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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1일 목요일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보며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에 따른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제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방금 8시 9분을 기해 임기가 개시되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한 소회 및 앞으로의 기대와 함께 평소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해 보려 한다.

>> 내가 정치에 최초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12년 국가정보원 및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 개입이었다. 경악할 만한 이 사건은 새누리당 의원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은폐되었다. 이렇게 그 출범부터 실망스러웠던 박근혜 정부는 그 이후로도 국민 분열만을 획책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다. 어버이연합과 같은 보수 단체의 관제 시위 동원, 자유경제원 같은 단체의 어용화된 운영 등이 그 예이며, 그 중 압권은 김기춘의 "세월호 유가족들에 국민적 비난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라는 지시이다. 그들은 헌정 민주주의를 심대하게 침해하면서 비겁한 방식으로 국민 위에 군림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이후인 지금 돌아보면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악몽을 꾼 것 같은 4년이었다.

한편, 그것을 비판하는 진영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자들을 민주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지지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출발점 삼아 정치적 전략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악마화하며 적대시하고, 좀비처럼 취급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물론 어용 단체들에 의한 관제 여론은 철저히 기획된 허위의 것이기에 인정될 수 없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헌정 민주주의의 중요성, 그 가치와 한계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래에서 추동하는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에서 역시 무엇이 민주적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활발한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개인 대 개인으로 충돌하며 갈등하기보다는 공론의 영역에서 소통하며 발전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도록 돕는 것이 곧 민주 사회의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시민적 토양 위에서 형성되는 여론과 제도권 정치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적 합의 내용의 제도적, 정책적 검토 및 반영이 이루어지는 5년이 되었으면 한다.

>> 정치인 중에서도 특히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대통령은 더 이상 그 담백한 개인으로 남기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인물은 각종 계층의 이해관계,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정무적 역학관계 등에 의해 그 모든 것의 총화로서 형성된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역학관계의 위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말과 제시할 수 있는 방향성은 어느 정도 범위에서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다소 찬물 끼얹는 것 같은 소리이기도 하겠지만, 대통령이 선명하게 의견을 밝히며 영웅적으로 개혁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에 비추어 봤을 때 맞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가장 '뒤탈이 없는' 방식인 민주주의적 방식을 앞장서서 준수하면서, 대통령이라는 리더가 크게 볼 때 개혁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기를 바라며 지켜보고 참여하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주의에 대해 잘 이해하고 국민을 적대시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길 바라고, 그러한 정치적 환경에서 관심있는 주제들에 대해 미약하나마 참여할 수 있다면 보람된 일일 것이다.

>> 홍준표 후보의 선전으로 인하여 자유한국당의 기세등등함을 약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아쉽다. 나는 자유라는 단어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래서 자유경제원, 자유대학생연합 등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단체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강 상으로는 몰라도 실질적인 정치 행보에 있어서 자유 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 당이 그 이름을 취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다. 현실로 돌아가면 자유한국당은 100석이 넘는 거대 정당이고, 이번 선거에서 확인되었듯이 그 자금과 조직, 밑바닥 지지세는 상당하다. 그리고 총선은 2020년이다.

자유한국당의 높은 지지세의 배후에는 그 표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보수 개신교와의 유착관계가 꽤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와 그 동생은 신도들을 태극기 집회에 버스로 조직적으로 동원했으며, 홍준표에게 TV토론에서 동성애 관련 질문을 꺼내도록 제안한 것은 다름아닌 '빤스 목사' 전광훈이다. 비리로 얼룩진 보수 개신교의 최대, 최강의 보수정당과의 이러한 유착은 정교분리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 되며, 국민 전체로 따지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리고 이번 5년 동안에 세속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면서 그런 위협이 해소되기를 바란다.

