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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7일 월요일

디지털 아트의 발전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생성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서, 나는 단순히 여러 물체를 retrieval해서 이산적으로 병치시키는 아이디어 suggestion, 혹은 ppt처럼 논리적 관계를 표현하는 다이어그램의 편리한 생성 정도가 제일 먼저 대중화 될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것보다 아예 학습 데이터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재조합하여 회화를 그려주는 생성모델이 더 먼저 대중화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생성모델들의 기초원리의 중심에는 다름아닌 '확률분포'라는 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가능성을 GAN 등에서 이미 실제로도 봤다는 것 등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사실은 예상을 했어야 맞겠다.


그리고 맨 위 문단에 말한 것들도 그 개념증명은 오버스펙으로 되어버린 셈이라, 금세 서비스들이 대중화되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이건 아직 많이는 안 보이긴 하는데, 언어모델인 ChatGPT로도 프롬프팅을 잘 하면 논리적인 시각적 다이어그램을 그릴 수도 있다).


점, 선, 면 같은 단순한 도형들을 조합한 컴퓨터 아트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1970년대이며 (80년대 록밴드 앨범 커버들을 보면 초보적인 디지털 아트가 많이 보인다), 내 심리적 거리는 그 시절에 한땀한땀 컴퓨터를 배워가며 작업한 선구자들에 대해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50년도 안 된 2020년대 초반에 아예 프롬프팅으로만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려주는 컴퓨터 기술이 나온 것은, 정말 곱씹을수록 괴상한 일이다. 이것은 휴먼스케일에선 이해가 어렵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기여하면서 누적이 빨리 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 50년의 격차는 엄청 큰데, 앞으로 만약에 인류문명이 오래갈수 있다면 이 50년간의 발전이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지 궁금하다. 생산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게 되면 아마 멀지 않은 시대에 꽤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기술 = 인공지능서비스 기술 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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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4일 금요일

대학원 생활에서 불안감의 요인: 사회적 계약의 부재와 유예되는 진로선택

대학원생은 대학생이 아니라서 장학금도 드물고, 인건비도 근로소득이 아닌 기타소득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회사 다니는 친구들이 받는 여러 혜택이나 연금 같은 것들, 그리고 대출심사 같은 것에도 해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분명히 공부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대학생도 근로자도 아닌, 말하자면 이중적으로 배제되는 입장인 것이다.

(특히 전문연구요원은 많은 장학사업이나 펀딩에서 예외이고 학내 근로도 불가능함. 복무 시간을 준수하면 학내 근로는 당연히 불가능한 것이니 그렇다고 치는데, 장학 같은 경우는 꼭 돈 때문이 아니라 장학 수혜 자체가 스펙이 되는 경우도 있는지라 더 아쉬운 부분이고... 암튼 이 부분은 이번에 장관님이 개선 의지가 있으시다고 들었다.)


이렇다 보니, 분명히 일도 열심히 하고 있고 BK 및 과제 인건비 등도 챙겨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사회의 엄연한 구성원으로서 삶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듯하다. 이러한 유예에서 오는 불안과 불확실성이 큰 시기(개인적)이고 또한 그러한 세대(사회적)이다보니 좀더 이런 게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대학원생들한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교육과 사회에 좀더 직접 기여할 책무를 부여해서라도, 고도화된 사회계약의 참여자로 약간 더 적극적으로 포함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귀찮아할 사람도 많겠지만...


아무튼 나 정도면 무척 괜찮은 환경에서 다니는 것일텐데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현대 국가에서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제도 상에 인지되고 라이프사이클에 맞게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게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이 유독 이런 면에서 구멍이 있는 것 같다.

대학원생 인건비가 근로소득으로 인정되거나, 평균값이 대폭 오르거나 하는건 여건상 무리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마땅한 지향점인지조차 불분명하긴 하다. 다만 회사 근로자에 준하는 이런저런 제도적 관심과 지원을 대학원생들도 어떤 방법으로 받을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다.

