 방향으로.

B: 사실 단순하고 짧은 얘긴데 너무 늘어뜨렸네. 미안하다.

A: 나는 매우 중요한 얘기라는 생각이 드는걸. 말씀하신 대로, 간단할 수도 있는 얘기겠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답이 안 나오지.

B: 난 이제 미래를 위한 삶을 살련다. 미래라는 게, 나의 미래가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 아이들의 꿈. 거기에 나의 모든 걸 바치고 싶어. 그리고 어른들도 내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무언가를 접하며 잠시나마 새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토이스토리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며 즐거워하듯........ 청각예술이든 시각예술이든 상관없어.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해. 난 이제 정말 아름다운 일을 하고 싶다. B 세계를 열심히 만들 거야. 잘 해야지.

A: 맞아. 그렇게 생각했다면 잘 해야지. 뭐 구체적으로 코멘트를 할 게 없네. 좋은 생각이야.

B: 이제 내 인생은 나를 위한 생이 아니야. 난 남을 위해 모든 걸 바칠래.

A: 위한다는 표현도 이상할 수 있겠다. ‘B에 임하는 삶’ 정도?

B: 그러네. 맞아. 난 새로운 세계를 만들래. 그냥 계속 그럴래. 눈물이 또.

A: 현실이라는 굴레는 매우 무겁지만, 그렇기에 인간은 온갖 이성을 다 발휘하지만, 때로는 B의 창조에 우린 그저 그렇게 임하면 되는 것....... 그리고 현실이 확고히 있기에 그 모든 B는 의미를 가진다. 창조를 해 나가자.

with Sanghyeon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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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