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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6일 금요일

'허언증 갤러리'의 미학: 열풍 이후에...


  인터넷 문화를 분석하는 것은 늘 재미있다. 허언증 갤러리(허갤) 식의 드립이 꽤나 참신했고 특유의 재미가 있었음에도 대중적으로 완전히 자리잡지 못하고 지금 와서는 각종 유머 게시판 등에서 캡쳐본으로만 간간이 돌아다니게 된 것은, 본문에 언급했듯이 허갤의 성격이 '코스튬 파티'의 장과 비슷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지극히 당연하다. 파티는 파티장 안에서만 성립될 수 있으며, 매일매일을 파티처럼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글에서는 '우월한 상태'를 자칭하는 허갤의 기본적인 양상만을 소개했으나, 얼마 안 가 역으로 압도적으로 우월한(신적인?) 무언가를 희화화함으로써 인간계로 끌어내리는 양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 허언증의 양상에 타인에 대한 비방도 포함됨을 고려하면 이 역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외부적 서술자의 입장에서 풍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상황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가면을 쓴 채 연기를 한다는 점은 여전하다. 관우를 희화화하여 많은 이들의 웃음을 산 다음의 글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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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1일 일요일

가즈아: 저 위대하고 엄숙한 약속을 냉소하라!

칼뱅의 종교개혁에서 발생하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이되어 미국 시민들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게 된 청교도적 윤리관은 우리에게 '욕망을 통제하고 근면하게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노동의 신성화와 연결되는데 이것은 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을 존중하고 촉진하는 긍정적 면이 있지만, 과도한 신성화로 비판을 차단하고 인간 존재를 노동에 한정짓는 점에서 부정적 영향이 크다.

그런 면에서 이 약속은 소시민을 양산하는 허위적인 약속이자 지배계급의 논리가 된다.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우리 사회의 수면 아래에서 꿈틀대는 수많은 불확실하고 미확정적인 욕망들이 분출되지 못하도록 억압한다.

가상화폐 열풍을 계기로 유행하는 '가즈아'라는 말은, 저 위대하고 엄숙한 약속에 의해 은폐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현대 세계 속 삶의 본질에 훨씬 가까운 모종의 '유희적인 불안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삶은 합리적인 보상체계라기보다는 약오르는 게임에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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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7일 수요일

야인시대 합성물(심영물) 비평

<야인시대 합성물(심영물) 비평: 매체이론, 연극이론, 소수자 인권 담론의 관점>

  한국 인터넷 문화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합성물 중 가장 성공적인 장르는 아마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등장한 공산당 연극배우 심영의 '내가 고자라니'라는 외침을 중심으로 한 야인시대 합성물(일명 '심영물')일 것이다. 최근에는 김두한의 4딸라가 재발굴되어 유행하면서 어린 세대에게도 야인시대와 그 합성물이 새롭게 알려지는 계기가 생기기도 했다(그리고 '고자라니'로 10년 간 최고의 권좌에 있던 심영이 김두한의 4딸라 때문에 급격하게 퇴물이 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씁쓸한 합성물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요즘 심영 근황' https://www.youtube.com/watch?v=5j1qJ4uEfgg ).