사실은 방법이 있는데 결혼하면 각종 혜택이 있다고 한다. 힘들고 결혼 안하는 시대라지만 이런 걸 감안하면 역시 상대에게 확신이 들면 끝없이 미루기보다는 주저말고 선택을 하는 것도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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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7일 금요일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한승혜 외)>을 기대하며

출간 예정인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한승혜 외, 문예출판사 (교보문고 해당 도서 링크))는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어릴 때 유명하다는 문학 작품이나 영화를 보다 보면 다소 뜬금없고 과도한 성적인 메타포, 그리고 여성 인물 재현 및 신체묘사의 폭력적 방식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곤 했다. 예컨대 인간성의 정수를 표현하거나 그 상실을 개탄하는 진지한 내용을 덤덤하게 다루는 부분에서도, 거의 작가의 포르노그라피적 애호에 가까워보이는 여성묘사가 끼워져 있는 그 언밸런스함 탓에 말하자면 '깬다'는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시적 메타포로 사용될 경우에는 그래도 지체높은 문인들이 쓴 것이고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니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혹은 폭력에 대한 리얼리즘적 서술에서의 충분한 이유 없는 성적 묘사는 사회적 비참함을 표현하기 위해 특수하게 용인되는 것인가보다 했다. 그래도 깬다는 생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데 현재에 알게 된 여러가지를 바탕으로 그 당시로 외삽해 보면, 그것들 중에서 꽤 많은 것들을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였구나 싶다. 요악하자면 다른 어떤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메타포 역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독자에게 보편적 설득력을 갖출수 있다. 그리고 퍽 많은 독자 집단에게서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깎아먹는 요소는 보통은 보편적으로도 실패한 요소이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었던 친구들과 얘기해봐도 대체로 비슷한 의견이다.


물론 정신분석학 및 그것에 근거한 문학비평 이론 등에서 성적인 메타포가 중요하고 특수하게 다루어지는 것에는 상당부분 진실이 있을 수 있다. 우리 머리속에서 분명히 약간 더 특수하고 뿌리깊은 영역이 관여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들 자체가 남성중심적으로 서술되거나 사용되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 경우는 전복적 재구성을 꾀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재구성의 시도들도 원본과 거의 패러렐하게 전개되며 이미 상당부분 정착한 듯하다.


또한 문학작품과 문학비평의 양방향적 상호작용을 감안할 때, 비평론에서 그러한 메타포들에 정당성을 부여해줌으로써 (혹은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개별 문학작품들의 그러한 스타일이 더 강화되었을 수 있다.


본서에서는 개별 유명 문학작품들에 대한 애호를 잃지 않은 채로 이들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독해한다. 외설과의 거리두기를 암묵적으로 선언하는 지체높은(?) 작품들에서도 여성성이 당연하다는 듯이 폭력적으로 다뤄져온 기제를 해명하고 대안을 모색할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분들도 유명한 분들이 많이 참여를 했다.


물론 예술작품이 성윤리의 멸균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폭력을 보거나 상상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사람보다는, 폭력을 자신의 관점 속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볼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치론적으로 더 바람직한 도덕적 태도를 가졌을뿐더러, 작품 감상에 있어서도 더 '충만한' 독자라고 생각한다.


예술작품에서의 부적절한 여성 묘사에 대한 비판이 적절히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를 폭력 이해에 취약한 성윤리의 멸균실이 아니라, 폭력에 대해 세심하게 다루고 생각해볼 줄 아는 맷집이 있는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금기'에 대해 썼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되 폭력에 대한 얘기로 이식하면서 끝맺자. 내가 생각하는 '맷집 있는' 사회는 금기가 일방적으로 위반되어도 (혹은 폭력적 태도가 드러나도) 문제삼을 수 없는 사회가 아니라, 금기에 대한 감수성이 높고 그것이 적절한 방식으로 정교하게 위반될 때에 (혹은 폭력이 충분한 작품 내적 맥락을 가지고 묘사될 때에) 다들 괜찮아하는 사회이다. 만일 이것이 혼동된다면, 작품 속에서 시뮬레이션된 위반과 실제의 위반이 그 구별을 잃는 것은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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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1일 토요일

이론물리학의 변방에서: 기초학문 위기 속 진로 고민과 개인적 푸념

명지대 물리학과 폐지 예정 보도가 이번주 내내 소소한 이슈였다.


