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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2일 금요일

구시대적 관제 동원 시위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구시대적 관제 동원 시위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전부터 폭력 논란, 관변단체 의혹 등으로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보수적 시민단체의 대명사가 된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라는 단체와 관련해서인데, 최근 탈북단체 동원설, 청와대 지시설, 전경련 자금지원설 크게 세 가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시사저널의 단독 보도로 드러난 청와대 지시설에서 등장한 청와대 ㅎ사무관이 탈북단체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최고책임자이자 민주적 원리에 따라 국가를 통치할 의무가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건과 비슷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사에 나름대로 처음 관심을 가진 이래로,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들은 모든 시사 이슈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2012년 대선국면에서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에 의한 댓글작업이다. 이것을 여론 면에서, 법적인 면에서 꼬리자르기를 잘 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다. 새누리당의 SNS미디어본부장이었던 윤 모 목사가 소위 십자군알바단이라는 댓글부대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윤 모 목사가 '나를 지원하는 분이 국정원이랑 연결이 돼 있어' 라고 말하는 녹취록이 존재한다. 또한 윤 모 목사는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와 직접 보고하고 지시받는 관계였다는 것 역시 드러났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도 국가정보원에 의해 진행된 이 여론조작의 책임소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버이연합의 정치적 집회가 누군가에게서 자금 지원을 받아서 진행될 거라는 단순 의혹 자체는 자주 제기되었으나, 그 주체가 바로 청와대라는 시사저널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국정원 댓글작업 사건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중들의 눈에 띄는 어버이연합 시위를 기획하는 데 청와대가 일부라도 참여하여 지시했다는 것은, 국민들이 방해하여 자기들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데서 나오는 발상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운영 원리조차 이들이 내재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2012년 국정원 댓글작업 사건이 그 사건의 중요도에 비해 충분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마무리되었고, 결국 '게이트'라는 칭호를 대중적으로 얻지는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이번 청와대 지시설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게이트라는 칭호를 부여받을 만 하고, 성역 없이 철저히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쯤 되면 국가수반을 보좌하는 청와대인지, 국가수반을 보위하는 친위대인지 알 수가 없다.

  관제 동원 시위는 민주국가의 시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기만이며, 여론조작 행위이다. 권위주의 통치의 회귀의 징조이다. 청와대가 이러한 관제 동원 시위에 깊이 개입해 온 의혹이 있다면 명명백백히 밝혀야 하며, 의혹이 사실일 경우 최고 책임자가 직접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

  또한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부기관에서, 그리고 군대 사상교육 현장에서 탈북자들을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도 (공공연히 막연하게 알려져 있는 것 같긴 하더라만) 낱낱이 밝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폭압적인 권위주의 정권에서 살다가 목숨 걸고 탈출해서 나온 사람들을,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정의롭고 따뜻하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옳다구나 하고 관제 동원에 이용함으로써 국민 분열을 조장하고, 결과적으로 또다른 권위주의 정치에 이용하고 있는 행태는 반드시 중단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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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1일 목요일

한국 보수이념에서의 '자유' 개념 비판

  한국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주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 상기할 때마다 대단히 안타깝다. 자유라는 단어를 내건 사람들이 헌정 민주주의 국가가 보장하는 자유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한국에서 자유 개념의 쓰임이 현재와 같이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소위 주류집단에서 그러한 것을 조장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고, 그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해 분석해 본다. 두 파트로 나누어서 쓰겠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정치적 및 경제적 이념지형에 대해 깊이 이해한 상태에서 쓰는 글은 아닌데, 읽어주시는 분들의 많은 지적을 통한 공부가 앞으로 필요할 것 같다.

  첫번째는 보수 정치권에서 사용하는 '자유'의 개념이다. 자유에 대한 낡은 관념이 충분한 반성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특히 한국 사회 기득권층 내에서 그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주변부의 의미만을 취한 채로 맹목화되었는데, 그 잘못된 관념이 불행하게도 권력자들이 헤게모니를 쥐는 데에 매우 유용했기 때문에 계속 조장되고 사용되어져 온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란, 냉전시대 '공산진영'과 대립한 '자유진영'에서의 그 '자유'가 본래적 의미를 잃고 오로지 상대방에 대한 안티테제로서만 사용되기 시작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독재와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자유와,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모두 포괄하긴 하나, 후자는 이후 문단에서 논하고 여기에서는 전자에 포커스를 맞추겠다.

