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고 초현실적이다. 읽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N번방 사건'에 대한 글들을 의무감에 꾸역꾸역 읽었다. 특정 범죄자 몇 명이 아니라, 한 나라 전체에서 유의미한 비율의 불특정 대중들이 참여하는 여성들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 직접적이고 심각한 폭력이 그동안 있어 왔다.
불법 음란물을 아무렇지 않게, 혹은 재미있게 여기고 남성들끼리의 유머 소재로 소비해 온, 그 유서깊은 잘못된 분위기가 이 사건에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아니, 이 사건이 바로 그러한 분위기의 아주 극단적이면서도 솔직한 귀결 그 자체이며, 그러한 분위기가 견제받지 않을 때 이런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휴대폰 조작 몇 번에 불과한 아주 일상적인 일도,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에 영향을 줄 만큼 아주 비일상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다. 이것이 불법적인 성적 착취와 디지털성범죄의 아주 무서운 점이다.
26만 명은 중복 집계가 있으므로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들을 많이 본다. 물론 그것보다 수가 더 적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방의 회원 수만 해도 2만여 명이었다고 하며,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이 숫자만 생각하더라도 매우 높은 비율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텔레그램과 같은 비주류적 디지털 매체 사용에 익숙할 연령층이 어디까지일지 생각해 보면, 비율을 따질 때 분모에 들어갈 숫자는 훨씬 더 줄어든다. 이 정도 비율이면 위에서 말했듯 특정 집단을 넘어 사회 전체의 불특정 다수가 이 체계적 억압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말이다. 게다가 사건이 드러난 이후로 (디지털성범죄 사건에서 언제나 그래 왔듯이) 그 범죄적 자료들에 대해 여러 경로로 관심을 갖는 이들의 게시물들이 속출했음을 고려하면 그 일반성은 더욱 확장된다.
그런데 26만명이라는 숫자가 왜 계속 강조될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가 있기는 하겠으나, 사건의 끔찍함에 공감하기보다 숫자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먼저 지적하면서 선 긋기, 심각성 축소하기부터 시도하는 그런 소위 '합리적' 태도를 본다면, 그 반대급부로 '결코 일부가 아니다'를 강조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자가 몇 명이냐 하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반성이라는 질적인 문제와, 그에 따른 철저한 반성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이런 얘기도 해보겠다. 음란물 금지, 성매매 금지 등에 대한 대중적인 반대 의견은, 주로 그 금지의 근거가 성을 엄숙하게 보는 전근대적 관점 하에 수립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리고 판례 및 현행법의 논리 상으로는 그것이 옳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주장들이 다소 허수아비 때리기처럼 느껴진다. 남성중심적인 환경에서의 성 산업 발달이 가져올 결과를 많은 이들이 긍정적으로 전망하지 못하고 우려하는 이유가 정말 과연 그것뿐인가?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현대사회로 나아가자는 관점에서 그런 의견들을 비판하는 것은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사건에서 극단적으로(그러나 매우 일반적으로) 드러났듯이,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에 대한 실질적인 성적 착취, 속임수, 폭력이 매우 일상적인 수준에서조차 만연하고, 또한 그것이 'N번방'과 같은 형태로 간단히 연결되는 지금의 환경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 전체에서 성적 관계맺음의 전면적인 비폭력적 재구성, 그리고 성 담론의 탈-남성중심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 이 상태에서 성 산업의 발달이 가져올 것은 자유와 권리의 확대가 아닌 명백한 축소일 것이 아닐까 한다. 산업의 양지화를 통해 그런 비폭력적 재구성이 알아서 유발될 것이라는 기대는 그 근거가 미약하다. 오히려 비폭력적 재구성의 가능성에 대한 확실하고 정교한 근거와 사회 전체적인 추진 의지가 충분히 확보됨이 우선이고, 그에 따라서 그걸 진행하든 말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원래 얘기로 돌아오자. N번방 착취 사건, 그리고 남초 집단이 그 사건을 대하는 왜곡된 관점의 '일반성'을 고려할 때, 이 쯤 되면 여성들이 겪는 매우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성적 폭력에 대해 호모소셜 대중들의 자발적 태도변화와 동료 시민으로서의 연대는 딱히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지금 느껴지는 솔직한 심정이다. 그저 여성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연대를 구성하고, 권력과 언어를 더 많이 획득하고, 더 많은 사실들을 찾아 폭로하고, 더 많은 호모소셜을 해체하고,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를 기억한 채 새로운 시대를 치열하게 열어 가는 방법밖에 없겠다.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며 미약하게나마 보태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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