  합필갤이 망하면서 심영물 제작자들이 유튜브로 넘어가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현재, 영상당 조회수 수만~수십만을 넘나드는 유명 크리에이터들은 서로 활발하게 배우고 소스도 공개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댓글로도 활발한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심영물은 그 퀄리티가 상승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고정된 틀이 형성되고 있다. 그 틀이란 처음에 백병원 앞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 폭☆8로 끝이 나는 것 등이다(원작에서는 영사실이 폭발하는 것이나 합성물에서는 왜인지 주로 심영의 몸이 폭발하는 것 같다(...)). 물론 모두가 그런 틀을 따르는 것은 아니며,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받는 것도 아니다. 유튜브의 분위기는 합필갤보다 대체로 호의적이다(이하에서 서술하겠지만 이런 환경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합필갤과는 달리 신뢰에 근거한 '사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틀이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갖춰졌기 때문에, 유튜브 심영물 제작자들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진부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창의적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흥미로운 점 중 첫 번째는 심영물과 같은 디지털 합성 행위는 매우 사회적인 활동이며, 여기서 예술 생산수단의 민주화를 통해 발터 벤야민의 낙관주의적인 예측에 가깝게 나아갈 수 있는 진정한 대중문화의 긍정적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정해진 틀 속에서 크리에이터들이 최대한 창의적인 시도를 하다 보니 흥미롭게도 20세기 이후의 연극에서 해 오던, 배우와 배역의 존재론을 사유하는 연극미학적 실험이 심영 합성물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에 수강했던 연극미학 강좌의 기말 과제에서 나는 매체이론적 관점에서 디지털 매체의 전략과 현대 연극의 전략을 비교 분석한 바 있다. 이런 내게 심영물의 장기적인 유행이라는 현상 자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수많은 작품들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따라서 조금 부족하지만 앞서 말한 매체이론적 관점과 연극미학적 관점, 마지막으로 소수자 인권 담론의 관점에서 심영물 전반에 대해 평해 보고자 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 목 차 -
1. 디지털 합성 행위에서 엿보이는 진정한 대중문화의 가능성
2. 야인시대 합성물에서 드러나는 배우와 배역의 존재론
3. 야인시대 합성물의 불편한 진실과 그 과제: 남성 호모소셜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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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사람 1명, 근접 촬영

이미지: 사람 1명, 근접 촬영

1. 디지털 합성 행위에서 엿보이는 진정한 대중문화의 가능성
  초등학교 때 플래시로 만들어진 유머 컨텐츠들이 유행하면서 노래를 웃기게 개사하는 열풍이 분 일이 있다. 그런데 그 때 나는 노래 가사를 마음대로 개사하는 것보다는, 가사를 바꾸지 않되 짧게 자르고 재조합해서 웃기게 만드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개사의 경우에는 가사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으므로 질이 낮아지기도 쉽고 웃기더라도 반칙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많으나, 노래 재조합은 유명한 노래들을 오로지 잘라서 이어붙이기만 한다는 규칙 하에 얼마나 기발하게 그것을 수행하느냐에서 그 재미가 오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디시인사이드에서 발전한 필수요소 합성(주로 사진과 영상 위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상에서 필수요소로 합의가 된 요소들만으로 재구성하여 창작한다면 그 컨텐츠는 꿀잼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으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요소, 원작에 포함되지 않은 요소, 혹은 해당 컨텐츠만을 위해 제작자가 직접 그린 요소 등을 많이 이용할수록 일종의 반칙처럼 여겨져 몰입이 감소되며, 그 컨텐츠의 재미는 반감된다.

  이것은 야인시대를 합의된 필수요소들로 분해한 뒤 그것을 재조합해 낸다는 규칙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창출되면서 심영물의 강력한 미학적 혁신력이 발동되는 데 반해, 합의되지 않은 요소가 자꾸 쓰인다면 그 미학적 혁신력을 창출케 한 암묵의 사회적 '룰'이 깨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암묵의 룰이 존재하여 재미의 수준을 결정하는 데 작용한다는 면에서, 합성물 제작은 지극히 사회적인 활동이다.

  인간은 놀이를 통해 인간성을 체험하는 동물, '호모 루덴스'이다. 만약 놀이를 할 때 스스로 수립한 규칙을 어겨 가며 마구잡이로 한다면 본인에게도, 상대에게도 노잼을 선사한다. 합의된 필수요소들의 재조합이라는 사회적 규칙으로부터 창출되는 '자유'는, 합의되지 않은 요소들의 무분별한 사용으로부터 오는 '방종'에 비해 훨씬 재미난 대중문화적 놀이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합성물임을 천명했음에도 암묵의 룰을 지키지 않은 데서 오는 노잼이며, 애초에 합성물임을 천명하지 않은 순수 창작물들에 대한 평가는 전혀 별개라는 것을 굳이 명확히 밝혀둔다.