  물론 자유를 추구한다는 말 자체는 현재에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동의할 만한 좋은 일이나, 그 실상을 본다면 '자유진영'에서 그 반대 진영을 경계한다는 목적으로 사상교육과 인권침해를 강행했던 일들이 너무 많았고, 이것이 진정으로 자유 개념을 잘 수호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아주 큰 무리가 있다. 현재에도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실태 및 정부기관과 보수단체에서 탈북자들을 이용하는 행태를 보면, 공산진영 및 북한 독재정권에 반대되는 의미로 보수 진영에서 사용하는 자유라는 단어가 그 본래 의미대로 잘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렇게 자유 개념을 왜곡시키지 않고도, 자유권 침해 관련해서만으로도 북한에 대해서는 수많은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 개념의 왜곡은 딱히 '분단관계라는 특수상황에서 불가피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자유의 본질과는 매우 떨어져 있었던 것들을 자유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게 함으로써 보수적 헤게모니가 힘을 얻게 된 것은 비판당해 마땅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한창 논란이 되었을 때 진행된 TV 토론에서도 나는 이러한 '자유' 개념에 대한 시각차를 보았다. 국정화 반대 측에서 말한 자유가 내가 지지하는 것에 가깝고, 찬성 측에서 주장한 자유는 사실 그 본질과는 많이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잘 봐 줘야 북한이 남한을 위협하고 충돌이 잦던 시절,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남한 정권에서 국민들에게 감내하도록 한 희생(?) 정도이지, 전혀 진정한 자유의 수호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 남한 정권마저도 반공을 명분삼아 독재체제로 이행되어 국민들을 탄압하는 등, 높은 수준의 자유를 결국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조치에 찬성하면서 이런 식의 자유 개념을 다시 꺼내든 것은 오히려 자유를 침해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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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는 재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자유의 개념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의 자유와 현대 민주주의에서 보장하는 '자유권'에서의 자유 개념은 사실 불평등이 이슈인 21세기에 와서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데, 전자와 후자의 혼동은 매우 잦다. 비록 이 둘은 계몽주의를 위시한 그 근대적인 거대한 흐름에서 함께 출발해서 오랫동안 같이 흘러온 것들이긴 하나, 전자의 경우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로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오히려 후자의 자유를 침해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러한 면에서 두 자유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 경우에 후자의 자유가 이미지가 좋기 때문에 그 구분을 흐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즉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능력이 없어서 도태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며,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하므로 그러한 것들을 일부러 없애자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주장들이다. 이들은 자유 경쟁 체제에서 우위를 점한 사람이 무한이기주의를 펼치는 순간 더이상 자유경쟁은 없다는 그런 역설은 고려하지 않고 래디컬하게 시장경제를 옹호한다. '자유롭게 추구하되,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추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하라'는 자유의 대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바로 이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의 '자유'가 힘을 얻을수록 경제적 이익을 얻는 이권단체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혼동이 조장되는 면이 상당하다고 본다. 자유경제원이 전경련 산하단체로 출발한 것에서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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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 '오독된 자유'가 교묘하게 결합되고 보수 헤게모니로 작동하면서, 현대 민주국가에서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권 개념과는 다소 떨어진, 한국 보수이념에서의 '자유'가 탄생한다. 바로 그래서 자유경제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아스트랄한 일이 가능한 것이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의 가치가 이 사회에 잘 아로새겨지는 날은 언제쯤 올까? 각 개인 스스로가 하고 싶은 바대로 추구하되, 타인이 하고 싶은 바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자는 건데, 이걸 실현시키는 길이 참 쉬운 길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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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2일 화요일

20대 총선을 앞두고: 투표행위의 의미에 관한 생각

  투표의 일차적인 목적은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를 당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의 결과는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거나, 안 되거나로 이분법적이며, 후자가 유력할 경우엔 어차피 유권자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는 당선이 안 될 텐데 뭐하러 투표를 하느냐는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 심지어, 소위 정치판 자체에 대해 잘 모르는 유권자의 경우는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거나, 결국 다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표 의지를 잃기가 더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투표 행위의 가치는 단순히 '내 후보가 당선되느냐 마느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거가 끝나면 다음날 뉴스에 나오는 것 중에 하나가 '투표율'이다. 정확한 숫자와, 퍼센티지와 함께 지역별, 연령별 투표율이 쭉 나온다. 이 투표율엔 내 한 표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투표율이다. 20대 투표율이 높다면 정치인들은 이 전 4년보다 이 다음 4년 동안 20대의 목소리에 더 많이 집중해 줄 거라는 것이다.

  투표권 행사, 참정권 행사의 의미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금 달리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내 투표는 아주 미약하나마, 진짜로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국민들의 정치 참여 의지가 높을 때만이 잘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들의 투표의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치인들이다. 거시적으로는 정치인들이 발의한 정책들에 의해 국민들의 삶에 활력과 여유가 생겨 투표하러 가는 것이 가능하고, 미시적으로는 정치인들의 디테일한 면모들을 보고 이에 열광하여 투표하러 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정치인들의 행태가 바람직하지 못하여 국민들이 정치 참여 의지를 잃는다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지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고, 정치인들의 행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악순환이다. 나는 이런 악순환을 깨고, 국민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생적인 힘에 의해 활발한 정치 참여가 이루어져 정치인들을 좀 놀래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인 믿음을 잃지 않고 싶다.

  효과적인 투표 참여 독려를 위한 참신한 설득 전략들이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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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