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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토양에서 무신론 및 자유사상의 다음 국면을 위한 이론적, 전략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역사적 기원과 시공간적 맥락의 문제>
자유사상(Freethought)이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교리, 전통, 권위 등을 거부하고 논리, 이성, 과학을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과학적 회의주의, 세속적 인본주의, 무신론 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 왔다. 이러한 자유사상 개념은 서구권에서 유래했는데, 그 배경이 된 서구권의 정치적∙문화적 토양에는 기독교가 무려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강력한 제도종교로서 강력한 권력과 억압을 행사해 온 역사가 있다. 따라서 무신론 및 자유사상은 종교가 갖는 비합리적 요소에 대한 철학적인 반대 신념임과 동시에, 권력을 가진 제도종교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성이 강한 운동이기도 했다. 하필 기독교가 강력한 제도종교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이유로 인해, 자유사상 운동은 종교의 대표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성을 띤 채 저항적인 움직임을 도모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무신론자 및 자유사상가들은 종교 계열에서 생산되는 지식과 믿음들 중 비합리적이라고 간주되는 것들과 그에 따른 사회적 폐단을 다소의 유머와 조롱을 포함하는 형태로 지적하면서 결집을 도모했다. 특히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무신론적 철학자보다는 도킨스와 같은 과학자 출신의 무신론자들이 각종 선언들과 교양 서적들을 통해 부각되면서, 무신론자와 자유사상가들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러한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종교적 측면에 있어 한국의 문화적 토양은 서구권과 많이 다르다. 한국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비종교적 사고가 꽤나 잘 정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공 영역에서 종교가 일으키는 문제점이 다른 사회 문제들에 비해 눈에 띄게 큰 것 같지도 않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 문제는 사회 전면에 부각되기보다는 주로 대형 종교집단 내부의 분쟁 및 이에 대한 개혁적 종교인들의 탄식에 머무르며, 비종교인들 사이에서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주변인들의 소식을 통해 어렴풋이 전해져 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일반 대중이 종교 자체를 분쟁의 대상 혹은 공적 대화의 주제로 삼을 일이 많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무신론자들처럼 기독교를 — 그 중에서도 삼위일체, 예수 부활, 천지창조 등의 가장 유명한 믿음들을 굳이 찾아서 과학적으로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며 — 조롱하는 것은 그 비판으로서의 진지함이 결여되기 쉬우며, 신자 개인들에 대한 비난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진지한 담론을 생산하며 공공의 이익에 유의미하게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집단이, 종교인들을 비웃는 집단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권력이 공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 한국적 토양에서 이것은 비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을, 과학 전공자들이 호기심 넘치는 비전공자들을 조롱하는 적대적인 양상으로 이어진다.
<자유사상: 은밀한 종교정치의 비판자로서>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한국에서 무신론 및 자유사상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 개신교 대형 교회의 보수 정치 유착, 금전적 횡령, 권위를 이용한 성범죄 등의 폐단들이 존재한다. 덜 부각되지만 여타 종교에서도 유사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꽤나 공고하게 정착한 것처럼 보이는 세속주의는 종교의 공적 영향력에 대한 경계라기보다는 단순히 종교에 대한 무개입 혹은 무관심, 즉 ‘소극적’ 세속주의로서의 비종교에 가까우므로, 이러한 종교 내부의 폐단에 대한 공적인 가시화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반동성애 운동, 차별금지법 반대, 각종 가짜뉴스, 태극기 집회 등은 보수 개신교 대형교회의 동원과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이들 운동을 보도할 때 보수 개신교와의 상관관계를 딱히 밝히지 않는다(이는 종교계열의 언론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교회 내부에서 진보적, 개혁적 성향을 가진 신자들뿐이다.