  물론 위 룰의 예외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비교적 근래에 생긴 '총 쏘는 의사양반' 소스이다. 원작에 없던 장면이고 모 제작자 1인이 갑자기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꽤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역시 합성물 제작이 지극히 사회적인 활동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한다. 작가는 고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총 쏘는 의사양반'이라는 새로운 소스를 흥하게 했다(이 소스는 '심영을 지켜낸 의사양반'이라는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쓰여 성공을 거두었다. 조회수 100만 회(!)가 넘었으나 안타깝게 실수로 삭제된 '협상에 실패한 김두한'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만큼 조회수가 높은 심영물은 드물다. https://www.youtube.com/watch?v=gxe_jkmnarE ).

  20세기에 대중문화가 최초로 등장했을 때 어떤 철학자들은 낙관했으며, 다른 철학자들은 비관했다. 그런데 현재의 대중문화 상황을 보면 기술매체가 계급을 조직할 것으로 전망한 발터 벤야민의 낙관론은, 대중문화란 문화가 아닌 문화산업일 뿐이며 상업화되어 인간을 종속시킬 뿐이라고 비판한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비관론에 철저하게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웃기게도 대중적인 여론마저 대중문화에 대해 냉소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심영물을 위시한 디지털 합성 행위는 문화산업이 아니며, IT와 관련된 강력한 물리적/정신적 인프라를 바탕으로 네티즌들이 기술매체를 민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생산하는 차세대의 예술형식으로, 아도르노가 경계한 상업화된 대중문화가 아닌, 벤야민이 전망한 진정한 대중문화로 나아갈 긍정적 가능성이 어느 정도 엿보인다.



2. 야인시대 합성물에서 드러나는 배우와 배역의 존재론
  합성물 내에서 관례적으로 어떻게든지 폭☆8로 끝을 맺게 되는 '배역'으로서의 심영은, 김두한의 말대로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다. 그러나 합성물 바깥의 가상적인 공간(연극에 비유하면 '무대의 장막 뒤편'라고 할 수 있겠다)에서 심영은 영원토록 다시 되살아나서, '배우'로서 각 심영물에 투입되어 매번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원작에서 심영에게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라고 말한 김두한이 정작 심영을 극적으로 용서하고 살려주게 된다는 아이러니와 맞닿아 있다.

  (폭☆8을) '닷-씨는 안 하겠소!'라고 외치는 심영의 바람은 심영물이 끊임없이 제작됨으로써 실패하게 되며, 이것은 심영이 욕망하고 의지하는 바대로 행할 수 없는 존재, 즉 정신적인 '고자'가 되었음을 뜻한다(언피씨하므로 따옴표를 쓴다). 제작자들이 유난히 심영에게 자꾸만 고통을 주며 그의 현실 타개 의지를 실패토록 하는 것은, 그가 고자가 되었다는 원작의 설정과 무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정상남성'이 아닌 자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한국사회의 남성 호모소셜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이 점은 이하의 3번 항목에서 다룬다.

  연극, 드라마, 영화 등과 같이 배우와 배역이 서로 분명히 구별되어 있고 배우가 자유의지에 따라 연기를 하는 기존의 장르와는 달리, 심영물의 경우에는 (1) 배우도 야인시대 속 심영이고 배역도 야인시대 속 심영으로, 배우와 배역이 일치되어 있다는 점 (2) 배우로서의 심영의 연기가 그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심영물 제작자의 일방적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의하여 그 특이성을 확보하고 위의 아이러니를 부각시킨다.
(항목 (2)에서 언급한 일방성은 '어그로가 된 심영의 어머니'라는 합성물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음. https://www.youtube.com/watch?v=bvW-y8z6HOI )

