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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4일 월요일

상황적 우연에 따른 언어이해의 오류는 인간, 언어, 세계 사이의 다채로운 상호작용이다

'황망하다'는 말은 슬프다기보다는 정신없다는 뜻인데, 장례식을 치르는 상주들이 보통 '혜량해 달라'라는 말과 함께 주로 이 황망하다는 말로 소식을 전하다 보니, 슬프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서 종종 그렇게 쓰이는 것 같다.

이 얘기를 함께 나누던 다른 분의 보충적 의견에 따르면, '허망하다' 등의 단어와 발음이 유사하다 보니 여기에 이끌려서 더 그런 점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단순한 어감, 몇 가지 상황적 우연, 다른 단어 및 형태소들과의 유사성 등이 겹쳐서 단어의 뜻이 사전적인 것과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곤 하는 것이 나는 굉장히 흥미로운 현상 같다(나는 이런 것을 '이끌린다'라고 표현하게 되는데, 이런 언어 현상들 관련해서 위키 등에서 많이 본 표현이라서 그런 듯). 의미와 기표는 서로 별개의 층위인데, 실제로 언어가 구사될 때는 언어들간의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나, 세계의 필연적 구조의 영향 하에 그 층위를 활발하게 넘나들면서 다채로운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연과 혼동에 의해 쓰임이 변화하더라도 언어정책은 어휘들의 사전적 의미와 정확한 어법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등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현상들은 세계와 인간의 지극히 다채로운 상호작용이므로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황망하다'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얘기했던 또다른 예시로는 '억하심정'이 있다. 사전적으로 보면 억하심정은 사람의 마음 중에서 꾹 눌러 놓고 겉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속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 중에서는 부정적이고 억울한 마음이 아무래도 많게 되어 있다 보니, 억울하고 한이 맺혔다는 뜻으로 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사용하는 듯하다. 물론 사전적인 뜻대로, 꼭 한이 맺힌 느낌이 아니라도 뭔가 음침한 속마음을 갖고 행동하는 것 같은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은 것 같기는 하다.

또한, 답답하고 북받친다는 의미의 '억하다'라는 단어가 존재하므로 '억한 심정'이라는 표현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런 표현과도 상호작용하는 것 같다. 다만 '억하다'라는 말이 '억한 심정' 외에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억하심정' 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덕분에 그 영향을 받아서 (예컨대 억하심정이라는 말이 머리속에 떠오르긴 했는데 그게 알맞지 않은 쓰임새임을 인지하고 있어서 바로 수정할 때) '억한 심정'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위 내용과 약간 관련될 수도 있는, 2017년경 별다른 목적 없이 간단히 작성해 본 글을 하나 첨부한다 (아래에 임베드). 여기에서는 언어로부터 우연하게 유발되는 감각인상(편의상 '언감 현상'이라고 칭함)이,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님에도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인식 구조상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언감 현상은 감각과 의미가 직접 맞닿아 상호작용하므로 아주 세련된 예술적 계기까지는 아니지만 주관적 보편성을 가지므로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위키위키 류 사이트 이용자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떡밥 중에 하나인 Bouba-Kiki 효과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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