>> 국민의당도 기존의 경직된 양당체제를 유연하게 변화시키면서도 범 민주 계열의 외연확장과 새누리당에 축소에 기여하고, 의회정치에서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 준 분명한 공로가 있다. 내 개인적 호감도가 높았던 안철수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너무 일찍 가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차기 정부가 통합적 행보를 보이면서 포용적인 제스처를 취하게 된다면 안철수가 정치적이든, 정치 외적이든 나름의 역할을 하며 국가에 기여를 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더라도 국민의당이 앞으로의 의회정치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해 주어야 할 것이다.

>> 내가 중요시하는 또 다른 가치는 소수자의 인권이다. 인권은 그 가능성이 '발견된' 이래로 때로는 투쟁, 때로는 설득에 의해 실질적으로 획득되어 오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권은 타협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 당연한 것을 구현하고자 할 때 현실 정치에서는 설득이라는 과정이 작용한다.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때로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을 보장하는 정책과 법안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면서, 반대세력(?)도 설득해 나가는 방향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권과 관련하여 노력을 많이 하면서 이슈들을 선도적으로 제시해 온 정의당, 인권 관련 사안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의원들이 꽤 포진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등에서 드라이브를 걸어, 인정받아야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인권 상황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 이번 선거 국면에서 하나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보수주의적 이슈들이 이번 대선을 크게 휩쓸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로 요약되는 선진국에서의 신보수주의적 경향의 발로를 분석하자면, 2차 대전 이후로 선진국들이 스스로 가진 힘을 많이들 내려놓고 합의에 의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이행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거시적으로는 전통적 지위를 상실했지만 미시적으로는(즉, 생활세계에서) 여전히 강자인 사람들이 "왜 우리가 이걸 내려놓아야 하지? 그냥 기득권을 유지하면 안 되나"라고 느낀 뒤, 그냥 막 나가도 별 상관이 없고 그게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본다. PC(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것이 피로하다며 역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결론은 사회의 파편화, 사회적 신뢰의 붕괴에 따른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약화'와 연결된다.

신보수주의적인 모멘텀을 상술한 바와 같이 진단한다면 한국이 그것을 잘 제어하고 해소한 국제적인 모범 사례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대통령의 리더십이 이 이슈에서 상당히 중요할 수 있다. TV 토론에서 문재인 후보가 동성애 반대한다고 말하니까 많은 수의 지지자들이 차별주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만큼, 이런 이슈에 있어서 리더 개인이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도 당선 직후에 거시적으로 소외되었으나 미시적으로는 여전히 강자인 사람들이 기가 세져서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적인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예방하고 민주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차기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쓰다 보니 문재인 정부에 대한 내용보다는 그냥 내가 정치권에 기대하는 일반론적인 내용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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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7일 일요일

한스 오브리스트 "Do It" 전시 관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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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 오브리스트 등이 기획하여 전세계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Do It" 전시를 관람했다. 본 전시의 핵심 아이디어는 예술가의 작업은 오직 뭔가를 시키는 '지시문'을 발표하는 것이며, 그 지시문의 내용이 미리 모집한 일반인 참여단에 의해 해석되고 실현되어 전시된다는 것이다. 한스 오브리스트는 전 세계를 순회하며 진행될 이 전시에서 각 도시의 특성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도 기대한다고 했다. 이번 서울 전시는 광화문역 근처 일민미술관에서 하고 있다.

  '이념의 감각적 현시'로서의 예술 작품을 분석하는 헤겔의 이론적 틀은 바로 내용과 형식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소쉬르와 퍼스 등이 제시한 기의와 기표라는 기호학적 틀을 택해도 된다. 어쨌든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예술가는 예술 작품에 뭔가를 담으려고 할 텐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가 예술에서 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생각을 일일이 풍부하게 표현하기보다는 간결하게 암시하는 것을 선호하는 흐름이 주로 순수미술 쪽에서 많이 나타났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색채, 도형 등의 감각적 형태만으로 완벽히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고 추상화되어, 차라리 '암시'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 때 작품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완성된다.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예술작품,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예술작품 등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에서 암시되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끌어내는 것은 물론 모든 감상자의 작업이지만, 예술제도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예술계에서 공유하는 공통 기반에 대한 숙련을 거친 예술비평가들의 작업이다. 예술비평가들은 예술계에서 공유되는 미의식에 의존하여, 예술가의 작업과 그에 첨부된 컨텍스트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서 구체적으로 '말해낸다'. 이는 현대미술이 어렵다거나 불친절하다고 말해지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불편함이 있다. 과연 나는 맞게 해석했는가? 예술의 해석은 자유라고들 하지만, 감상자와 비평가들은 나의 해석의 수준이 지나치게 낮은 것은 아닐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하고 움츠러들게 된다. 마치 범죄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내는 탐정처럼, 감상자는 조심스러워진다.