따라서 종교집단 내부의 반사회적인 부분들, 종교가 세력을 동원하여 정치적 문제에 비가시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누군가는 특별히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종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공적 영역에서 논의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종교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비종교인들, 즉 세속주의의 적극적 실천자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유사상: 과학적 회의주의 및 과학문화의 친구로서>
한편, 단지 종교적 극단주의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의료, 건강, 교육, 역사, 언어 등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도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언어적 사변과 비약에 따라 임의적으로 창작되어 맹목적으로 믿어지는 지식들이 일으키는 폐단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이들 ‘유사-지식’의 원천은 광신적 신념과 연결되는 것일 수도, 돈벌이와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유사상의 오랜 친구인 과학적 회의주의의 역할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회의주의는 유사-지식들을 검토하고 폭로하는 학술적차원에 머무르기보다는, 그러한 유사-지식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는지, 누구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추적하여 축적하는, 적극적이고 불온한 사회적 활동이 될 때에야 튼튼하게 정초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별 지식들이 틀린 이유 — 정확히는, ‘틀리지조차 않은’ 기괴한 주장인 이유 — 만을 지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런 유사-지식들을 학계에서 생산된 지식들과 같은 링 위에 올려 주는 것이 되며, 대중 일반이 원자론적, 실증적 태도를 체화하고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링에서 승리할 수 있는(즉 대중에 호소하고 설득하여 유사-지식들을 배제하는 데 성공하는) 방법은 빠르게 생산되는 유사-지식들의 모순점을 일일이 지적하거나, 혹은 과학의 권위에 호소하는 방법뿐이기 때문이다. 유사-지식들이 생산되는 사회적 구조를 직접 추적하여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폭로해야만 학계에서 생산된 지식들이 유사-지식에 비해 차별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들과 달리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과학적 회의주의는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종교 및 철학에 대응하여 과학에 기반한 세계관을 건설해 보는 것, 그리고 과학적 용어나 개념들을 친숙하게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것과 같은 문화적 대안으로서의 과학문화와 협력하는 차원에서 노력을 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경우 과학과 과학문화를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를 탄복하게 만드는 물질, 천체, 혹은 시공간 그 자체와 같은 경이로운 물리적 대상들과 그것들에 대한 놀라운 이론들을 소개하는 글들은 그 자체로 과학이라기보다는 과학자의 ‘수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과학 지식과 논리, 발상의 전환을 기반으로 인류, 혹은우주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글들 역시 그 자체로 과학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운 낯설게 보기 기법을 활용하여 서술된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문화의 형성은 분명히 필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나, 만약 이러한 과학문화의 세계관이 뭔가 과학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다른 세계관에 비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간주되거나, 그 자체로 과학인 것처럼 혼동되는 일이 만성화되지 말아야 하며, 과학과 과학문화가 서로 분리되되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단어를 이러한 과학문화와 의미적으로 구별함으로써 보다 좁게 사용함과 동시에, 과학지식의 인식적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과학지식의 생산과정, 즉 과학활동의 특성을 분석하여 그 인식적 성공요인을 설득하겠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유사상: 세속적 인본주의의 친구로서>
한편, 성차별주의, 반동성애, 계급주의 등을 정당화하려는 여러 시도는 주로 교리, 철학적 논증, 지엽적 연구결과, 심지어 개인의 ‘뇌피셜’ 등을 바탕으로 해서, 명백히 실존하는 인격체들의 정체성과 권리를 부정하는 혐오적 신념이다. 누가 보아도 비과학적인 교리에 기반한 차별주의뿐 아니라, 진화론, 적자생존, 공리주의 등을 인용하여 일견 ‘과학적’이어 보이는 유사-철학적 차별 정당화 논증들도 충분히 이에 해당하며, 과학의 껍질을 빌려 쓰고만 있으므로 똑같이 비과학적이다. 이들에 대응하여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자유사상의 또다른 오랜 친구인 세속적 인본주의의 역할이 요구된다. 세속적 인본주의에서 역시 위와 마찬가지로, 차별주의에 대한 개별적 명제 차원에서의 반박과 함께, 사회적 혐오 및 차별의 본질과 그것이 종교집단에서 생산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추적하는 데까지 이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학적 회의주의와 세속적 인본주의가 내세우는 취지들은 원론적으로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이들이 경계하는 대상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는 적극적 지양보다는 소극적 무관심의 행태만을 보여 왔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특별히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구체적인 활동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들 분야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 오면서 나름대로의 독립적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담론이 무신론 및 자유사상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 놀이를 넘어, 공공성을 향해>
정리하자면, 각종 비합리적 믿음에 의해 일어나는 폐단에 대응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려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무신론자 및 자유사상가들로서 정체화하고 결집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초기에는 그들의 담론이 한국적 토양에 적응하여 성숙하기 이전 단계로서 서구권의 코드를 수입하여 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종교에 대한 과학주의적 검토에 놀이의 형태로 집중하면서 스스로의 공적 잠재력을 다소 저해하는 모습도 종종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무신론 및 자유사상 담론은 한국적 토양에서 시간을 갖고 성숙하고 있으며, 과학적 회의주의와 세속적 인본주의라는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의 가치를 공공성 속에 녹여내면서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으로의 성찰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적대성이 아닌 공공성을 향하여, 서로 신념이 다르더라도 상호 존중 하에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하여 무신론 및 자유사상 담론이 그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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