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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6일 목요일

저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댄디 보수'를 보며

  K-자유주의자들이 조선일보에서 '댄디 보수'라고 소개되어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꼰대 보수는 싫다, 2030 '댄디 보수'의 등장 (2018.07.19)] )

  자유는 그 자체로 발견된다기보다는 그 가능성만이 발견되어 실질적으로는 투쟁을 통해 쟁취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사회에서의 권리와 의무를 이론화하는 출발점처럼 여겨지는 사회계약론 역시 - 물론 사회 형성 과정에 대해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보고 분석한 것이기도 하지만 - 실질적으로는 근대국가 속에서의 개인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당위적으로 채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밑바탕에 권리 획득을 위한 투쟁이 있어야만 유명무실화되지 않고 실현되어 유지될 수 있다. ‘사회는 사회계약에 의해 형성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이다’ 같은 명제를 투쟁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 법칙인 것처럼 이해한 채 전개되는 담론은 유해하다. 내가 한국 보수이념에서의 자유주의, 소위 ‘K-자유주의’를 자유주의에 대한 오독이라고 여기며 매우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2년 전에 이에 대해 몇 자 적은 바 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002544776503894&id=100002451425265)

  정치적 자유주의자라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성실하고 근면하게 노력하여 남들보다 잘 되어서 성공을 거두라는 주문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부당한 처사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과 관련되어 있는 ‘불온한’ 영역, 입사지원서의 스펙 란에 써넣기 다소 꺼려지는 영역을 필시 어느 정도 긍정하게 된다. 그러나 K-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정치적 영역에서의 행동들을 비판하고, 오직 비정치적이고 소시민적인 노력만이 성공의 정당한 수단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때 '꼰대 보수'들에 의하여 유행했던 노오력 담론과 통하는데, 특정한 방식의 삶만이 정상이고 보편인 것처럼 권장하는 것을 보면 친기업 정서의 확대를 노리는 공작의 산물이라는 혐의도 받을 수 있다.

  차라리 정치적 투쟁을 통한 자유의 획득도 정당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하여 동일한 관점을 적용한다면 일관성도 있고 나름 설득력도 있는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자유 사회를 쟁취하기 위한 수면 아래의 투쟁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불온하다’고 생각하여 폄하하고, 활동가들의 실책이나, 청렴결백한 이미지와 달리 권력을 누리는(?) 모습들을 부각하고 희화화하면서,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삶을 영위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스스로는 그런 가식적인 모습에 감화되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댄디한’ 보수임을 자처한다.

  이들이 정치적 자유에 의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비우호적인 이유는 주로 그러한 활동들이 기업활동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념을 지키고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 속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가 훼손된다면, 즉 자유로워야 할 사람들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면, 정치적 자유에 의거한 비판이 과연 부당할까?
결국 K-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긴밀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오묘한 관계를 무시하고 후자의 영역만을 긍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K-자유주의는 매우 정치혐오적이고 반동적이다. 이러한 점은 현실 정치 지형상에서도 나타나는데, 지난 박근혜 정권 4년간 자유주의를 자처해 온 청년 보수단체들은 어버이연합과 함께 전경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어용단체로서 박근혜 정권의 이념적 정당성을 결사 옹위한 것을 제외하면 그 정치적 기여가 전무하다.

  폭식투쟁을 기획하여 많은 어그로를 끌고 정작 그 실행이 임박하자 비겁하게 뒤로 물러났던 K-자유주의 청년단체의 타고난 반사회성은 벌써 4년이 넘게 비판받았고, 박정희의 국가발전 서사를 찬미하는 기성세대의 보수 역시 태극기집회를 필두로 한 실추된 이미지를 보이며 몰락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한목소리로 ‘댄디’를 자처하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면서 출범한 보수 개신교인 모임으로서 캠퍼스 내에서 수구적인 이미지의 총화와도 같은 ‘트루스 포럼’마저, 채널에 따라서는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하면서 급기야는 이 ‘댄디보수’의 대열에 함께 소개되기까지 하였다. 세련됨을 강조하는 청년보수와 수구적 기독보수의 이미지는 표면적으로 반대되기에 이 둘의 결합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으나, 유튜브의 ‘슈타인즈 채널’ 등을 보면 이미 이 둘의 결합은 ‘화학적 결합’ 단계에 이르렀음을 능히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만간 보다 자세히 써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댄디’를 운운하면서 세련되고 품위있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보수의 품격 상실과 이미지 실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라고 보지 않으며, 오히려 반사회적 폭식투쟁만큼이나 문제성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약자들이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때 ‘댄디’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변하여 열을 내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는 일베적 정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북 판에서 나름 유명한 어느 대학생이 노회찬의 사망과 관련하여 잔치국수 짤을 올린 것 역시 이와 비슷하게, 고인을 모독했다는 데에 진보 진영이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화내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으려는 일베적 정서와 통해 있다는 생각이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 혹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정치적 문제제기가 감정적 표출만으로 끝나지 않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은 맞으나, 이것은 국민들의 의견이 효과적으로 접수되어 누적될 수 있도록 사회적 장치가 발전해야 하는 문제이지, K-자유주의자들처럼 감정이 섞였다는 이유로 문제제기를 기각하고 조롱함으로써 해결되는 문제는 절대 아니다.

  자유, 합리 등 내가 좋아하는 가치들을 가져가서 오염시킨 K-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비난을 하다가도, 정작 이 단어들이 오염되지 않고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보여진 적이 있는지를 생각하면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자유와 합리를 좋아할수록 이들 단어의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실제 정치적 문제에 적용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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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10764452348585

archived on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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