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박 게이트에 대한 생각. 서론이 길다.
페미니즘은 균질한 움직임이 아니며,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이론적, 실천적 방법론들이다. 그들은 당연히 완벽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들은 때에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인터넷 상에서 최근 유행하는 화법 및 운동의 양상에 대해 과격하다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그러한 문제제기에 어느 정도는 동감하기도 한다(나는 메갈리아가 미러링 등으로 화제가 되면서 언어라는 무기를 획득한 ‘직후’에 조금 더 기민하게 새로운 전략으로 이행하여 운동의 형태로 끌고 갔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유아인을 포함한 유명인의 발화에 대한 단순 비판을 넘은 직접적 인격모독에 반대한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이 문제점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주장,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하라’ 내지는 ‘페미니즘이 아닌 진정한 성 평등주의를 하라’는 주장 등은 성립하기 어렵다. 만약에 현재의 페미니즘 조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성평등을 추구하는 대안적 이론을 만들고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면, 그것 역시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안을 정립하려는 그런 시도들은 주로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방향보다는 단순하게 페미니즘의 이름을 부정하는 시도로 실현되어 왔고, 따라서 성평등 담론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방향이 아닌 반동적인 방향으로 실현되어 왔다. 따라서 학문의 계보 상에서 소위 이퀄리즘으로 대표되는 대안적 사상이 실제로 차지하는 위치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평등 속에 부분집합으로 페미니즘이라는 단일 사상이 덩그마니 있고 나머지 부분에 ‘진짜 페미니즘’, ‘이퀄리즘’의 가능성이 잠재한다는 식의 세계관은 이퀄리스트들의 대안적 도식일 뿐이다. 성평등이라는 큰 목적의식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길이 페미니즘이며 그 속에서 전략적, 윤리적으로 잘못된 선택들이 있을 수 있다는 모델이 훨씬 실제에 가깝다. 그리고 물론 그 선택들에 대한 비판도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로서 운동의 방식과 전략에 대한 내부 비판을 하고자 할 때, 그러한 비판이 여성혐오적 반동의 득세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발화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내부 비판 글을 공유해 가서 “이런 문제들이 있지. 역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야!” 하고 넌씨눈 코멘트 달아 놓은 것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방식은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 꽤나 강력하게 먹히는 듯 보인다.
이것을 막으려면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신뢰를 확보하고,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는 당신들 편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내부 비판을 하면서도 안티페미니즘에 힘이 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특정 조류들에 대해 비판적임에도 성평등을 향한 인식과 실천을 분명하게 함께하고 있다는 신뢰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다 보면 그 비판을 지극히 주의를 기울여서 발화하게 되며, 해당 발화와는 별개로 평소에 각종 페미니즘적 실천을 해 왔을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받게 된다. 이에 대한 의무감은 페미니스트에게 거의 ‘본능적’인 것이며, 지극히 페미니즘적인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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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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