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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1일 월요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소감


  올 한 해는 여러모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보다는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을 매듭짓는 일에 집중해야 했던 한 해였다. 그렇다 보니 취업, 진학 등으로 먼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동료들과 나를 자꾸만 비교하게 되면서 심적으로 힘든 점도 많았다. 비록 복수전공 때문에 제도상으론 초과학기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주변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더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진짜로 초과학기인 만큼, 내 할 일을 하면서 나보다 먼저 출발한 동료들로부터 들려오는 것들에도 귀를 기울여서 앞으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대학생활 동안 빠르게 중심 잡아서 동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막연히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보낸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 올 한 해 동안 그 방황을 수습하고 몇 가지 중심을 잡아서 추구해 보는 과정을 겪고 나니까, 재미있게도 내 관심사는 멀리 돌아서 고등학교 및 대학저학년 때 막연하게 관심 갖던 분야들로 향했다. 이건 확증편향이겠지만, 내가 해 온 것들이 일관되게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때보다 알고 있는 것은 분명 더 많아졌을 텐데, 아는 게 없다는 느낌은 어째 더욱 커진 것만 같다. 방학부터 해서 2019년 동안은 관심분야 방법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익히고, 어디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해볼 생각이다.

  사실 이번 한 해는 수업보다는 2개의 졸업논문을 쓰면서 많이 배웠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전기과에서는 졸논보다는 졸프라고 많이 부르며, 주제가 정해져 있어서 해당 주제에 지원하는 방식이다. 나는 학부 수업으로 익숙한 분야가 아닌 처음 보는 분야에 도전하면서 제어이론을 밑바닥부터 봤는데, 논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는 따라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교수님과 담당 연구원님이 그 연관성도 짚어 주셔서 감사했다.

  물리과에서는 졸논 주제를 온전히 스스로 정했다 보니 더욱 애착이 간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분야를 살펴봐도 결국 통계물리, 복잡계스러운 쪽으로 관심이 가길래 약간 답정너(...)긴 했지만 그쪽 위주로 논문 리딩해 가면서 주제를 선택했다. 모델은 다 구상했으니 이제는 이변이 없는 한 뭘 해야 할지는 사실상 거의 정해져 있고, 전산적 구현만을 남겨두고 있다. 못하는 코딩 어찌저찌 해 가면서 1월 중에 끝냈으면 한다.

  미학과에서는 수업 들은 게 전부지만... 상반기에 고전연구회와 Freethinkers에서 니체를 다뤘었는데 하필 2학기의 현대독일미학 수업에서도 니체를 다뤘기 때문에 정말 원없이(?) 니체를 읽었다. 니체는 그 문체 때문에 내용을 잘 모르면서 막연히 거부감을 가졌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얻을 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에 감명을 받으면 괜히 지는 것 같고 쿨한 태도를 유지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영미미학연습에서는 OCR 해서 구글 번역기 쓰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영문텍스트 꾸준히 본다는 게 크긴 큰지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이 예전만큼 오래걸리지는 않게 되었다.

  동아리에서는 직접적인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 활동들 전반을 관리하는 임원진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회의도 하고 소중한 인연들이 된 것 같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이면에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책임을 맡은 부분들에 대하여 좀 더 빨리, 좀 더 신중히 했어야 하는 것들도 떠올라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한 해 동안의 개인적인 소득을 꼽자면, 자리에 막연하게 오래 앉아 있는다고 성실함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감한 점이 크다. 물론 길게 본다면 시간투자는 정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간투자를 꾸준히 하는 것도 분명히 성실함의 개념에 대표적으로 포함된다. 그러나 메타인지와 정보수집을 통해 내게 현재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적재적소에 도움을 요청하면 보다 짧은 시간 내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이것 역시 - 때로는 앞의 것보다 훨씬 중요한 - 성실함일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의미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어떤 일의 한 국면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잘 넘어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어차피 학업내용의 범위가 좁았고 그 안에서 정확한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이 유리했으나, 대학교에서는 이런 방식이 내게 대체로 비효율적이었다. 진도는 나가지 않고 계속 고민만 늘게 된다.

  이런 점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으나 대학을 4년 다니면서도 고쳐지지 않아, 전기과 졸논을 쓸 때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 밑바닥부터 공부해서 도전하는 분야인 만큼 더욱더 그랬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다가 성적 잘 못 받으면 그만인 일반 교과목들과 달리 졸논은 무조건 써야 하는 것인데다, 과 도서관에 검색하면 나온다는 데서 자존심 문제도 있다 보니 어떻게든 잘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당장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일단 구현해 보고, 일단 써 보고, 일단 풀어 보는 것이 일의 진행에 있어 훨씬 낫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이해 안 됐던 것들은 자연스레 실마리가 보이고 말이다. 2019년 한 해는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좀 더 의욕적인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 감상평

  보고 나오자마자 또 보고싶다. 심야영화 보러 가는 생전 안하던 짓을 했는데,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다. 우주명작의 반열에 들 법하다는 생각.

  일단 단순히 잘 만든 영화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섬세하면서도 실험적으로 짜여진 영상들이 자유자재로 다뤄지는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만화영화라는 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아마도 돈과 시간도 많이 들여서) 그 잠재력을 무척이나 탁월하게 끌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꼭 만화영화라는 형식이어야 하지 않은 작품들도 꽤 있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매체의 특성을 적극 발견하고 활용하는 작품들에 더없이 매료되는 편이다.