  "Do It" 전시에서도 예술가의 작업은 오직 텍스트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그 텍스트가 그냥 텍스트가 아닌 '지시문'이라는 간단한 차이점 때문에 의해 위에서 말한 불편함이 의외의 지점에서 해소되고, 상당한 수준의 공공성이 획득된다. 일반인 참여단이 지시문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전시를 구성하고, 그 다양한 해석 자체가 전시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존중되기 때문이다. 오브리스트의 기획 의도가 완전히 성공한다면, 여기서는 일반인 참여단의 해석의 퀄리티가 낮아서 유발되는 웃음마저도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일 것이다. 여기서 남들보다 좀 더 멋있게 발상해야 할 텐데, 남들보다 좀 더 전위적으로 해야 될 텐데 하고 걱정하게 되면 지는 거다.

  즉, 이 전시의 진짜 관객은 사실 지시문을 최초로 읽고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하는 일반인 참여단이고(예술비평가들은 이 전시를 이 '일차적 관객'들과 같은 입장에서 비평한다), 그 결과로 실현된 개별 작품들은 이차적 산물, 곧 '이런 기획을 했다는 기록'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 전시 자체와 각 지시문들에 대한 평가(이것이 예술비평가들의 작업이 될 것이다)와, 일반인 참여단들에 의해 실현된 작품 개별에 대한 평가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그 이차적 산물로서의 전시를 관람하는 나 같은 사람은 지시문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일차적인 관객과, 해석의 결과물을 보는 이차적인 관객으로 분열된 채 작가와, 또 다른 일차적 관객들과 간접적으로 소통한다. 예술가의 지시문 / 참여단의 실현이라는 이중화된 구조로 인하여 관람 행위에서의 관계맺음이 훨씬 다층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중화된 구조는 관객에게 내적 분열을 유발하여, 현대미술 작품의 관객들이 겪는 본질적 불편함의 해법을 모색한다.

  물론 그러한 이차적 산물들이 결과적으로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전시되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하게 대중문화적이지는 않다. 실제로는 위와 같은 걱정을 하지 않고 쿨하게 임하면서도 정작 높은 퀄리티로 해석을 해 낸 작품이 주목을 받게 되긴 할 것이다(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예술비평가들의 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주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는 미술관 밖에서 일어나는 대중문화와의 강한 연관성을 맺고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아직까진 사람들에게 엄격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여지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그 창문을 보다 넓게 열고 공공 영역과 우호적으로 관계맺음을 하는 데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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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6일 토요일

대선후보 자녀 성희롱피해 사건 관련

  유승민 후보의 딸이 어제 선거 지원 중에 겪은 일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하자면, 대중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해 온 방식,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여성성이 일방적으로 소비되어 온 방식을 보았을 때 이미 이런 일은 예견되었다. 참담하다.

  직접적으로는 이 일은 전적으로 가해자의 책임이다. 그는 응당한 책임을 지고 형사적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 개인의 형사적 책임과는 별도로 사회적인 책임이 존재한다. 본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전자를 적용하되, 근본적인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후자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는 그 표현만 '책임'으로 동일하며 사실상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이를 논함으로써 가해자가 면책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첫째는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유명인의 가족인 여성은 그 유명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성적인 맥락으로 사회적으로 소비되곤 한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성희롱성 발언을 일삼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발언들로부터 자기가 그를 지켜 주겠다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에도 이것은 적용된다. 기사도 정신 역시 그를 성적 쟁취의 대상처럼 상정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에 대한 인간적 안타까움과는 명백하게 구별될 수 있다.