  참고로 여기서 실제로 심영을 연기한 배우 김영인 씨의 존재론까지 고려하는 것은 심영물 제작자들 사이에서도 핵심적으로 논의되는 이슈는 아니므로 별론으로 한다. 단, 배우 김영인 씨가 패러디에 대해 당혹감을 표하면서도, 결국에는 존중을 표하되 이왕이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유쾌한 쪽으로 합성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밝힌 바 있다는 점은 앞으로 모든 크리에이터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심영물이 통상적이지 않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갈 때, 혹은 심영물 속에서 상식적/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환상적인 상황이 벌어질 때, 상하이 조는 특유의 실감나는 표정으로 '오늘따라 왜 이러시오?'를 외친다. 이 물음은 위에서 소개한 '배우와 배역의 일치성' 테제를 고려하면 대단히 흥미로운 물음이 된다. 그가 배역으로서 던진 물음이라면 그 극중 사건의 의외성에 놀라서 한 말이겠지만, 배우로서 던진 물음이라면 심영물 속에서 '무엇을 연기할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연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심영물의 배우는 드라마 야인시대의 배역들인데, 제작자가 기존 야인시대 장면을 편집함으로서 모든 연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 배우는 자유의지가 없이 제작자의 의지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배역을 연기한다. 그리고 그 역할에 (강제로) 충실하다. 따라서 상하이 조가 심영물 제작자의 극본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수단이란 전혀 없다.

  그러나 합성물이라는 특성상 배역과 배우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배역으로서의 상하이 조가 '오늘따라 왜 이러시오?'라고 합성물 극중에서 묻는 '연기'는 곧, 배우로서의 상하이 조가 오늘따라 왜 그런 극본을 짜 왔냐고 제작자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합성물 배우로서의 상하이 조는 어떤 자유의지도 없이 철저하게 연기만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와 배역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현대 연극의 전략을 모사하여 철학적 의문을 유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심영물 내에서 의외의 일이 벌어질 때 배역으로서의 상하이 조가 외치는 '오늘따라 왜 이러시오?'는, 사실 철저하게 제작자의 의지에 의해 마음대로 재조합된 결과물인 심영물 속에서 그 의지에 의해 이상한 일이 벌어질 때에 배우로서의 상하이 조가 마음 속에만 담아두고 있을(물론 그에게 마음이란 없다) '오늘따라 왜 이러시오?'가 우연히 표출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합성물은 실제의 서사가 아니라 철저하게 기획된 인공의 것이라는 사실이 폭로된다.

  이 폭로는 연극과 드라마 등의 기존 매체가 마치 자신 안에 실제 세계가 들어 있는 것처럼 '제 4의 벽'을 쳐 놓는 데서 오는 묘한 지적 불편감을 멋지게 해소한다. 평소에는 아무리 이상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배우로서의 상하이 조는 무력하게 의지에 따라야 하나, 배역으로서의 상하이 조가 '오늘따라 왜 이러시오?'라고 외치는 순간만큼은 배우로서의 상하이 조도 '오늘따라 왜 이러시오?'라고 외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관객 역시 이것이 제작자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된 합성물임을 자연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3. 야인시대 합성물의 불편한 진실과 그 과제: 남성 호모소셜의 단면
  이상하게도 합성물 속에서 심영이 고자가 된 뒤에는 주로 의사양반, 상하이 조, 김두한을 비롯한 남성들에 의해 강제로 성폭력을 당하곤 하며, 이것이 게이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차별적인 드립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요새 심영물이 유튜브로 넘어가고 대중화 노선을 타면서 불쾌할 수 있는 성적인 합성물은 대폭 감소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딱히 성소수자 및 장애인 차별에 대한 성찰 때문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고자와 게이를 연결짓는 이 이상한 도식이 자연스럽게 정착했던 것은, 디시인사이드 사이트의 주류를 차지하는 남성 이용자들 사이의 호모소셜한 정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호모포빅한 이성애자 남성들의 입장에서 고자는 남성성을 상실한, 그래서 마음껏 희화화되어도 되는 존재이며, 게이는 남성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남성의 남성성을 훼손(?)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고자가 된 심영에게 의사양반이 성폭력을 가하는 과정에서는 고자됨에 의한 심영의 남성성 상실과, 의사양반의 성폭력에 의한 심영의 남성성 훼손(?)이 밀접하게 겹쳐 보이게 되는 것이다(매우 언피씨하므로 물음표를 쓴다). 앞으로 심영물은 이러한 기이한 도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소수자와 장애인 등의 소수자들을 포함한 모두가 상처받지 않고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심영물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살짝 추측해 보자면, 이것이 우리에게 심영물이라는 거대한 가능성을 열어 준 주역인 배우 김영인 씨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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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5일 월요일

