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직한 인간상의 잘된 재현은 그 자체로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감상자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의견을 말하고 싶게끔 한다. 그런 관점에서 SNL의 이 기획은 영리하고 성공적인 코미디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코미디가 언제라고 없지는 않았겠으나, 이번 기획이 성립한 것에는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희극인들의 최근 메타가 대대적으로 성공한 것의 영향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저런 사람 꼭 있지 라는 시청자들(사실 페북러들)의 반응에서 묘하게 다른 결들을 느낀다. 굳이 이분법적으로 써보자면 먼저 한쪽 끝에는 이러한 상황에서 곤혹스러워했던 (혹은 현재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며 왼쪽 인물에 공감하는 경우가 있겠다.
한편 반대쪽 끝에는 의사소통에 문제를 덜 겪고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한, 말하자면 '강자적' 입장들에서 서로간에 공감하는 반응도 있다. 그 수위는 저런 사람 꼭 있다를 넘어 저런 사람들 참 잘못됐다, 짜증난다 까지 상당히 넓게 나타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강자적 반응들은 또다시 남녀노소 등에 따라 각각 메타적으로 비평될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미 많은 분들이 써주셨다.
왼쪽 인물(인턴기자)의 연기가 무척 부각되어서 그렇지, 형식적으로 두 인물이 상당히 패러렐하게 제시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반응 둘 중 어느 쪽도 적어도 작품 내적으로는 틀린 감상이 아닐것이다. 많은 경우에 양쪽 모두에도 공감이 될것이고 말이다. 전자의 경우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나도 한때는 그랬었다, 저런 포멀한 상황이 참 tough하지 하며 위로를 얻을수 있을것이므로, 반드시 왼쪽 인물에 대한 조롱 위주로 극이 구성됐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왼쪽 인물에 소극적으로나마 이입하며 공감을 주고받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다만 내가 다소간에 거리감을 느꼈던 것은 위에서 이분법적으로 제시한 두 반응 중 후자의 경우이다. 집단에서는 그러한 짜증섞인 말을 서로 한 마디씩만 주고받으면서 확인하더라도 개인에 대한 따돌림으로 연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해당 인물을 배제하는 방식의 공감이 아닌, 해당 인물까지 포함하는 포용적 공감이 이상적이겠다. 이 두 가지 공감은 그 시작에서는 정말 한끝 차이, 한순간의 호의와 용기 차이이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라고 할만큼 다르며 나중에는 아예 돌이킬수 없게 커진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점을 인지한 채로 그런 짜증을 팀원들과 직접 나누는걸 자제하는 상황에서, 이 극에 대한 감상, 즉 가상인물에 대한 답답함-경험의 공유를 통해 그것을 해소할 수 있으므로 이런 감상도 반드시 문제적인 태도는 아니겠다. 단지 실제의 인간관계에서 같은 방식의 공감이 발휘된다면 포용적 공감이 아닌 배제적 공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다소 아쉬울뿐이다.
그런데 나는 인턴기자의 행동이 '그렇게까지' 미숙한 건지부터가 사실 의문이다. 물론 뉴스 방송이라는 매우 포멀한 자리를 위해 훈련을 받고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다면 나와서는 안될 장면인 건 맞다. 가장 포멀한 상황에 그러한 미숙한 태도를 갖다붙임으로써 연출되는 아이러니와 함께, 그러면서도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고 충분히 상상할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 때문에 더 화제성이 커진 것일테다.
그렇지만 일상으로 끌고 와 보자면, 왼쪽 인물은 어느정도 전형적인 언행을 끊임없이 수행하면서 열심히 상황을 타개하고 포멀함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잉된 형식들만이 난무하고 내용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장담하건대, 만약에 이 극에서 '정말로' 많이 미숙한 태도를 재현했다면 시청자들은 '못 보겠어서'(소위 공감성 수치?)가 아니라 순전히 '재미가 없어서' 감상을 중지했을 것이다. 즉 이 장면이 정말 참을 수 없을만큼 곤혹스럽고 답답한 상황으로 느껴진다면 요즘 말로 [진짜]를 모르는 거라고 생각한다. 곤혹스러워하면서도 포멀함을 지키고자 하면서 열심히 사회생활 하는 초년생 정도이지, 뭔가 더 심각하게 답답한 상황을 지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한편, 맥락을 약간 떠난 일반론을 가져와 보자면, 나는 미숙한 의사소통을 접할 때 말 그대로 미숙함으로 우선적으로 연결짓게 되는 편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을 불쾌한 반사회성이자 위협의 가능성으로 먼저 연결짓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자주 느꼈다. 여기서 위협이란 직접적인 것이기도, 배려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오는 상대적인 피해가 있을것까지 염두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즉물적으로 드는 거부감에 더하여 실제적 경험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도식일것인데, 상술한 포용적 공감의 가능성을 그저 이상론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러면서도 피해가기 힘든, 모든 행위자에게 비극적인 사태라고 생각한다.
나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의 감상으로 미루어 보아 한가지 더 재밌었던 점이 있다. 긴장을 많이 하고 곤혹스러운 상황을 모면하려는, 그러면서도 포멀함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일련의 언행은 다른 시대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 자체가 보편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양상 중에 90년대 - 00년대생에게서 새롭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등장한(것이라고 이야기되는) 특질들을 이 극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한다.
면접 학원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배워서 그렇다는 말도 있던데,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직접적인 학습 외에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어투와 언행을 선호하고 채택하도록 상당히 구체적으로 유발할수 있다고 본다. 아무튼 온갖 설왕설래를 떠나 이렇게 잘된 있음직한 재현들이 축적된다면, 대중적 반응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를 빌려오자면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자료로 될 수 있어 보인다. 마치 서울사투리 선망이나 MBTI 성격유형 스테레오타입 재현처럼 말이다. 문화인류학이 여기서 맞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100% 정확한 사회상의 투영이 아닌 선별된 예술적 재현이라는 점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더 커지기도 한다. 전형을 바탕으로 하는 논쟁은 추상적이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