  이러한 '만화적 특성'이 전면에 노골적으로 부각되면서 극중 내내 연출적 측면뿐 아니라 내용적 측면까지 넘나들면서 인상깊은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분위기를 지배하는데 어찌 감탄하지 않겠나. 실험작임과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귀감이 될 만한 영상물이 될 것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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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5일 수요일

권력자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의미와 가치 사이에서의 책임

1. 예술과 정치의 관계 측면에서

무언가가 해석을 통해 부여받는 '의미'와 정당화된 수단으로서 갖는 '가치'는 개념적으로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매우 밀접하게 동반된다. 그 밀접함을 책임있게 짚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다소 인위적일지언정 이 둘을 머리 속에서라도 엄격히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석을 통한 의미 부여가 곧 정당화를 통해 가치를 부여하는 시도로 간주되는 이러한 일반적 경향은, 사유의 교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철학적 오류가 아니며 오히려 외부 현실과 결부된 불가피한 정치적 문제라는 점에서 매우 부조리하다. 세계의 한 단면을 끄집어 내어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하여 전시하는 작업은 사유의 전개에 있어 필수적이나, 그렇게 끄집어내어진 사건들을 소재로 한 사유가 사람들에게 공유되면 그 소재들은 본래 의도와 관계없이 '실제로' 가치를 획득하게 되며 이것은 사상가를 모종의 윤리적 평가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작업은 예컨대 순전한 예술에서라면 매우 일상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본질적이기까지 한 작업이지만, 정치의 영역과 결부된다면 시도되는 그 즉시 온갖 종류의 문제를 야기한다. 예술에 대해서건 정치에 대해서건, 예술적 비평과 정치적 비평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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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시적, 미시적 정치권력 측면에서

  이 글에서는 '의미'와 '가치'를 둘러싼 부조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의미는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존재하지만 가치는 실천을 통해 사회 속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된다. 이처럼 의미와 가치는 그 개념상 별 상관이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가치는 실천적으로는 굉장히 밀접하게 동반된다. 필연적인 개념적 관계가 없는 것들이, (말하자면 우연적인) 사회적으로 조건지워진 바에 따라 서로 관계맺어지면서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부조리이다. 그리고 이 부조리의 원인은 다름아닌 권력이다.

  누군가가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가 어떤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현상이 정당화되고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 구별되기 어렵다. 그가 어떤 현상이 갖는 의미를 머리속에서 생각해내고 그것을 끊임없이 언급한다면, 언론 보도를 통해서, 지지자들의 담론 재생산을 통해서 그 현상에는 실제로 가치가 부여되게 된다. 사람들의 삶의 일정 부분이 그 의미에 결부되어 규정되기 때문이다. 지극히 뇌피셜이지만 나는 이걸 권력의 '정의'처럼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대상들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를 그저 그렇게 머리속의 지적 유희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을 실제로 그렇게 조직해내고 정당하다고 믿어지게 만듦으로서 주변 사람들의 삶과 결부시키고, 따라서 가치로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위에서는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나 적용될 법한 뉘앙스로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일상생활에서의 미시적인 발화권력이나, 온갖 종류의 조그마한 결정권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것은 빠짐없이 적용된다. 또한 신문사에서 무엇에 의미를 부여해서 기사화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들도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예술가나 문예가가 가지고 있는, 작품에 무엇을 어떻게 집어넣을지에 대한 결정권도 여기에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음을 인지하고 이걸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해 성찰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킨 뒤, 자신은 가치를 부여한 게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만큼이나 후자의 경우에도 신경을 쓰고 비판해야 한다. 어째 정확한 예시를 잘 못 들겠는데, '그냥 주관적 생각을 쓴 것뿐이다', '정당화한 게 아니라 그냥 의미가 뭔지 생각해본 것뿐이다' 뭐 이런 식의 해명 말이다.

  가치를 제거하고 의미만 남겨두겠다고 선언할 때, 그 선언은 그의 머리속에서야 효과를 발휘하겠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 그의 권력에 의해 뭔가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이미 결부되어 버린 이상 그 결부를 끊어내는 일이 마법 주문처럼 선언 한 번에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혹은 무책임한 태도일 것이다.

  누군가 한 번 권력을 획득한 이상, '이 의미부여는 지적 유희일 뿐, 가치로 실현시키지는 않겠다'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끊임없이 자기반성적으로 성찰되어야만 한다. 누구든지 자기가 하는 발화의 커버리지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그에 따라 책임있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권력은 그 권력을 가진 자 스스로도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내려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지극히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단순히 '권력에 중독되면 놓기 어렵다' 이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이런 부조리는 무언가를 외부적 가치와 결부시켜서 누군가에게 이롭거나 해롭게 하지 않은 채, 오직 내적으로 자유롭게 의미 부여를 해 가면서 여러 상상을 펼쳐나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슬픈 것이다. 큰 영향력을 갖는 정치인은 더 이상 '도발적 상상'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또한, 인기를 누리던 예술가들이 간혹 영광을 뒤로 하고 은둔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부조리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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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