저에너지 사회라는 꿈: 인프라와 미덕 사이에서

  에너지 절약이라는 미덕(?)은 개인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절약행위의 가치는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절약을 하는 데서 나온다. 많이 소비할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어 버리는 것은 결코 절약 정신 같은 게 아닌, '열악한 에너지 인프라'일 뿐이다.

  저에너지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환경론자들의 비전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절약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캠페인 등을 통해 설득해 낼 때 의미를 갖는 것이지, 국가적 아젠다에 의해 강요됨으로써 성립할 수는 없다.

  에너지 절약을 위한 캠페인 및 교육 등과는 별개로, 국가는 어찌되었건 국민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하여 혼란과 경제손실, 인명사고를 방지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에너지 절약이 인륜과 충돌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인륜을 택해야 한다. 대책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는 탈원전 기조, 그리고 최근의 반복적인 급전지시 등은 그래서 불안하다.

  전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계속 뼈를 깎는 식으로 절약을 요구하다 보면 심하면 블랙아웃까지 생길 수 있고,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사망에 이르는 사고까지 많이 발생할 수 있다. 절약이 미덕이고 저에너지 사회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식의 전형적인 나이브한 인식을 정부가 에너지정책에 무분별하게 적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개인용 비상발전기랑 부패하지 않는 비상식량이라도 준비해둬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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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1일 목요일

'군무새'에 대한 관점: 사회가 책임을 분담하자

  소위 '군무새'에 대해 대화할 때 그들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 표출과 희화화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복학생들 스스로도 군대에 대한 얘기를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많이 하지 말자는 식으로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하에서 언급할 '사회의 군대화' 문제를 제하고 보면 군대 얘기를 사회에서 하지 말자는 건 본질적으로 TPO의 문제에 가까우며, 갑분싸를 방지하고 활기찬 커뮤니티를 유지하기 위한 약속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여기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정반대로 접근해야 한다. 오히려, 군대 얘기는 여전히 '너무 적게 이뤄져서 탈'이다. 군대 얘기는 주로 과도한 자부심 표출이나 극도의 한탄과 같이 주변인들을 곤란하고 불쾌하게 하는 방향, 그리고 면제자∙미필자 차별과 '사회의 군대화' 등의 매우 유해한 방향을 위주로 표출되어 소산되는 데 그친다. 이를 비판하는 축에서도 여러 공동체에 잔존하는 군사 문화를 남성중심주의와 필연적으로 연결하여 비판하거나, 군생활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하거나 금기시하는 등, 개인의 마음가짐에 대한 가이드라인 이상으로 거시적인 문제의 실질적 해결에 도움이 되는 담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징병제도의 변화 필요성, 더 나아가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정치관 중에서도 매우 코어에 위치한 부분이며 징병제 사회에서 사회적으로도 금기시되어 온 부분이므로 지극히 민감한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깨고, 군대란 어떤 조직이며 어때야 하는 조직인지 등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의견을 나누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모병제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징병을 두려워하는 '남자답지 못한' 사람인 것이 아니며, 징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 여성이라고 해서 군대 문제에 대한 발화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군대에 대한 얘기, 혹은 '군대 물 덜 빠진' 듯한 얘기를 참고 들으면서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적인 모임 자리에서 군대에 대한 얘기가 불편감을 주므로 자제할 것이 권장되고, 적어도 현재 주류적인 방식의 군대 얘기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게 아니므로, 군대에 대한 얘기를 효과적으로 수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요를 말하자면, 첫째로 군대에서 겪은 힘든 일들과 부당한 일들에 대한 증언이 솔직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접수되어 유익한 영향을 낳을 만한 사회적 환경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어떠한 장치도 없이 군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억울함을 사실상 당사자 개인에게 오롯이 떠넘겨서 감내하도록 하는 현재의 상황은 매우 가혹하다. 그나마 있는 군인권센터가 왠지 모르게 뭔가 불온하거나 편향적인 무언가로 여겨지면서 보편적인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데, 누구의 책임이든간에 이런 상황도 반드시 해결이 필요하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최근 수년 간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운동이 가시화되며 성과와 한계를 보인 바 있는데, 물론 이들의 방법론을 무작정 군대 문제의 접근에 이식해서는 안 되겠지만 가시화라는 공통된 목표를 기반으로 참고할 만한 지점을 찾아보면서 요인에 대해 분석할 필요는 있다고 보여진다.