  가해자는 정신장애 3급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작년 이맘때쯤에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보면, 강남역 살인사건 가해자의 머릿속에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여성들이 감히 자신을 무시한다는 망상이 형성되었던 것에는 사회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input들의 영향이 없을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외계인의 부정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외계인이 자신을 조종한다는 망상이 생길 수 없지 않겠는가. 이번 건에서도 비슷하게, 해당 가해자가 '하필 그런' 기이한 행동을 한 데 대해서 사회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그 근거가 미약하다.

  물론 반대로, 여성을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사회의 단면이 그에게 확실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 역시 상당히 조심스러운 주장이기는 하다. 사회의 한 단면과,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부에 형성되는 관념이 갖는 역학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된 바는 아직 없다고 알고 있다(이는 경우에 따라 매우 다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소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 만약에 여성이 남성에 대해 평가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여성의 권위와 사회적 지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미디어가 여성의 시각을 대변하여 일방적으로 남성을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사회였다면 가해자가 그런 행동을 할 가능성은 극도로 낮았을 것 아닌가? 다소 원론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이 사건에 있어 사회의 책임을 묻는 주장은 검토될 이유가 충분하다.

  사회의 책임이 지적되어야 하는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유 후보의 딸이 유명세를 획득하여 선거 유세에 참여하고 있는 과정 전체가, 여성의 외모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사회적 세태를 빼고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의 자녀가 그 자의에 따라 후보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 후보의 경우에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그 딸이 유달리 외모와 연관지어 화제가 되었고, 급기야 '국민 장인'이라는 별명으로 언론에 보도되기에 이른다. 사람의 존재와 그 사람의 행동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유 후보의 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가 외모를 중심으로 사회적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사회적 주목은 개인에게 피해가 되는 파국에 이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주목해서 유명세를 부여하고 유세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결국 사회의 힘이고, 그 주목의 포인트는 바로 외모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이 부분 역시 다소 조심스러운 주장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가 하필 그런 방식으로 가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외모가 주목받음으로써 유명세를 얻은 사람이 웃음을 지으면서 대중들과 사진을 촬영해 주는 환경은, 그렇지 않은 환경에 비해 가해자가 그런 행위를 하기에 유의미하게 우호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본 사건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 하는 두 번째 책임이 발생한다. 그것은 유승민 후보 캠프 측의 책임이다. 여성의 외모가 일방적으로 소비되어서 여성 개인에게 성희롱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며, 또한 어제와 같은 직접적인 물리적 성희롱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등에서 그러한 작용은 이미 차고 넘쳤다. 물론 편지, 현장유세 등의 다른 방식으로도 유 후보의 딸은 유권자들을 마주했으나, 사회의 힘은 그의 외모가 가장 부각되게 만들었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소비했다. 유 후보는 이전에 분명히 딸이 유명세를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고, 그 부담 역시 이러한 예견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 후보의 캠프 측은 여성의 여성성이 이 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 보다 날카로운 의식을 가지고, 후보의 딸의 유명세가 갖는 정확한 성격에 대해 이해한 뒤 그에 대한 경계심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언에 뒤따르는 구체적인 대책은 다양하게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그 경계심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예고했다면 네티즌들이 후보의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의 외모에 집중하며 유 후보를 '국민 장인'이라고 부르는 여론보다 그것을 비판하는 여론이 더욱 우세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제 현장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어서 그러한 사건을 방지했을 수 있다. 반대로 그 경계심에 따라 후보자 딸의 유세 참여 자체를 포기했어도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의 행태를 사후적으로 보고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예견하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일구어 낸다는 점에서 전자가 더 멋진 일일 것이고, 언젠가는 그러한 일이 가능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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