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에 따른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제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방금 8시 9분을 기해 임기가 개시되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한 소회 및 앞으로의 기대와 함께 평소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해 보려 한다.
>> 내가 정치에 최초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12년 국가정보원 및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 개입이었다. 경악할 만한 이 사건은 새누리당 의원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은폐되었다. 이렇게 그 출범부터 실망스러웠던 박근혜 정부는 그 이후로도 국민 분열만을 획책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다. 어버이연합과 같은 보수 단체의 관제 시위 동원, 자유경제원 같은 단체의 어용화된 운영 등이 그 예이며, 그 중 압권은 김기춘의 "세월호 유가족들에 국민적 비난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라는 지시이다. 그들은 헌정 민주주의를 심대하게 침해하면서 비겁한 방식으로 국민 위에 군림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이후인 지금 돌아보면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악몽을 꾼 것 같은 4년이었다.
한편, 그것을 비판하는 진영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자들을 민주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지지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출발점 삼아 정치적 전략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악마화하며 적대시하고, 좀비처럼 취급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물론 어용 단체들에 의한 관제 여론은 철저히 기획된 허위의 것이기에 인정될 수 없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헌정 민주주의의 중요성, 그 가치와 한계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래에서 추동하는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에서 역시 무엇이 민주적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활발한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개인 대 개인으로 충돌하며 갈등하기보다는 공론의 영역에서 소통하며 발전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도록 돕는 것이 곧 민주 사회의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시민적 토양 위에서 형성되는 여론과 제도권 정치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적 합의 내용의 제도적, 정책적 검토 및 반영이 이루어지는 5년이 되었으면 한다.
>> 정치인 중에서도 특히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대통령은 더 이상 그 담백한 개인으로 남기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인물은 각종 계층의 이해관계,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정무적 역학관계 등에 의해 그 모든 것의 총화로서 형성된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역학관계의 위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말과 제시할 수 있는 방향성은 어느 정도 범위에서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다소 찬물 끼얹는 것 같은 소리이기도 하겠지만, 대통령이 선명하게 의견을 밝히며 영웅적으로 개혁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에 비추어 봤을 때 맞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가장 '뒤탈이 없는' 방식인 민주주의적 방식을 앞장서서 준수하면서, 대통령이라는 리더가 크게 볼 때 개혁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기를 바라며 지켜보고 참여하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주의에 대해 잘 이해하고 국민을 적대시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길 바라고, 그러한 정치적 환경에서 관심있는 주제들에 대해 미약하나마 참여할 수 있다면 보람된 일일 것이다.
>> 홍준표 후보의 선전으로 인하여 자유한국당의 기세등등함을 약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아쉽다. 나는 자유라는 단어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래서 자유경제원, 자유대학생연합 등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단체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강 상으로는 몰라도 실질적인 정치 행보에 있어서 자유 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 당이 그 이름을 취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다. 현실로 돌아가면 자유한국당은 100석이 넘는 거대 정당이고, 이번 선거에서 확인되었듯이 그 자금과 조직, 밑바닥 지지세는 상당하다. 그리고 총선은 2020년이다.
자유한국당의 높은 지지세의 배후에는 그 표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보수 개신교와의 유착관계가 꽤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와 그 동생은 신도들을 태극기 집회에 버스로 조직적으로 동원했으며, 홍준표에게 TV토론에서 동성애 관련 질문을 꺼내도록 제안한 것은 다름아닌 '빤스 목사' 전광훈이다. 비리로 얼룩진 보수 개신교의 최대, 최강의 보수정당과의 이러한 유착은 정교분리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 되며, 국민 전체로 따지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리고 이번 5년 동안에 세속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면서 그런 위협이 해소되기를 바란다.
>> 국민의당도 기존의 경직된 양당체제를 유연하게 변화시키면서도 범 민주 계열의 외연확장과 새누리당에 축소에 기여하고, 의회정치에서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 준 분명한 공로가 있다. 내 개인적 호감도가 높았던 안철수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너무 일찍 가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차기 정부가 통합적 행보를 보이면서 포용적인 제스처를 취하게 된다면 안철수가 정치적이든, 정치 외적이든 나름의 역할을 하며 국가에 기여를 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더라도 국민의당이 앞으로의 의회정치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해 주어야 할 것이다.
>> 내가 중요시하는 또 다른 가치는 소수자의 인권이다. 인권은 그 가능성이 '발견된' 이래로 때로는 투쟁, 때로는 설득에 의해 실질적으로 획득되어 오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권은 타협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 당연한 것을 구현하고자 할 때 현실 정치에서는 설득이라는 과정이 작용한다.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때로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을 보장하는 정책과 법안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면서, 반대세력(?)도 설득해 나가는 방향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권과 관련하여 노력을 많이 하면서 이슈들을 선도적으로 제시해 온 정의당, 인권 관련 사안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의원들이 꽤 포진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등에서 드라이브를 걸어, 인정받아야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인권 상황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 이번 선거 국면에서 하나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보수주의적 이슈들이 이번 대선을 크게 휩쓸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로 요약되는 선진국에서의 신보수주의적 경향의 발로를 분석하자면, 2차 대전 이후로 선진국들이 스스로 가진 힘을 많이들 내려놓고 합의에 의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이행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거시적으로는 전통적 지위를 상실했지만 미시적으로는(즉, 생활세계에서) 여전히 강자인 사람들이 "왜 우리가 이걸 내려놓아야 하지? 그냥 기득권을 유지하면 안 되나"라고 느낀 뒤, 그냥 막 나가도 별 상관이 없고 그게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본다. PC(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것이 피로하다며 역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결론은 사회의 파편화, 사회적 신뢰의 붕괴에 따른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약화'와 연결된다.
신보수주의적인 모멘텀을 상술한 바와 같이 진단한다면 한국이 그것을 잘 제어하고 해소한 국제적인 모범 사례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대통령의 리더십이 이 이슈에서 상당히 중요할 수 있다. TV 토론에서 문재인 후보가 동성애 반대한다고 말하니까 많은 수의 지지자들이 차별주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만큼, 이런 이슈에 있어서 리더 개인이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도 당선 직후에 거시적으로 소외되었으나 미시적으로는 여전히 강자인 사람들이 기가 세져서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적인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예방하고 민주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차기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343276299097405
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