  둘째로, 높은 직급의 모범적인 군인, 어려운 환경에서 복무한 군인, 그리고 소위 '꿀을 빤' 사람 등의 다양한 경험이 모두 가시화될 필요가 있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존중과 보상이 필요하다(사실 이 부분은 군인들의 모범적인 사례 같은 것이 미디어에서 더 많이 조명되고 이미지가 개선되어야 해결될 문제 같긴 하다). 사회적 존중이 없기 때문에 이상한 방식으로 존중을 찾으려 하는 것이 군무새 문제의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여기서 군인에 대한 존중이 면제자∙미필자 차별과 '사회의 군대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지극히 중요할 텐데, 이하에서 서술하겠지만 사회에 '시민성'이 확고하게 성립되어 있다면 이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여기서 얘기가 결국 고대 로마로 회귀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소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군대의 영향으로 정말 심각하게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하고 이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트라우마와 비슷한 개념으로 사회적으로 접근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지, 공동체에서의 배척만으로 끝나는 현재의 세태는 바람직하지 않다. 사적인 개인들에게 무한한 아량에 따른 모범적 해결을 강요할 수도 없고, 그런 사람이 공동체에서 배척되거나 역으로 공동체를 장악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방관해서도 안 되므로 이런 문제를 다루는 공적인 장치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 위와 같은 것들은 물론 실현되면 좋은 것들이긴 하겠으나, 본래의 의도대로 실현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위와 같은 부분들이 주의깊고 세심하게 이뤄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역으로 '사회의 군대화'가 일어난 부분은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직간접적으로 군대라는 일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군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는 게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시피 한 기형적인 사태는 바로 이것을 경계하다 보니 벌어진 것일 듯하다.

  그리고 소위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들이 전세계가 지금 당장 총을 내려놓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낭만주의적인 생각만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군무새' 현상 그리고 군 제도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이해, 나아가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필요하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폭력이라는 것을 언급 자체를 거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삼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군대에 대한 대안적 담론을 그들이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어야지만 군대에 관한 '폭력적인' 담화를 쇠락시키고 군대의 '폭력에 관한' 제대로 된 담론을 등장시킬 수 있다. 나도 앞으로 그 중에 한 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해 볼 생각이다.

  요약하자면, 군대가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집단으로서 주민을 국민화하고 엘리트를 최전선에서 양성하던 시절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한 때 사회와 군대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져서 면제자∙미필자 차별과 '사회의 군대화' 등의 수많은 문제를 낳았고, 그래서 민주화된 사회의 시민들은 군대를 사회로부터 격리했다. 그러나 군대의 구성원은 군대 이전에도 사회 구성원이었고 군대 이후에도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그런 격리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민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책임 의식을 담지한 채, 군대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없는 특수성은 개혁해 가며 군대를 관리하는 공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우리네 시민사회는 쉽사리 '군대화'되지 않을 만큼의 맷집을 가지게 되었다. 주민들을 관리하던 군대가 이제 시민들의 관리를 받게 된 것이다. 군대 얘기는 바로 이렇게, '시민성을 바탕으로'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폭력', '시스템'이라는 키워드와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는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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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