연구 꿈나무들 사이에선, 국내에서 학계 근처에 자리를 잡는 게 점점 더 급속히 어려워진다는 비관적인 (그리고 거의 확실한) 예상이 이미 공기처럼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도 막상 명지대 정도로 이름 있는 학교에서 물리학과 (그리고 수학과, 철학과, 바둑학과) 를 없앤다는 보도가 나오니 상당히 마음이 건드려지기는 한다. 물론 학생들과 교수님들은 반대가 우세하다고 하니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이지만, 컨설팅을 받고있는 재단쪽이 의지가 강력한 모양이다.


앞으로 학생 인구 감소 때문에 이런 일이 더욱 많아질 것이고 순수학문으로 분류되는 수학, 물리학 그리고 소위 문사철 쪽이 제일 취약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의견인 듯하다. 대학의 본령은 순수학문인데 어떻게 이걸 없앨 수 있냐는 주장은 지금 아무것도 아닌 내 위치에서 하기엔 너무 거창한 것 같고... 그냥 통계물리학이라는 방법론적 배경을 진로에 충분히 활용하면서 내 한몸 건사하고 사회적으로 1인분 몫을 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씁쓸함이 우선 든다.

오히려 순수학문도 순수학문이지만, 수학 및 물리학과를 폐과함으로써 공학을 비롯해서 산업에 보다 직결된 분야 학생들의 기초역량 교육이 장기적으로 대단히 힘들어질 것이 더 실질적인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새로운 것을 창출하거나, 새롭지 않더라도 기존 것들의 퀄리티를 유지하고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킬수있는 혁신력이 한국의 산업생태계에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혁신력은 트렌드를 따라가는 융합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기초적인 방법론적 역량에 대한 확실한 훈련, 그리고 기초적 윤리에 대한 인식 제고에서 나오는 면도 많다고 본다.

또한 다시 개인적 푸념으로 돌아오자. 이공계생 전반에 대한 기초역량 교육을 넘어서 물리학이라는 분야 자체로 봤을때도, 나는 이론물리학, 그 중에서도 특히 통계물리 분야가 비록 순수학문에 속할 수 있지만 약간만 옆으로 틀면 사회적 트렌드 주도와 이익창출에 기여해온 부분이 무척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사람들이 잘 몰라주는 것 같아서 늘 아쉽다 (오히려 수학의 경우에는 금융계 잘 간다거나, 인공지능에 중요하다거나 하면서 이런 게 나름 알려져있는 것 같더라).

사실 요즈음은 우리 분야는 딱히 순수 이론물리에 속하는지도 잘 모르겠음. 이론물리학자들이 보면 너무 practical해서 변방에 속할 것이고, 즉각적인 산업응용을 염두에 둔 쪽에서 보면 또 너무 이론적이고. 그런 중간적 특성이 약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분야가 등장하고 성장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도 하고. 아무튼 기업이든 학교든, 국내든 국외든 우리 통계물리 분야의 강점을 잘 알아주는 곳이 많이 있다면 좋을 것 같고, 나도 잘 찾아봐야겠다.

오히려 부모님은 주변을 보니 결국 공부 오랫동안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자리를 얻었었다며, 벌써부터 힘 빠지는 소리 하지 말고 너가 하고 싶으면 계속 해 보라고 권장하시기는 한다. 근데 그때와 지금은 또 많이 다를 텐데 싶기도 하고... 너 졸업할때면 교수님들이 많이 은퇴하시지 않냐고 하는데 이미 그 시기는 거의 끝났다고 알고 있기도 하고.

아무튼 아카데미든 아니든, 물리학 백그라운드를 구체적으로 살릴 수 있는 커리어패스에 대해 encourage하는 얘기가 거의 아무데서도 들리지 않다 보니 나라도 적극적으로 틈날 때마다 여러 재밌는 포지션들을 찾아보고 소개하고 그러는데, 그래도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예전부터 가졌던 내 고질적 문제점이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건 많은데도 계속 하던것만 하려고 해서 정작 실제 선택의 폭이 좁고 질투와 불안감만 커진다는 건데... 이게 장기적으로 별로 안 좋은 것 같고, 좀더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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