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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일 수요일

제로부터 시작하는 진보정치: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면 안 되는 걸까? (1)

  나의 페이스북 이용 방식은 수동적인 편이다. 나의 주요 관심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포스팅하기보다는, 들려오는 이슈들에 대해서 답답한 지점이 있으면 내 나름의 관점으로 그것에 대해 글을 써 보는 식이다. 그런데 요즘은 '군대와 국가폭력'에 대한 얘기를 유독 자주 쓰게 된다.

  한쪽에서는 국가폭력이나 징병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안보에 위협이 되는 불온한 주장이라고 여겨서 금기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폭력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는 반동적인 주장이라고 여겨서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군대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만족스럽지가 않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국가폭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우파의 전형적 방식도 잘못되었고, 국가폭력에 대해 정교한 성찰 자체를 거부하는 좌파의 전형적 방식 역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나의 관점이, 대단히 조심스럽게 발화되지 않는 한 어디에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관점이라는 뜻일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최근에 페북 친구를 맺은 어떤 분이 의경을 강하게 비난한 것을 캡쳐본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대략 말하면 의경 복무자들을 자기 몸 편하려고 대중을 압제하는 데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목숨을 잃어도 싸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내용이다.

  국가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의경 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1) 징병제는 국가폭력이다 (2) 그러므로 부당하다 (3) 그 중에서도 의경 제도는 특별하게 부당하다는 세 가지의 명제가 모두 입증되어야 한다. 각각의 단계의 입증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중대한 문제를 우선 차치하고 셋 모두를 비판 없이 전격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복무 방식의 선택은 온전히 자발적인 개인의 선택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징병제라는 국가폭력의 압박 하에서 개인에게 그나마 선호되는 환경을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상적인 시공간, 일상적인 과업들로부터 유리되어 2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복무자 개인에게 대단히 큰 실존적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그나마 선호하는 의경이라는 환경을 선택했고, 그 환경이 시위대에 대응하는 역할이라고 해서 그 개인에게 국가폭력에 대한 정치적인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며, 그러한 정치적 의식을 갖도록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고 독단이다.

  이렇게 보면 설령 의경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의경으로의 전환복무를 선택한 개인이 아니라 징병 제도, 혹은 의경 제도의 운용 자체에 있게 된다. 좀더 구체화해 보자면, 다양한 틀이 있겠지만 예컨대 대외를 향한 폭력을 담당하여야 할 군 인력을 대내를 향한 폭력으로 '전환'하는 것의 법적, 제도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 등이 가능할 것이다.

  유명한 페이스북 페이지 '헬조선 늬우스'가 2015년 민중총궐기 당시에 이것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의경들을 비난해서 일어난 큰 논란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이처럼 좌파 일각에서 관찰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나이브한 보이콧은 국가폭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지적으로, 실천적으로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징병제의 당사자들에게만 2차 피해를 입히게 된다. 구조를 보아야 할 때 개인을 보고, 개인을 보아야 할 때 구조를 보는 행태는 책임 소재를 흐리고 문제를 불명확하게 할 뿐이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지 자체도 논쟁거리가 되는 판에서, 부상을 입어도 싸다거나, 호적에서 파야 한다는 단순한 정념 표출에 불과한 발언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국가폭력에 대해 가장 정교하게 성찰해야 할 좌파를 자처하면서 정작 국가폭력의 말단에 위치한 개인들에 대하여 정념에 기반을 둔 노골적인 혐오를 자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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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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